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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화 (278/319)

243화

“프랑크 후작님.”

잠시 후 그의 집무실에 율리아가 나타났다.

데네브라가 인근 영주들과 친정 가문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는 동안, 율리아는 프랑크 후작을 만나러 온 것이다.

“아직 상대 병력의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소. 지원군을 기다리며 버티는 것도 애매해. 저들에게도 지원군이 있을지 모르니까.”

후작의 말이 갈수록 빨라졌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의 집무실 한가운데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를 보고 있었다. 르세라의 지도가 수놓인 태피스트리였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한없이 깊게 가라앉았다.

“후작님.”

율리아가 손가락으로 르세라 북쪽, 지대가 높은 해안가를 가리켰다.

“상대는 이곳으로 오나요?”

“뭐 하는 겁니까?”

프랑크 후작은 율리아가 데네브라를 조종하는 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르테가에서 2왕자 레위시아를 왕으로 만든 장본인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전쟁에 대해 논할 마음은 없었다.

“맞소. 지금은 급한 상황이니, 당신은 데네브라 황비께 가서…….”

시녀는 시녀일 뿐이다. 간혹 율리아처럼 정쟁에 능숙하고 간계에 뛰어난 자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병법과 전술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율리아가 그런 그에게 다 안다는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르세라는 함락되지 않아요.”

율리아의 목소리엔 기이한 힘이 있었다. 크지도 않고 울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듣다 보면 꼭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가슴을 들썩이던 프랑크 후작이 다시 길게 심호흡했다.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이 간신히 제 리듬을 되찾았다.

“설명해 주시오.”

그가 눈짓으로 사과하며 말해 왔다.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그는 나쁘지 않은 동료였다. 황제가 왜 프랑크 후작에게 서남부 대귀족의 자리를 내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이득이 확실한 싸움엔 몸 사리지 않고, 같은 편이란 확신이 드는 상대에겐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는 남자.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제의 눈엔 이 모든 게 시간 싸움처럼 보일 거예요. 그는 서둘러 진격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엔 데네브라 님이 있으니까요.”

“황비 전하의 친정 가문에서 지원군을 보내기 전에 쳐야 한다는 거겠지.”

“맞아요.”

“하지만 저들에게도 황제 폐하의 정복군이 있소. 그들은 무시무시한 전쟁 전문가야. 바이칸을 제국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기도 하지.”

프랑크 후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게 시간 싸움이라는 건 이쪽에도 해당하는 얘기라며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정복군은 황성에서 와요. 거리가 멀죠.”

“폐하에겐 아주 빠른 새가 있소. 벌써 소식이 닿았을 수도 있어!”

“후작님.”

율리아가 그를 달래듯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오르테가에서 데네브라 님의 편에 서기로 했을 때, 제가 보냈던 전령들 기억하시죠?”

“전하께서 폐위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전하려 한 것이 아니었소?”

“르세라에 지원군을 요청했어요.”

“뭐요?”

그게 언제더라. 한 달도 더 전의 일이 아닌가.

프랑크 후작의 가슴이 다시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 눈을 한계까지 치켜뜬 그가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게 사실이냐고, 그때부터 이 일을 예상했냐고.

율리아의 손가락이 태피스트리의 한 부분을 다시 가리켰다.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말해 주세요, 후작님. 저들은 이곳으로 오나요?”

“맞소. 내게 선전포고한 두 사람의 영지는 이곳과 이곳에 있어. 아주 가깝지. 해안을 낀 고지대는 저들에게 무척 유리한 지형이라, 반드시 막아야 할 텐데…….”

“여길 내어 주세요.”

저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일부러 내어 주라니.

이제는 율리아가 무슨 말을 해도 놀랍지 않을 지경이었다. 기가 막힌 나머지 저도 모르게 마른 웃음을 터뜨린 프랑크 후작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지원군이 그쪽에서 오는 거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프랑크 후작이 그렇게 말하자, 율리아가 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황제는 오랫동안 바다를 떠돌았어요. 데네브라 님의 친정 가문에서 그 많은 병력이 조직되고,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보고받을 수 없었죠.”

“하…….”

“르세라는 함락되지 않아요.”

율리아가 단언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질 수는 없다. 크세노 황제에게 새가 있다면 이쪽엔 사람이 있다. 지난 삶의 경험이 있다. 절박함이 있다.

이건 질 때마다 판을 엎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니다.

내게는 유일한 기회다. 그러니까 이길 것이다.

크세노 황제의 척결 명령에 힘입은 두 명의 영주가 르세라 북쪽 해안가 고지대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시간 싸움이라던 황제의 말을 기억하곤, 전령을 보내 포고문을 읽게 하거나 상대 영지의 영주를 만나 규칙을 정하는 등의 사전 쟁의를 무시하고 곧바로 무기를 들었다.

전운이 감돌았다. 도시 전체가 긴장감으로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침묵하는 병사들 속에 고성을 지르는 지휘관이 보였다. 시민들은 덧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으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폐하를 배신한 르세라의 영주를 죽여라!”

