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르세라를 둘러싼 인근 영주들은 이 상황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데네브라와 다음 대의 후계자를 선택하면 황제에게 목이 날아가고, 황제를 선택하면 데네브라와 반역 세력에게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북부가 저 지경이 아니었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문제지.”
누군가 무거운 탄식을 내뱉었다.
북부 연합의 연이은 승리로 북부 전선이 상당히 남하했다는 소식이 퍼져 있었다. 평원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 아래에 있는 영지까지 넘어갔다는 것이다.
“북부 연합이 조금만 더 내려오면 운하를 빼앗기게 돼. 그것만은 막아야 하는데, 지원군은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겠지. 황제 폐하께서 친정하거나 강제 소집 명령을 내려야 그나마 가능한 일인데, 그분은 북부를 버렸잖은가.”
분위기가 무거웠다. 황제가 북부 전선에서 평원 방어를 앞두고 갑자기 멋대로 사라져 버렸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이오?”
한 영주가 물었다. 그는 이미 결심을 마친 뒤였으나, 다른 영주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의 질문에 쉬이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하더니 은근슬쩍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이다.
“뭐 하는 겁니까? 우리끼리라도 뭉쳐야지요. 이러다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고 언젠가 단두대에 줄을 서게 될 것이오!”
“말은 바로 합시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해봤자 무슨 이득이 있답니까. 당신이 나를 배신하고 밀고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니오?”
“뭐라고? 사람을 어떻게 보고!”
“돌아가서 가신들과 상의해 봐야겠소.”
“르세라를 치려면 지금이 적기인데? 시간을 끌다간 반격당할 수 있다니까!”
“그럼 당신은 황제 폐하를 선택하는 거요? 잘 알겠소.”
소리치던 귀족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당황한 그가 주위 영주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욕심 많은 귀족들이 그를 흘깃거리며 알 수 없는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내가 폐하의 명령대로 병력을 이끌고 르세라를 치면…… 내 영지는?’
배신자는 어디에나 있다.
‘저놈들이 그 틈을 타 내 영지에 쳐들어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의견은 이미 갈라졌다. 저들 중에도 데네브라의 편에 서는 자가 있을 것이다.
르세라가 방어적 요새는 아니었으나, 데네브라가 있는 이상 쉽게 무너지리라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황비의 친정은 바이칸에서도 최고의 가문으로 손꼽히니까.
그는 깨달았다. 그들은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다는 걸.
혼자 르세라에 쳐들어가는 건 바보짓이요, 지금 황비의 편에 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 나도 영지로 돌아가 가신들과 상의를 좀.”
“그럴 줄 알았소이다.”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빨랐다. 르세라에 들어올 때는 한데 모여 거들먹거리더니, 나갈 때는 뿔뿔이 흩어져 서로를 견제했다.
프랑크 후작은 데네브라에 대한 평가를 상당 부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멍청한 황비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여우 같은 구석이 있었다.
“영주들이 병력을 이끌고 자기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은밀한 경로로 우리 쪽에 붙겠다고 의사를 전해 온 자가 있기는 하나, 영지 방어가 우선이라며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습니다.”
“흥.”
“대단하십니다. 후계자를 내보인 것만으로 이런 결과라니.”
“내…….”
내 생각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데네브라가 눈동자를 굴려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가 티 나지 않게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인근 영주들이 물러간 건 여러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율리아는 그것까지 설명해 주진 않았다. 자신은 감춰져 있는 편이 좋다. 프랑크 후작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모양이지만, 그 역시 섣불리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우연이었다.”
데네브라가 대충 얼버무린 후에 율리아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황비다운 모습을 보이고자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앉고 일어서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누군가의 손이 필요했다. 그래도 아무나 데리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오르테가에서 자신의 측근들에게 크게 배신당한 후, 데네브라는 율리아가 아닌 사람에겐 함부로 손을 내밀지 않게 되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위레우스의 어미가 저녁을 대접하겠다는데, 쓸데없는 소리를 할 게 뻔해서 제이비온의 어미도 불렀어.”
잘했군.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데네브라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걸 도왔다.
“아이들에게 잘해 주시되, 어미에게는 냉정하게 구세요. 아이들의 실수나 투정은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어미가 도 넘은 욕심을 부리거나 전하께 간섭하면 역정을 내세요.”
“알았다.”
