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1화 (276/319)

241화

50. 공적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저의 탓입니다.”

호르헤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크세노의 암행을 위해 그가 마련한 밀수선이 반파된 채 부두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차피 돈을 주고 산 배라 망가진들 아쉬울 건 없었으나, 해적들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다 선원을 다수 잃었다. 그중엔 호르헤의 충실한 부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게 왜 네 탓이야. 멋대로 움직인 내 탓이지.”

바다에서의 한 달여 간, 크세노는 많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어떻게 이 일을 헤쳐 나가야 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해적이 쫓아온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율리아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여자를 손에 넣고도 죽이지 않고 물러난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배 안에서 돌이켜 곱씹어 보니, 율리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호르헤가 말했다.

“새를 보냈으니 머지않아 폐하의 기사들이 달려올 것입니다. 고단한 몸을 편히 하시되, 빠르게 귀환하시길 간청드리옵니다.”

“귀환하라고?”

“예, 폐하.”

크세노가 물었다.

“어디로?”

호르헤는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는 황성으로 가야 한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황성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거기 가서 뭘 해야 하는데?”

할 일이야 많았다. 지원군을 조직해 북부 전선으로 보내고, 데네브라를 폐위시키기 위한 절차를 밟고, 남부 연합에 대비해야 한다.

그 밖에도 할 일은 산더미였다. 그는 황제였다. 그가 자리를 오래 비울수록 바이칸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호르헤.”

크세노가 망가진 배를 바라보았다.

“내가 최근에 가장 많이 떠올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야…… 그 여자가 아니겠습니까.”

“율리아 아르테.”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뜰 때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시달릴 때도, 깊은 밤 갑작스레 눈을 뜰 때도, 그는 율리아를 떠올렸다.

“내가 만약 율리아라면 지금쯤 어디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까.”

내가 그 여자라면.

내 적이 황제라면.

“폐하…….”

“율리아는 데네브라를 데리고 바이칸에 왔을 거야.”

반드시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부 연합은 레위시아 국왕이 있으니 율리아가 구심점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북부 전선은 북부 연합의 연이은 승리로 분위기가 반전된 상태였다.

“데네브라의 친정 가문과 손을 잡겠지. 어쩌면 서남부의 욕심쟁이들도 황비의 손을 잡았을 것이고, 또 어쩌면…….”

크세노는 이 모든 일이 놀이라도 되는 양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호르헤가 눈가 주름에 경련을 일으켰다.

“폐하, 당장 황비를 폐위시켜야 합니다.”

“반역을 일으킬 거다.”

나라면 그랬을 거라고, 크세노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율리아는 바이칸에 있어. 서남부. 르세라일 확률이 높지.”

사절로 보냈던 서남부의 귀족 중, 특별히 욕심이 많았던 자. 놈의 이름이 뭐더라. 크세노가 중얼거리자, 호르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프랑크 후작입니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그때 호르헤의 부하들이 알맞은 저택을 찾았다며 보고해 왔다. 기사단이 올 때까진 안전을 위해 황제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기에, 호르헤는 부하들을 보내 저택에 있는 자들을 내쫓고 반항하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곳은 바닷가 절벽 위에 지어진 어느 귀족의 별장이었다. 별장 관리인은 칼 든 자들이 쳐들어오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났다. 그러나 경비를 서는 병사들은 용감하게 맞서다 모두 죽임을 당했다.

크세노는 그곳을 차지한 뒤 이틀 동안 바다에서 쌓인 피로를 풀었다.

뜨거운 물과 독한 술, 기름진 음식과 푹신한 침대까지. 그는 그제야 자신의 두 발이 땅에 닿아 있음을 실감했다.

“황제는 왜 인간이어야 했을까.”

신이 정말 인간을 만들었다면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예 직접 내려와 다스려도 좋았을 텐데.

황제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한계가 있었다.

칼에 찔리면 죽고, 병에 걸려도 죽었다. 몸은 약하고 영혼은 불안정했다. 잘못된 판단에 치명적인 실수 한 번이면 국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신이 할 일을 내가 대신해 주고 있는데, 아무런 대가가 없어.”

적어도 평범하지는 않게 해 줘야지. 칼에 찔려도 살고, 병에 걸려도 살게 해 줘야지. 그래야 실수해도 한 번은 돌이킬 수 있을 텐데.

“호르헤, 그거 알아? 땅은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데…….”

바다는 그렇지 않았다.

술에 취한 채 저택을 빠져나온 크세노가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섰다. 바람이 거세 두툼한 가운이 펄럭이며 휘날렸다. 그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그래서 신이 되려는 거야.”

크세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죽음이란 너무나 변덕스럽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또, 패배란 다시는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처였다.

그는 그가 통제할 수 없었던 모든 과거를 혐오했다.

“호르헤.”

“예, 폐하.”

“아무도 데네브라와 카루스의 변절을 입에 담지 않게 해라. 데네브라는 여전히 내 하나뿐인 아내이고, 카루스는 여전히 바이칸의 충신이라고 믿게 해.”