“투항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늦추위가 기승이라, 병사들의 입에서 흰 입김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막아라!”

“르세라를 지켜라! 바이칸의 미래를 지켜라!”

전투가 시작되자 병사들의 몸에서도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슷한 병력에 비슷한 실력, 하지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쪽에 약간의 승기가 기울었다.

“겁먹지 마라! 저들은 황제의 정복군이 아니다! 너희 가족과 너희 터전을 약탈하러 온 강도떼일 뿐이야! 막아라! 막아야 한다!”

“후작님!”

“지원군이 온다, 지원군이 올 거란 말이다!”

프랑크 후작의 목에서 피 섞인 고함이 쏟아져나왔다. 그는 전장에 우뚝 서서 얼굴이 벌게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지원군이 온다.

그 말은 병사들에게 큰 의지가 되었다. 가족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자들에겐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들은 땅에 두 다리를 박고 버텼다. 앞에 있던 병사가 쓰러지고, 옆에 있던 병사가 쓰러져도 달아나지 않았다.

지원군이 온다.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안 돼! 이쪽으로! 움직여라, 어서!”

해군 위주로 편성된 르세라의 병력은 지상 전투에 경험이 부족했다. 중앙 방어선이 무너지자, 다급해진 프랑크 후작이 측방 부대를 모두 중앙으로 끌어모았다.

그래도 한 번 무너진 방어선은 수복되지 않았다.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병사들의 모습을 목격한 그가 핏발선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지원군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건가.

나는 잘못 선택한 건가. 내 욕심 때문에 르세라는 무너지게 되려나. 황비는, 황비의 시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그때였다.

발밑에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감각이 한계까지 예민해진 기사들이 가장 먼저 이상을 감지하고 진동이 시작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원군이었다.

붉은 갑옷을 입은 황비의 군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데네브라의 친정 가문과 그 방계의 가신들, 그리고 황비에게 충성하는 병사들까지.

피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왔다.

황비를 상징하는 깃발이 크게 펄럭였다. 먼 길을 달려왔으면서도 그들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지원군이 왔다-!”

프랑크 후작이 절규하듯 외쳤다.

데네브라의 지원군은 동북쪽에서 직선으로 달려왔다. 선두엔 전신 갑옷과 긴 창을 든 기마 부대가 있었다. 그들은 번개처럼 쏘아져 적군의 측면을 꿰뚫었다.

적군은 그들에게 몸통의 절반을 내어 준 뒤에야 후퇴 명령을 내렸다. 두려운 나머지 바다로 몸을 던지는 자들이 많았다.

첫 승리였다.

* * *

‘발에 채는 봄이 한 뼘 거리에 있다.’

뱃사람들은 이 시기만 되면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남부니까.”

코코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릴 때는 영감들이 낮부터 술 마시고 헛소리를 한다고 비웃었는데, 30대가 된 뒤에는 봄이 올 때마다 저 말을 떠올리며 웃게 되었다.

봄이 이른 남부라서, 곧 죽어도 낭만을 찾는 뱃사람들이라서.

“꼭 오늘 같은 날 율리아는 눈보라 속에 버려졌겠네요.”

티타니아를 바라보는 코코의 눈엔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산맥 아래 바닷가엔 이른 봄이 찾아와 벌써 정수리가 간질간질한데, 산맥 위엔 눈보라가 치고 있을 것이다.

레위시아가 망토를 끌어 내리며 그녀의 곁에 섰다.

“바실리 그 자식을 내 손으로 죽였어야 했는데. 율리아한테 다 맡겨 놓고 구경만 한 꼴이라니. 아마 난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누군들 안 그러겠어요.”

“율리아는 여길 내려올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티타니아는 험한 산맥이었다.

노련한 보부상이나 몸 튼튼한 용병, 약초꾼이나 되어야 넘어 다니는 험지. 오르테가를 지켜주고, 오르테가를 고립시켰던 원인. 누군가에겐 극복의 상징이며, 누군가에겐 영험한 정기와도 같은 산.

“뻔하죠. 복수해야지. 죽여 없애야지. 내가 당한 만큼, 꼭 그만큼 갚아 줘야지. 이번만은 살아남아야지. 꼭 살아남아서…….”

“알고 보면 율리아도 참 지독한 성격이란 말이야.”

“알고 보면, 이라뇨. 그 계집애는 그냥 지독해요. 세상에서 제일 지독해. 적당히 해도 될 텐데, 어쩌면 그렇게 지독하게…….”

“코코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왜요?”

“가르쳤잖아!”

“전하도 제가 가르쳤어요!”

“난 배움이 얕잖아.”

레위시아의 당당함에 할 말은 잃은 코코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제발 그러지 마세요. 과거 왕들이 왜 그렇게 하나같이 재미없는 사람이었는 줄 알아요? 왕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위엄 때문이에요! 백성들은 진중하고 성실한 군주를 원해요!”

“나 정도로 잘생기면 괜찮아.”

이제는 뺀질거리는 걸 넘어 헛소리까지 쏟아내는 그를 보며, 코코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가세요. 가서 해적들한테 그렇게 말해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레위시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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