52. 물에 빠진 사자
리바이어던 함대의 등장으로 반파된 황제군은 유리한 고지대와 인근 영지를 버리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르세라 항구에 닻을 내리고 카루스와 재회한 리바이어던 함대는 상대가 황제군이건 황제 본인이건 크게 상관치 않았다.
그들은 배에서 내린 뒤에도 바다 위에서와같이 사나웠고, 황제군을 멀리 쫓아낸 뒤에는 환호하는 프랑크 후작과 르세라 방어군을 뒤로한 채 다시 배로 돌아가 버렸다.
크세노 황제는 절반밖에 남지 않은 황제군의 보호를 받으며 멀리 달아났다. 그를 찾아왔던 새들도 텅 빈 영주성 위를 맴돌다 소식을 전할 주인을 찾지 못해 길게 울며 사라졌다.
황제는 정복군이 정확히 어디까지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기약 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정복군과 합류하기만 하면, 르세라에 남은 자들을 모두 죽이고 도시를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리겠다. 크세노는 달아나면서도 그런 경고를 남겼다.
하지만 리바이어던 함대의 등장은 르세라 방어군에게 이 싸움의 승기가 자신들에게 기울었음을 알려 주는 축포와 같았다.
“황제를 쫓읍시다!”
한 귀족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전에 후작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황제가 정복군과 합류하기 전에 쳐야 한다고! 지금이 기회입니다. 기마대를 조직해서 황제를 쫓읍시다!”
“누가 말입니까?”
“우리에겐 무혈 제독이 있지 않소!”
모두가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회색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 호위 기사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가 카루스 란케아인 줄 꿈에도 몰랐던 프랑크 후작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후작은 혹시 자신이 아르테 백작과 그녀의 호위 기사에게 실수했던 건 없는지 과거를 돌이켜 봐야만 했다.
“제독.”
프랑크 후작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루스가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사실 그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 모든 건 율리아와 코코가 오르테가에서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판이었다.
르세라 방어군이 따라야 할 지휘관은 카루스나 데네브라, 프랑크 후작이 아니었다.
율리아 아르테였다.
하지만 그렇게 털어놓을 수는 없어서, 카루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 병사들은 배를 떠나지 않는다.”
“예? 하, 하지만…….”
“황제를 추적하고 싶거든 너희가 직접 병사들을 지휘해서 쫓아라.”
황제를 죽이러 가자고 외치던 귀족들이 한꺼번에 입을 다물었다.
무혈 제독이 있으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없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정복군이 어디까지 내려왔는지 모른다.
프랑크 후작은 등이 축축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황제가 정복군과 합류하면 곧장 르세라에 복수하러 돌아오겠지요?”
“글쎄.”
카루스는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가 다른 귀족들에게서 눈을 떼곤 프랑크 후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대가 짐작하는 대로 되겠지.”
“예?”
“회의는 여기까지다.”
율리아가 없으면 회의 같은 건 하나 마나가 아닌가. 카루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류하는 귀족들을 물리친 채 몸을 돌려 회의실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어떻게든 카루스를 찾아가 설득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의 말대로 함대는 바다에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프랑크 후작은 카루스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었다.
‘내가 짐작하는 대로 될 거라니.’
그러자 자연스레 율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르세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절망에 빠진 그의 멱살을 잡아채던, 맑고 또렷한 눈동자.
회의실을 도망치듯 달려온 프랑크 후작이 율리아를 찾아 데네브라에게 달려갔다.
“아르테 백작!”
헐떡거리며 계단을 오른 그가 황비의 응접실에 나타났을 때, 율리아는 데네브라의 긴 머리카락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햇살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율리아에게 머리카락을 맡긴 데네브라는 무척 편안해 보였다.
율리아는 크림처럼 하얀 약을 조금씩 덜어 데네브라의 머리카락에 바르고, 빗으로 빗어 내렸다. 그러자 인위적으로 까맣게 물들어 있던 데네브라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제 색을 찾기 시작했다.
“아, 금발이셨지…….”
프랑크 후작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데네브라가 카루스를 마음으로 쫓기 시작한 뒤부터 그녀는 오랫동안 검은 머리를 고수해 왔다. 하지만 그녀는 본래 빛나는 금발을 가진 여자였다.
“무슨 일이세요, 후작님?”
율리아가 물었다. 정신을 차린 프랑크 후작이 간절함을 담아 소리쳤다.
“당신을 따르겠소.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지시를 내려 주시오!”
데네브라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녀의 입에서 낮은 비웃음이 튀어나왔다.
“너도 이제야 알았구나. 이 판을 움직이는 자가 누군지.”
“황비 전하.”
“그거 아느냐? 황제가 날 폐위시키리란 것도, 너희가 올 거란 것도, 사생아를 거론하면 너희가 내 편이 되리라는 것도 전부 율리아가 알려 준 것이란다.”
“그게 사실입니까?”
숨이 막혔다. 레위시아 국왕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자를 시녀로 맞이했단 말인가.
“해적을 이용해 크세노를 바다에 고립시킨 것도 율리아가 한 짓이지. 덕분에 내 친정 가문은 병력을 모아 르세라로 이동할 수 있었고, 리바이어던 함대는 제독을 찾아 남하할 수 있었던 거야.”
데네브라가 손거울을 들어 올려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크세노와 싸우는 건 너희들이 아니야. 카루스 란케아도 아니다.”
율리아 아르테였다.
프랑크 후작의 얼굴이 서서히 경직되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조금 전까진 계단을 올라오느라 숨이 찼는데, 이제는 심장이 뛰지 않는 것 같았다.
피가 빠져나간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아르테 백작, 당신은…… 우리 편입니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치하다고 비웃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