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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화 (279/319)

244화

그가 달려가는 방향에 해적 우두머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는 자식 또래의 왕을 대하면서도 적당히 예를 차릴 줄 알게 된 그들이 허허 웃으며 자리를 만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 전하.”

“무슨 얘기 하고 있어?”

“저걸 넘을 놈을 고르는 중이었소이다.”

“뭘 넘어?”

“저거.”

한 해적이 티타니아를 가리켰다.

그의 입에서 매캐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래 섞인 기침을 두어 번 내뱉은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국왕 전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뭐어? 당연히 미쳤다고 생각하지. 저건 군대가 넘을 수 있는 산이 아니야. 팔다리 후들거리고 발톱 빠진 상태로 전쟁터에 나가고 싶은 게 아닌 다음에야.”

“천천히 가면 되지.”

“보급은? 가면서 풀뿌리 캐 먹고, 나무 열매 따 먹고?”

“사냥하면 되지!”

“해적은 배나 타!”

“미안한데, 벌써 뽑아 버렸어.”

한 해적이 텅 빈 제비뽑기 통을 흔들며 레위시아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들은 말로는 죄송하다고 하면서, 왕이 하는 말은 전혀 듣고 있질 않았다.

레위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가 걸렸는데?”

“어디 열어 볼까.”

해적들이 몸을 들썩거리며 제비를 펼쳤다. 어차피 들통날 걸 알면서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 큰 몸을 돌려 구겨 앉은 자도 있었다.

레위시아가 티타니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뽑힌 놈은 이제 산적이 되는 건가.”

‘X’를 뽑은 해적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제비를 던졌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저들끼리 악수를 하거나 주먹질을 하는 등 요란을 떨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의자에 앉아 침묵하는 해적이 하나 있었다. 그의 손에서 ‘O’가 진하게 그려진 종이가 떨어졌다.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종이를 잡아챈 레위시아가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산악전엔 자신 있고?”

당첨된 해적이 대답 없이 일어나 몸을 풀었다. 선장치곤 무척 젊은 자였다. 그를 따르는 해적들의 숫자는 대충 천여 명. 남부를 수호하기보단 바이칸 서부 해안으로의 진출에 뜻을 둔 자였다.

그가 나이든 선장들을 향해 물었다.

“늙은이들, 이십 년 전엔 어떻게 싸웠어?”

“그냥 싸웠지. 뭘 어떻게 싸워?”

“어떻게 싸웠기에 황제 새끼가 겁보 머저리가 되어서 도망쳤냐고? 후배를 위해 그 정도도 얘기 못 해 줘?”

“그때 어땠더라…….”

해적들이 머리를 맞댔다. 바다에서 저들끼리도 싸우기 바빴던 자들이 한데 뭉쳐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레위시아의 가슴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뭉클함이 피어올랐다.

콧등이 찡했다. 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른 그가 해적들에게 말했다.

“있잖아. 나중에라도 우리 배는 털지 마. 배신감 느껴질 것 같단 말이야.”

“어이, 국왕 전하.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오르테가 상선은 제일 좋은 먹잇감인데. 우린 해적이란 말이오! 그게 싫으면 우리가 전쟁 나가서 다 뒈지길 기도하면 되겠네.”

“그래, 그냥 다 뒈져라.”

레위시아가 이죽거리며 일어섰다. 발로 의자를 쾅 차 버리고 돌아오는 그의 등 뒤로 해적들의 난잡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 * *

첫 승리를 거둔 르세라에 상당 규모의 병력이 증원되었다. 데네브라의 친정 가문과 그 파벌이 보낸 지원군이었다.

상비군이긴 해도 그들은 정예였다. 기사단은 물론이거니와 기마 부대와 장거리 부대가 따로 운용되어 지상전에 취약한 르세라에 큰 힘이 되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기다리다 사람 목 빠질 지경이 되어서야 대가리를 들이밀다니, 솔직하게 말해 보아라. 누구 엉덩이가 그리 무겁더냐? 응? 말하라니까!”

“황비 전하, 고정하십시오.”

“고정? 지금 고정이라고 했느냐? 크세노가 날 폐위시키려 할 때, 너희는 도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었기에! 내가 폐위되면 너희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

“저희는 전하와 운명을 함께하는 자들입니다.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말만 번지르르해서는!”

구해 주러 온 사람들한테 소리부터 냅다 질러 버리는 데네브라를 보며, 프랑크 후작이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나섰다.

“하하하하! 왜 이러십니까. 여기 저를 보십시오. 황비 전하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르세라의 은인이십니다. 하하하!”

후작이 넉살 좋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무마하는 동안, 율리아는 황비의 뒤에 서서 몰래 지원군 수뇌부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데네브라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그녀와 운명을 함께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하는 것 같았다.

