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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화 (275/319)

240화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아이였다. 8살밖에 안 된 아이가 어른들 사이에서 기죽은 얼굴로 눈치를 보는데, 누구라도 마음이 쓰일 법했다.

“제이비온.”

“예, 황비 전하.”

머뭇거리면서도 또박또박 대답하는 아이를 보며 데네브라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황비가 제이비온의 무엇을 보고 감탄하는 줄은 몰랐으나 그게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이의 어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기분 상하게 해 드렸다면 정말 죄송해요. 황비 전하, 저는 황족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뵌 적이 없어서…….”

“중앙이나 황성에 온 적이 없다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바빴거든요.”

데네브라는 여전히 제이비온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유령이라도 만난 양 잔뜩 움츠린 상태였다.

큰 키에 긴 팔다리, 진하게 화장한 데네브라는 아이에게 이야기책에 나오는 마녀와도 같아 보였을 것이다.

보다 못한 여자가 손을 내밀자 아이는 울 것처럼 잔뜩 달아오른 눈으로 어미의 품에 안겼다.

“제이비온, 졸려서 그래? 괜찮아.”

여자는 능숙하게 아이를 안고 달래었다. 허리를 숙여 아이의 정수리에 입 맞추고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녀가 작은 힘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자, 아이가 금세 긴장을 풀었다.

“됐다.”

데네브라가 몸을 돌렸다. 그러곤 더는 볼 필요도 없겠다며 직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황비 전하, 잠깐만요!”

“따라오지 마라! 율리아, 가자.”

율리아가 데네브라를 대신해 여자와 아이에게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는 누가 들을세라 문을 꽉 닫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르테가에서 조심성만 늘었는지, 데네브라는 방문에 이어 창문까지 다 꽉 닫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여자아이 같은데.”

“여자아이 같아요.”

데네브라와 율리아가 동시에 말을 꺼냈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다. 크세노 황제처럼 머리카락을 자르고 염색했다는 것만 알아챘을 뿐,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리아가 의외라며 물었다.

“전하는 어떻게 알아채셨어요?”

“바이칸 황성에는 말이야. 크세노와 나 사이에 아이가 없으니까, 혹시 제 아이가 우리 눈에 뜨일까 헛된 꿈을 꾸는 부모들이 몰려와 산단다.”

데네브라는 아이에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크세노의 친인척이거나 내 친정 가문에 속한 자들은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면 전부 황성으로 와. 어떻게든 내게 들이밀려 애쓰지. 황비궁엔 그런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야.”

그래서 그 아이들을 피해 매일 밤 술과 무희로 가득한 연회를 열었노라고, 데네브라가 비웃으며 말했다.

“여자아이를 데려다 놓고 사내라 속이다니. 어미의 욕심이 도가 지나치구나. 저 알량한 거짓말을 들키는 날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전쟁 중인 국가의 백성들은 무력적으로 강한 후계자를 원하기 마련이고, 때문에 제이비온의 어미는 아이의 성별을 바꾸었다.

“카루스 님은 눈치채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 자식은 눈이 뒤통수에 달렸다더냐?”

“가까운 사람은 매수하고, 아이를 내보여야 할 때는 어미가 나서서 시선을 끌었겠죠.”

그래서 그렇게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율리아가 웃으며 중얼거리자, 데네브라가 머리 장식을 뜯어 던지듯 내려놓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누구를 선택하는 게 좋겠어?”

“제이비온이죠.”

데네브라가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네 말대로 아무 아이나 데려다 친자인 양 속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여자아이를 남장시켜서 데려올 줄 누가 알았나.”

“약점으로 잡고 이용하세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데네브라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드레스 때문에 누워도 몸이 편하질 않아서였다.

율리아가 다가와 드레스 매듭을 풀어 주자 데네브라는 어색해하면서도 그녀의 시중을 받았다.

“제이비온이 크세노의 친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너무 섣부른 짐작일까?”

“글쎄요.”

“이왕 할 거짓말이라면 사내아이를 데려왔겠지.”

제이비온은 크세노의 친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 나타날 사생아 중에서 유일한 친자일 수도 있다.

그때 율리아가 데네브라에게 바짝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뭐?”

“어차피 선택은 전하의 몫이에요. 황제의 친자이건 아니건 아이를 데려다 황제로 키우는 것도 전하의 몫이죠. 언젠가 그 아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사람들은 그를 누구의 아이라고 기억할까요?”

“너…….”

데네브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고 하는 거냐? 내가 적국의 아이를 선택해도, 반역자의 아이를 선택해도, 노예의 아이를 선택해도…… 그 아이가 황제가 된다는 말이잖아.”

“네.”

“너 진짜 미쳤구나.”

데네브라가 한탄하며 말했다.

깊은 밤이었다.

