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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화 (282/319)

246화

두 번째 전투는 황제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정복군이 도착하기 전에 황제를 쳐야 한다던 프랑크 후작의 주장에 힘이 실리기도 전, 바로 그날 새벽에 시작된 기습이었다.

한 번 패배했던 해안가 고지대에 다시 진을 친 황제군은 완만한 내리막에 보병 부대를 배치하고, 그들이 도시 경계를 넘은 뒤에는 기름 먹인 화살에 불을 붙여 쏘았다.

아군과 적군, 도시 안에 있는 시민들까지 무차별 공격하겠다는 뜻이었다.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습이었기에, 혼비백산한 프랑크 후작이 각 가문의 수뇌부와 함께 회의실로 달렸다.

갑옷을 입은 자는 없었다.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자도 없었다. 그들은 임기응변을 발휘해야 했다.

“황제는 미친 게 틀림없어! 정복군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을 텐데, 그들도 없이 싸움을 걸어오다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지척까지 온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소. 수도에서 이쪽으로 오는 모든 길목에 정찰병을 보내 놨거든.”

“그럼 왜 저러는 것입니까!”

“우리 생각보다 훨씬 분노한 모양이오. 이성을 잃은 게지.”

엉뚱한 추측이었으나, 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시종의 도움을 받아 실내복 위에 갑옷을 걸치던 프랑크 후작이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우린 함께 훈련 한번 한 적 없는 타인이오.”

“무슨 말씀입니까?”

“당장 한 몸이 되어 싸울 수 없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각자 부대로 달려가 그대들이 필요한 곳에서 해야 할 일을 하시오!”

“뭐라고요?”

“지금 이 상황에서 작전이 중요한가?”

후작의 말이 옳았다. 귀족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갑옷을 손에 들고 뛰는 자도 있었다.

“황비 전하께 달려가 상황을 보고해라!”

“황제군은 북쪽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다! 도시 경계에 있는 민가를 버리고, 큰길로 모이라고 해!”

그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는 귀족들 사이로 율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프랑크 후작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실내복이거나 자다 깬 얼굴인데, 그녀만은 기이하게 단정한 차림새에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깥바람이 그녀와 함께 걸었다. 훅 밀려오는 한기에 프랑크 후작이 가슴을 움츠렸다.

“후작님.”

율리아가 말했다.

“바다로 가야 합니다.”

* * *

르세라는 마을 단위로 이루어진 항구였다. 해안가를 따라 다섯 개의 마을이 길게 늘어서 있어, 해마를 닮은 도시라고 불렸다.

해적들이 바다를 지배하며 약탈을 일삼던 무렵, 사람들은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저들끼리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르세라는 그렇게 다섯 개의 마을이 합쳐져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해적이 사라져도 마을에 대한 소속감은 사라지지 않아, 사람들은 다섯 갈래로 갈라져 경쟁하곤 했다.

그중 가장 부유한 건 북쪽 해안을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그들이 르세라에서 제일 큰 부두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다.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빨리 나와! 집에 불이 붙었잖아. 빨리! 그냥 나오라고!”

“금고가…… 전표가 다 안에 있단 말이야!”

“미쳤어? 그게 지금 목숨보다 중요해? 나와, 이 인간아!”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덧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숨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들은 어떻게든 불을 꺼 보려고 했으나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보곤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치기 시작했다.

르세라 5분의 1이 무너졌다. 불에 타고, 점령당했다. 황제군은 감히 황제에게 반기를 든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망루 위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이 불이었다. 폐가 타도록 매캐한 냄새가 바닷바람을 타고 번졌다. 새카만 밤하늘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 와중에 별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지상을 바라보면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데,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런 현실로부터 뚝 떨어져 꿈속을 떠도는 기분이었다.

“왜…… 왜 이래야 합니까?”

프랑크 후작이 물었다.

그는 괴물을 바라보듯 율리아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보였던 인간적인 호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괴물, 혹은 마녀.

같은 편이라 굳게 믿었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정확히 언제 어디서 공격해 올지 예측할 수는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만약 황제라면 어떻게 할까, 그런 걸 생각해 보는 정도였죠.”

“그걸 예측 못 했다고 당신을 원망하진 않소. 아르테 백작, 지금은 황제군을 막아내기 위해 한 사람의 손이라도 보태야 해!”

“후작님.”

율리아가 물었다.

“제 호위 기사가 며칠 전부터 다섯 개의 해안 망루에 불을 밝히고 있다는 건 아세요?”

“보고 받았소. 그런데 그게 왜.”

“이건 등대예요.”

이곳은 망루의 역할을 다한 뒤부터 등대가 되었다.

율리아가 양손에 장작을 들고 거대한 불에 던져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병 속에 든 기름을 던져 붓기까지 했다.

불꽃이 유령처럼 춤을 추었다. 크게 몸을 일으킨 불이 붉은빛과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아르테 백작!”