지원군이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이유는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리라.

설득했을까. 아니면 제거했을까.

저 가문에서 자란 데네브라의 성정을 생각하면 제거했을 확률이 높았다.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면 뒤에서 뒤통수를 맞지 않아도 되니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전하, 르세라로 오는 길에 북부 전선에 대규모 방어진이 펼쳐질 거란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북부? 대규모 전투라고?”

“운하를 빼앗기면 가장 안전하고 빠른 보급 경로를 빼앗기는 것이기에, 모든 병력을 쏟아부어 지키려고 하겠죠. 북부 연합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운하를 손에 넣으려 할 겁니다.”

“운하? 그게…….”

데네브라가 당황해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북부의 지형이나 전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데네브라는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율리아가 데네브라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북부는 연합에 맡기고, 너희는 르세라를 지키는데 전력을 다하라고 하세요.”

데네브라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똑같이 말했다.

“북부는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까 염려 마라. 너희는 이제부터 나와 르세라를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예, 황비 전하.”

“잘 들어라. 내가 섭정의 자리에 오르면 너희는 군주를 배출한 가문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쓰일 바이칸 역사서 첫 줄에 나오는 첫 번째 이름. 내 이름과 바이칸 사이에 너희 가문의 이름이 들어가겠지. 어쩌면 다음 대의 황제도 같은 이름을 쓰게 될지 모른다.”

데네브라는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아주 잘하는 편이었다.

욕심을 부추기고 승리감에 도취시켜 두려움과 의심을 멎게 하는 것.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탐나지 않느냐?”

그날 황비의 친정 가문에서 도착한 지원군이 르세라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미온적이었던 인근 영주 중 서넛이 이쪽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군과 지원 병력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제이비온을 선택하겠다던 데네브라가 위레우스의 어미와 자주 만나면서 태도를 확실하게 하지 않자, 불안해진 제이비온의 어미가 가문에 파발을 보내어 꽤 많은 수의 병사와 보급을 받아냈다.

그러자 위레우스의 어미도 남편에게서 그와 비슷한 규모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르세라 바닷가에는 작은 성처럼 생긴 해안 망루가 여러 개 있었다. 마지막 해적왕이 바이칸 서부 해상을 지배하던 시절, 마을 단위로 이루어진 르세라에 해적의 배를 감시하려 세워진 망루였다.

당시 해적들은 작은 마을을 노려 약탈을 일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루를 지어 놓고 해적선이 나타날 때마다 서로에게 소식을 알리곤 했다.

카루스는 그 망루에 올라 있었다.

밤하늘 아래 회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버려진 망루에서 뭐 해요.”

율리아가 다가와 물었다.

카루스와 리바이어던 함대가 바이칸 서부 해상에서 해적의 씨를 말려 버린 뒤부터 르세라의 망루는 버려져 낡아 빠진 등대가 되었다.

망루 꼭대기에 커다란 화로가 있어, 카루스의 등 뒤로 불꽃이 어른거렸다. 조금 전 그가 피워 놓은 불이었다.

율리아는 화로를 빙 돌아 그에게 다가갔다.

카루스가 난간에 팔을 올리고 말했다.

“내 영지엔 바다가 없어.”

“네?”

의외의 사실이었다. 율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날 때부터 바닷가에 살았을 것 같은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그가 어쩌다 해군 제독이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카루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부모님은 날 기사로 키우셨지. 완벽하고 명예로운 사령관이 되라고 하면서.”

“엄한 분들이었다고 들었어요.”

“내가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울 때마다 아버지의 어깨엔 훈장이 늘고, 어머니의 드레스엔 보석이 늘었어.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는데…….”

“그런데요?”

“어느 날이더라. 황제가 나를 불러서 함대를 맡아 보지 않겠냐는 거야. 서부 해상에 해적 세력이 국가를 이룰 정도가 되니 골치가 아프다면서.”

카루스가 피식 웃으며 율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그녀의 손바닥에 키스하며 말했다.

“난 그때 수영도 할 줄 몰랐어.”

“뭐라고요? 그런데도 함대를 맡았어요?”

“부모님이 격렬하게 반대하더라고.”

당시 카루스는 너무 젊었다. 성인이 된 지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해군은 특별한 조직이다. 노련한 뱃사람이자 지혜로운 사령관, 냉엄한 제독. 그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물 위에서 그들을 통솔할 수 있다.

“바다에 나가자마자 물고기 밥이 되거나 해적의 손에 목이 잘려 죽을 거라고, 황제가 널 죽이려고 벌이는 수작질이라며 길길이 날뛰더군.”

“부모님이요?”

“그래.”

“그런데도 바다에 나갔군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았어.”

카루스는 그때 자신에게 그렇게 대단한 반항심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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