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9화 (274/319)

239화

* * *

첫 번째 아이는 제 어미와 함께 있었다.

올해 12살이라는 소년의 이름은 위레우스였다.

어미는 바이칸에서 제법 유명한 상인 가문의 딸로, 황제의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상단 후계자에서 밀려나 저보다 더 높은 귀족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했다.

귀족들의 결혼 시장에서 황제의 아이를 낳았다는 건 결점이되 결점이 아니었다. 욕심 많은 일부 귀족들은 황제의 아이를 지참금이라 부르며 가문에 입적시키기도 했다.

위레우스는 그런 아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한 바이칸의 하나뿐인 황비 전하, 위레우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어디서부터 잘못을 지적해야 하나.

이제 고작 12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기계처럼 딱딱한 자세로 인사를 건네고, 완벽한 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 한순간을 위해 저 아이가 얼마나 혹독한 가르침을 받아야 했을지 떠올리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너는 나가도 좋다.”

다행히 데네브라는 황비답게 행동해 주고 있었다. 아이를 칭찬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어미와 눈을 맞추었다.

위레우스가 데네브라에게 깊이 절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오르테가에서 율리아에게 한동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긴 했어도, 데네브라는 바이칸의 황비였다.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게 된 아이의 어미가 두려움을 감추려 두 눈을 내리깔았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데네브라가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긴 팔다리와 긴 머리카락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나는 한 명의 후계자가 필요할 뿐이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 아이가 크세노의 친자라는 걸 어떻게 믿지?”

데네브라는 에둘러 묻지 않았다. 그녀는 황비였다. 예법 위의 존재. 그녀에게 복잡한 귀족식 예법을 기대하는 자는 없었다.

위레우스의 어미도 그 정도는 예상했는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당시 폐하의 연인이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주신 편지와 선물, 그분께 갈 때마다 동행했던 기사와 황성의 시종, 제가 아이를 가졌을 당시에도 그분은 걱정하지 말라며 집을 한 채 하사하셨고…….”

“그때 네가 크세노 한 사람만 만났다는 건 어찌 증명하려고?”

데네브라가 다시 물었다.

그것까지 캐물을 줄은 몰랐는지, 여자가 잠시 말을 잃고 침을 삼켰다. 그러더니 숙였던 고개를 들어 데네브라를 바라보았다.

“황비 전하.”

“말하렴.”

“저 아이는 황제 폐하의 어린 시절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폐하께서 익히셨던 검술, 폐하께서 흥미를 보였던 학문, 그분이 즐기던 취미와 그분이 좋아했던 책.”

“그런 걸 가르치고 있다고?”

“저는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폐하의 사생아 중에서 위레우스만큼 완벽한 황자는 없을 것이라고요.”

위레우스가 크세노의 친자라는 걸 밝힐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다. 그러니까 증거와 증인, 정황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여자는 그 사실을 알기에 데네브라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썼다.

“저희 친정 가문과 제 남편의 가문, 그리고 위레우스의 후견인들. 모두가 전하를 지지할 것입니다.”

“왜?”

“그야…….”

“크세노보다는 위레우스가 너희에게 이롭기 때문이겠지.”

데네브라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너희도 나와 똑같잖아. 황제의 힘이 너무 강해 파고들 틈이 없으니 새 황제를 내세우려는 것 아니냐. 그러면 나는 네 아이를 선택할 이유가 없어. 일이 끝난 뒤에도 권력을 놓고 너희와 싸워야 하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황비 전하와…….”

“황제와도 싸우려는 것들이 나랑은 안 싸우겠다고? 거짓말을 하려거든 미리 연습 좀 하지 그랬어. 열두 살 위레우스도 너보다는 잘하던데.”

당황한 여자의 시선이 흐트러졌다. 그녀는 데네브라가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리 성격 나쁜 황비라도 폐위당할 위기에서 아군이 될 자의 손을 내치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게 믿은 것이다.

예전의 데네브라라면 모를까, 지금 그녀에게는 율리아가 있었다.

“황비 전하.”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손을 끌어다 부드럽게 잡았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차분하면서 다정하고, 은근한 힘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데네브라의 성급한 기운이 그녀를 따라 느슨하게 가라앉았다.

위레우스의 어미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오르테가 출신의 새 시녀장이라고 소개받았는데, 그런 자리에 오르기엔 너무 젊은 여자였다. 이제 고작 20대 초반. 앳된 얼굴에 고운 목소리는 여느 아가씨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의 말 한마디에 데네브라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그녀를 보게 되었다.

데네브라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한동안 르세라에 머무를 것이다.”

“예, 전하.”

“너 말고도 많은 이들이 황제의 사생아를 찾고 있고, 또 찾았다고 들었다.”