“르세라 앞바다에 해적들이 나타나면 망루를 지키던 초소병들은 어떤 식으로 신호를 주고받았죠?”

“해적선을 발견한 자가 먼저 불을 피우면 그 아래서 북을 쳤소. 밤에는 불을, 낮에는 소리를 이용했다고 들었어.”

“후작님.”

율리아가 그에게 기름통을 내밀며 말했다.

“오르테가를 떠나기 전부터 생각했어요. 우리에겐 무혈 제독이라는 영웅이 있는데, 왜 그를 남부에 묶어 놓으려고 하나.”

“뭐…… 뭐요?”

“카루스 란케아는 여기에 있어요.”

프랑크 후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리바이어던 함대도, 여기에 있어요.”

율리아가 한 손을 쭉 뻗어 바다를 가리켰다.

새카만 바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프랑크 후작은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고함을 치거나, 그게 정말이냐고 환호할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당신은 도대체…….”

“보세요.”

율리아가 기름통에 남은 기름을 모두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새빨간 불꽃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올랐다.

그러자 칠흑과도 같았던 바다 위에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밤하늘 가득하던 별이 수평선으로 내려와 앉은 듯 수십, 수백 개의 불빛이 점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프랑크 후작이 망루 난간에 몸을 기댔다. 떨어지면 죽을 높이임에도 그는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난간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리바이어던이다.

깊은 바다에 사는 괴물. 한 번 목격한 자는 살아 돌아갈 수 없다던 무적의 존재.

카루스 란케아를 무혈 제독으로 만들고, 바이칸 서부 해상에서 해적의 씨를 말린 자들.

수평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나타난 배들이 점점이 밝혔던 불을 한꺼번에 들었다.

르세라 앞바다가 리바이어던 함대로 가득 찼다.

프랑크 후작이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망루에서 떨어질 기세로 달려간 그가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들더니, 바다를 보라고 소리쳤다.

“바다를 봐! 바다를 보라고, 이 새끼들아! 바다를 보라니까?!”

그를 따라 달리던 기사들이 어리둥절해 바다를 보았다.

저게 뭔가.

검은 바다에 무시무시한 배들이 떠 있었다. 한꺼번에 불을 밝힌 배들이 한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이칸에 저 정도 규모를 가진 함대는 단 하나뿐이었다.

“리바이어던이다!”

그들의 입에서 비명과 환호가 번갈아 튀어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바다를 봐라! 바다를 보라고 해! 놈들에게 전해라, 아군이라고! 바다를 보라고!”

“아군이다. 지원군이야!”

“무혈 제독이 왔다!”

달아나던 시민들도,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각자 가문의 병사들과 고군분투하던 귀족들도, 성 꼭대기 방에서 불안해하던 데네브라도, 모두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군함이 몸을 돌렸다. 느리지만 정확하게. 그들은 율리아와 카루스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곤 황제군이 차지하고 있는 해안가 고지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강렬한 대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르세라엔 대포 소리를 처음 들어 보는 사람도 많았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함대가 아니라 포탄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황제군이 거기 있었다.

황제군이 달아나고 있었다.

바다에서 나타난 괴물이 육지의 군대를 물어뜯었다. 포탄이 떨어지는 곳마다 지옥도가 펼쳐졌다. 기세 좋게 내려오던 황제의 병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은 그저 저 괴물에게서 달아나려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적의 진영을 망가뜨리는 데 성공한 함대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뱃머리를 정확히 북쪽 부두를 향해 놓고,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굶주린 괴물은 뭍에도 발을 올릴 수 있었다.

리바이어던 함대는 아주 오랫동안 제독의 부름을 기다렸다. 황제가 그들을 핍박하고 차별해도, 바다에 고립시켜 움직일 수 없게 해도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서북부 무스빌리에서 배를 타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 섬. 리바이어던은 그곳에 죄인처럼 갇혀 지냈다. 황제가 카루스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을 짐승처럼 가둬 두었기 때문이다.

“르세라로 와.”

“황제를 쳐라.”

“나는 반역을 저지를 것이다.”

마침내 때가 왔다. 그들은 언제든 출항할 수 있도록 모든 군함을 준비시켜 두고 있었다. 바이칸의 국기는 버린 지 오래였다.

거창한 이유는 필요 없었다. 황제는 카루스의 적이었고, 리바이어던의 적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어부들이 앞다투어 부두를 비우기 시작했다. 커다란 상선에서부터 작은 어선까지, 모든 배가 함대를 위해 부두를 비웠다.

망루에서 내려온 카루스가 혼자 걸어서 부둣가로 왔다.

그의 곁에 다가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바이어던 함대에서도 가장 빠르고 무시무시한 배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 자리에 멈춰 선 카루스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배 위에 빼곡하게 모여든 그의 부하들이 우묵한 눈으로 제독을 반겼다.

말 없는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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