르세라 앞바다에 나타난 해적선을 위장한 밀수선이라고 결론 내린 프랑크 후작이 겁먹은 해군을 달래고 돌아왔다. 그가 무슨 말로 어떻게 르세라의 해군을 달래었는지는 모르나, 그들은 해적선을 발견하고도 출정하지 않았다.

덕분에 황제를 쫓아 바이칸으로 넘어왔던 해적들도 오르테가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데네브라는 제이비온을 선택했다.

그녀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제이비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나와 함께 황성으로 가자고 말했다.

제이비온의 어미는 뛸 듯이 기뻐했으나, 위레우스의 어미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위레우스가 나이로 보나 배움으로 보나 제이비온보다 뛰어난 황자라며, 다시 생각해 달라고 몇 번이고 항의했다.

게다가 크세노의 사생아를 낳았다는 여자는 그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거리가 멀어 당장 선보일 수는 없으나, 자신의 가문에서 황제의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편지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전령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몇 겹으로 봉한 편지를 내밀었다.

율리아는 데네브라의 곁에서 그 모든 걸 지켜보았다.

“나이가 같은 아이가 셋이에요. 크세노 황제가 타고난 정력가라고 해도, 그 먼 거리의 여자들을 동시에 세 명이나 만났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심지어 벌써 성인이 다 된 아이도 있어요. 다들 뭘 노리는 건지.”

프랑크 후작의 저택은 전쟁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편지를 가져온 전령들이 답변을 받아 가야 한다며 데네브라에게 매달리고, 위레우스와 그의 어미는 온종일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데네브라가 제멋대로에 난폭한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귀찮다고 짜증을 내더니, 결국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어요. 애어른 같은 위레우스가 울음을 터뜨렸을 정도니까요. 제이비온이 그걸 못 봐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율리아는 저택 정원에 나와 있었다. 호위 기사로 변장한 카루스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와 함께 걸었다.

“제이비온이라. 조금만 더 자라면 여자아이란 게 티가 날 텐데, 그때는 어떡하려고 그러는 거지?”

“전쟁이 끝날 걸 아는 거죠.”

“데네브라가 후계자를 잘 키울 것 같진 않은데.”

카루스가 두어 번 혀를 찼다.

그는 제이비온을 가엾어했다. 욕심 많은 어미만으로도 충분히 고달플 텐데, 데네브라의 손에 길러진다면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하다고 했다.

율리아는 어차피 아이는 엄선된 전문가의 손에 길러질 거라며, 데네브라의 영향보다는 아이의 타고난 기질이 더 중요하리라고 봤다.

“크세노 황제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요.”

“르세라에 배를 대지 못했으니 그보다 북쪽으로 갔겠지. 부두도 없는 작은 마을에 내리지는 못했을 거야. 적어도 그의 비밀 기사단이 마중 나올 수 있는 작은 도시.”

“여기서 하루 거리 정도 되겠네요.”

르세라 인근 해역 지도를 떠올린 율리아가 말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기서 하루 거리에 작은 항구 도시가 있었다.

“거기서 황성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려요?”

“이십여 일.”

“북부 전선까지는요?”

“그보다 조금 더 걸리지.”

황제는 북부 전선으로 가려고 할까. 아니면 곧장 황성으로 돌아가려고 할까.

정복 전쟁을 이어 가려면 북부 전선으로 가는 편이 좋으리라. 남부 연합이 탄생한 이상, 바이칸은 반드시 북부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카루스에 이어 데네브라까지 변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황성으로 돌아가 반역에 대비할 수도 있다. 대륙 통일보다는 황제의 자리가 더 중요하니까.

걸음을 멈춘 율리아가 오르테가에서 만났던 크세노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륙 통일을 눈앞에 둔 정복자.

저주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신이 되겠다고 선택한 남자.

그러나 그는 불안정해 보였다. 율리아를 죽이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그럴 수가 없어서 화가 나 있었다.

또한, 그녀의 존재가 너무 간절했던 나머지 그게 증오인지 그리움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율리아가 속삭였다.

“저도 한때는 그가 간절했어요.”

이번 삶의 내가 당신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의 그 말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율리아의 한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라 걷던 카루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어느새 그녀의 한 걸음 앞에 서 있었다.

“당신한테 처음부터 다 털어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어떤 거짓말로 설득해야 내 편이 되어 줄까. 정말 수십 번 고민하고 연습했거든요. 그런데 어떤 거짓말을 해도 당신은 쉽게 속아 줄 것 같지 않았어요.”

“너라면 속았을 거야.”

“카루스 님.”

율리아가 말했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이제는 당신이 너무 소중해서 죽을 수가 없다. 코코와 레위시아, 알렉사가 소중해서 죽을 수가 없다. 이 마음은 나에게 커다란 약점이 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홉 번째가 되어서야 진짜 삶을 사는 것 같아서.

르세라의 겨울은 오르테가보다 춥고, 티타니아보다는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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