“알고 있사옵니다.”

“너는 네가 한 말을 증명해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여자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데네브라는 그녀의 정수리를 거만하게 내려다보곤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며 문밖으로 나섰다.

두 번째 아이의 이름은 제이비온이었다.

“재밌구나. 이름을 지을 때부터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던 게 분명해. 위레우스는 황족 출신으로 성자의 자리에 올랐던 이의 이름이고, 제이비온은 크세노의 조부가 어릴 때 사용했던 이름이지.”

“그래요?”

“너는 뭐든 다 아는 것처럼 굴더니, 바이칸의 역사는 꼼꼼히 살피지 못했느냐?”

“바이칸 황족의 조상들까지 어떻게 다 외워요. 그걸 아는 전하가 더 대단한데요?”

“내 가문의 어른들이 크세노의 아내가 되려면 알아야 한다며 강요한 공부였다.”

그러니 위레우스와 제이비온이라는 이름은 황제의 자리를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 분명하다고, 데네브라가 비웃었다.

“우습지 않으냐. 저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크세노에 대한 공포가 대륙을 지배하다시피 하던 때인데. 그때도 저놈들은 다음을 노리고 있었던 거야.”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너는 이게 다 놀랍지 않으냐?”

“저 아이들의 이름이 태어났을 때 지어졌다는 보장도 없고요.”

“뭐라고?”

데네브라가 놀라 되물었다. 그녀의 곁에서 나란히 걷던 율리아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황자로 만들려고 최근에 바꾼 이름일 수도 있잖아요.”

가능성 있었다. 데네브라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이 상황에 어울리는 욕설을 찾는 동안, 율리아가 문을 열며 생긋 웃었다.

“황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일어나 예를 갖추세요.”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제이비온의 어미는 젊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여자였다.

위레우스의 어미는 상인 가문의 여자라기엔 무척 귀족적이면서 정치적이었는데, 이 여자는 고명한 가문의 외동딸치곤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붉은 드레스로 몸을 한껏 치장하고 긴 금발을 구불구불하게 말아 늘어뜨렸다. 머리카락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화려한 차림새였다.

데네브라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이비온의 어미가 너냐?”

“네! 전하, 저와 제 가문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지금 뭐 하자는 거냐. 너 말고 아이를 소개해야지.”

그녀는 한마디로 데네브라에 대해 잘 모르는 여자였다.

데네브라가 앉지도 않은 채 서서 화를 내자, 당황한 여자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눈짓으로 황비를 가리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시녀니까 네가 알아서 해결해 보라는 뜻이었다.

율리아가 다시 생긋 웃었다.

“제이비온 황자는 어디 가고 혼자 계십니까? 황비 전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황제 폐하의 친자인지 확인하고, 아이의 기질을 살피러 오셨습니다. 그러니 어서 아이를 데려오세요.”

“건방지게…… 당신 누구야?”

“부족하오나 황비 전하를 모시고 있는 시녀장 율리아 아르테입니다.”

“시녀장이라고?”

여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데네브라는 이쯤에서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가만히 놔둬도 율리아는 알아서 뭐든 잘 해결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너야말로 건방지구나. 황비의 시녀장을 앞에 두고 태도가 그게 무엇이냐? 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제이비온은 만나 보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난 이만 물러가겠다. 너는 네 집으로 돌아가 그 빨간 드레스와 치렁치렁한 금발이나 자랑하면서 살아라!”

“전하! 무슨 말씀이셔요. 제이비온은 황제 폐하의 아들인데, 만나 보지도 않으시겠다고요?”

“닥쳐라!”

“제 아들은 전하에게 기회입니다!”

여자가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폐하의 친자예요. 폐하의 아들이라고요! 저는 다른 사기꾼들과는 달라요!”

그 순간 율리아는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철없는 귀족인 줄만 알았더니, 무모할 정도로 담대한 것이었다.

“제이비온은 아직 어립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아요. 전하께 양해를 구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옆방에서 유모와 함께 기다리라고 했어요.”

“닥치라고 하였다!”

데네브라는 여자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기선제압을 했으니 무시하고 나갈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율리아의 손을 홱 잡아채고 몸을 돌렸는데, 이번에도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황비 전하.”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이비온 황자를 만나 보고 가세요. 저이의 말대로 여덟 살은 아직 어려요. 황제 폐하를 빼닮았다는 얼굴만 확인하고 돌아가면 되는 일이에요.”

“내가 정말……!”

데네브라는 뭐라 화를 내려 했지만, 제이비온의 어미가 기회를 틈타 옆방으로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황비 전하. 제이비온입니다.”

곱디고운 사내아이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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