“하오나 폐하!”

“데네브라 하나뿐이면 상관없지만 카루스까지 변절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귀족들이 흔들릴 것이다. 율리아가 원하는 건 반황제파의 결집이야.”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르세라의 영주가 남부 해적과 손을 잡고 밀수 사업을 하고 있었다고 발표해라. 저 배를 끌어다 르세라 인근에 버려 두고 증거로 내밀어. 해적들을 목격한 자가 있을 테니 증인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조치하겠습니다.”

“인근 귀족 중 병사들을 이끌고 가장 빨리 달려오는 자에게 르세라를 주겠다고 해. 우리는 반역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 밀수 사업을 벌인 부패한 귀족을 처단하는 것이다.”

새가 날았다.

쏴아아. 절벽을 할퀴며 오른 바람이 높은 하늘로 사라졌다.

* * *

인근 귀족들이 병사를 끌어모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프랑크 후작이 잔뜩 겁을 먹고 달려왔다.

“황비 전하,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그들은 모두 제 이웃입니다!”

“나한테 어쩌라는 거냐!”

“이러다 다 죽게 생겼습니다. 전하의 친정 가문에선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까?”

“보채지 좀 말아라!”

르세라엔 지상군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군에게 기마를 내주고 싸우라고 할 수도 없었다.

데네브라가 프랑크 후작을 상대하는 동안, 율리아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카루스에게 물었다.

“황제가 빠르게 움직였네요.”

그녀는 황제가 바다 위를 떠도는 동안에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도 자신의 행보를 추측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황제에게 그 특별한 새들이 있는 이상, 소식을 전하는 속도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

“르세라는 방어에 취약한가요?”

“방어랄 것도 없지. 여긴 바다로부터의 위협을 지키는 곳이지, 등 뒤 육지에서 적을 맞닥뜨린 경험은 없을 거야.”

“싸우면 지겠네요.”

“위레우스와 제이비온의 가문에서 손을 내밀어 준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카루스가 율리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입에서 놀라운 정보가 새어 나왔다.

“위레우스의 어미는 바이칸에서도 손꼽히는 상인 가문 출신이고, 북부 전선에 보급을 지원하고 있어. 전쟁 물자에 관해선 전문가나 다를 바 없지.”

“그래요?”

“제이비온의 어미는 황제의 사생아를 낳고도 여태 결혼하지 않았을 만큼 대단한 가문의 딸이야. 중앙보단 남부에 가까운 위치에 영지가 있지.”

그렇단 말이지.

율리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심장에 찬바람이 가득 차올랐다가 빠르게 빠져나갔다. 불안함 때문인가 싶었는데, 기대감 때문이었다.

“황제는 아직 몰라요.”

그녀는 자신했다.

“그를 대신할 후계자가 우리 손에 있다는 걸.”

생각보다 이른 감이 있지만, 충격은 빠를수록 좋았다. 선공은 언제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준다.

율리아는 저들이 르세라에 쳐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밀수업자가 아니오! 해적이랑 붙어먹지도 않았어!”

프랑크 후작이 자신은 억울하니 진실을 알려 주겠다며 초대장을 보냈다.

르세라의 인근 귀족들은 초대엔 응했으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잔재주 부리지 말라며 증거도 이미 확보했다고 그를 윽박질렀다.

한때 프랑크 후작에게 굽실거리던 자들이 이제 황제를 등에 업고 그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데네브라가 나서서 그를 변호했다.

“후작은 오르테가에 억류된 나를 구하러 온 충성스러운 귀족이며, 황제가 직접 임명한 사절이다. 네놈들이 뭔데 그에게 누명을 씌우느냐?”

“황비 전하! 하오나 폐하께서…….”

“닥쳐라! 여기 황제의 후계자가 있다!”

데네브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지금 황제의 후계자를 보호하고 있단 말이다! 그러니 르세라에 칼을 들고 다가오는 자는 모두 반역으로 다스릴 것이야!”

“예?”

“후계자라고…… 후계자라고요?”

“잘 들어라. 크세노는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어. 그는 너희를 전쟁터에 몰아넣고 영원히 싸우게 만들려 해. 통일 대륙을 만들겠다는 그가, 다 이겨 놓은 북부를 버리고 도망 다니는 이유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느냐?”

“그야…….”

“너희가 자랄 수 없도록 싹을 밟는 것이다!”

데네브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동안 프랑크 후작이 위레우스와 제이비온, 그리고 두 아이의 어미를 데려왔다.

황제를 꼭 빼닮은 두 아이의 모습을 보자 귀족들이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혈통에 가문까지 완벽했다. 황제에게 적통이 없는 만큼, 그들은 바이칸에 절실한 존재이기도 했다.

데네브라가 말했다.

“사생아는 많아.”

“전하!”

“누가 황제의 후계자가 될지는 너희 하기에 달렸지만.”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는 가문의 아이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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