“저는 르세라의 내륙 쪽 경계를 돌아보고 올게요.”
데네브라는 율리아와 함께 가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시무룩한 심경을 감추고자 되레 큰 소리로 말했다.
“조심하거라!”
“네, 전하.”
내륙 쪽 경계엔 호위 기사 루이스를 데려가기로 했다. 율리아에게 뭐라 더 말하려던 데네브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드레스를 갈아입겠다며 자신의 거처로 발길을 돌렸다.
“허어.”
황제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해 바이칸 황실 최고의 문젯거리로 손꼽히던 데네브라가 오르테가의 평민 출신 시녀에게 목줄을 잡혀 살다니.
살다 보니 이런 걸 구경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프랑크 후작이 몰래 웃음 지었다.
* * *
“폐하, 인근의 배신자들을 먼저 죽여야 합니다.”
두 명의 영주가 크세노를 찾았다. 그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 데네브라의 간계에 흔들리지 않은 자들이었다.
“르세라는 어차피 내륙 쪽 방비가 허술해 언제 어느 때고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저희가 폐하의 뜻에 따라 르세라를 치는 사이 배신자들이 저희 영지를 탐내지 않도록 척결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두 영주가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이웃 영지를 먼저 치겠다는 건 그들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황제의 명령이라면 어디든 무소처럼 달려들 수 있지만, 영지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영지가 없으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세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폐하…….”
황제의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해진 영주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
크세노가 입꼬리를 길게 늘여 웃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소년처럼 반짝거렸다.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잔혹한 놀잇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심술궂게 웃었다.
“사생아라고?”
“예? 예, 그렇습니다.”
“사생아를 찾았다고? 데네브라가 황위 후계자를 데리고 있어?”
미친 데네브라, 미친 율리아, 미친!
“하하하하하!”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된 계획인가.
공수가 뒤바뀌었다. 자신이 공격하면 율리아가 수비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눈을 뜨고 보니 먼저 무기를 휘두른 건 저쪽이었다.
크세노는 팔뚝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견딜 수가 없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그가 손바닥으로 팔뚝을 세게 문질렀다. 그러곤 두 명의 영주에게 말했다.
“척결 명령을 내리겠다.”
“듣고 있사옵니다!”
“너희 영지의 모든 병력을 소집해, 최대한 빨리 르세라를 쳐라.”
“예…… 예? 폐하! 하지만……!”
“너희 그 손바닥만 한 영지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이래? 르세라는 서남부에서 가장 큰 항구다. 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그 항구가 얼마나 발전할지, 얼마나 부유한 도시가 될지 생각해 봤느냐?”
“폐하, 하오나 저희 영지엔 가족들이 있사옵니다!”
“피신시켜.”
크세노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드물게 맑은 겨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잔잔한 파도 위에 햇빛이 알알이 부서져 눈이 부셨다.
“이건 시간 싸움이야. 등 뒤에 미련을 남기고 돌격하는 장수에겐 거대한 승리가 뒤따르지 않는 법이지.”
“폐하!”
“명령이다! 여기서 어물쩍거리지 말고, 당장 르세라를 쳐라!”
“……알겠습니다.”
두 명의 영주가 천천히 무릎을 세웠다. 그들도 이제는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
크세노를 정복자로 만들어 준 황제군이 언제 도착하는지 묻고 싶었으나, 그의 눈초리가 무시무시해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르세라 북쪽에서 두 명의 영주가 선전포고해 왔다.
황제의 깃발 아래 가문의 깃발을 매단 그들은 르세라의 영주와 데네브라 황비, 그리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자들을 역당이라 지칭하며 항복하지 않는 자는 죽음으로 다스리겠다 경고했다.
사생아의 존재를 공표한 이후 인근 영주들이 칩거하면서 마음을 놓았던 프랑크 후작이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달려 나왔다.
“병력을 소집하라! 비상 나팔을 불어!”
“예, 후작님!”
“해군은 배를 버리고 모두 내륙 쪽 경계로 나가라! 무기를 들 수 있는 자는 모두 무기를 들어야 한다! 너희는 항구로 내려가 상비군을 모아라!”
“알겠습니다!”
“황비께 전해! 지원군을 요청해야 한다고! 한시가 급하다!”
병사들이 동서남북으로 달려 나갔다. 프랑크 후작은 떨리는 가슴에 흉갑을 고정하며 크고 길게 심호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