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크세노 황제는 갈색 계열의 머리카락이 어두운색부터 밝은색까지 어지럽게 뒤섞여, 마치 사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프랑크 후작이 발견했다는 두 명의 아이도 꼭 그와 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눈썹 모양까지 완벽하게 크세노와 같아서, 관찰력이 어지간히 뛰어나지 않은 이상 대부분은 두 아이가 황제와 판박이라는 후작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율리아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지나치게 똑같게 만들었다는 느낌이었죠.”
“화장까지 시켜 놓았으면 재밌었을 텐데.”
호위 기사가 비아냥거렸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율리아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웃음이 났다.
새카맣던 머리카락이 빛바랜 회색이 되어 흘러내렸다. 별다른 꾸밈 없이 정직하던 그의 머리카락이 한쪽은 길게 흘러내려 뺨을 덮고, 한쪽은 귀를 다 드러낼 만큼 짧게 잘려 있었다.
구름처럼 붕 떠 보이는 회색 앞머리가 이마를 대부분 덮고, 드러난 귀에는 붉은 귀걸이를 달았다.
망토 없이 몸에 꼭 달라붙는 셔츠와 바지, 늑대 가죽으로 만든 조끼 위엔 최소한의 갑옷만 걸친 채였다.
“카루스 님.”
율리아가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호위 기사는 카루스였다.
바바슬로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율리아를 지키겠다며 떼를 썼지만, 부상을 치료 중인 그를 데려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보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자를 보낼 수도 없었다. 율리아에겐 바이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카루스는 직접 그녀를 호위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 같아요.”
율리아가 속삭였다. 카루스는 그녀가 내민 손을 감싸듯 느리게 쥐었다.
“코델리아 시녀장이라면 이 정도 변장쯤은 손쉽게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거든.”
“코코는 최고죠.”
“레위시아를 티타니아로 만들었을 정도인데, 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겠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카루스는 그때도 내심 놀랐다. 적당히 눈속임하는 정도면 될 거라고 제안했는데, 코코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카루스의 눈썹을 다듬어 인상을 바꾸고, 머리카락 모양을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만들어 버렸다.
빛바랜 회색 머리카락은 남부 토박이들에게만 있는 색이라서, 누구라도 그를 남부인으로 착각하게끔 했다. 2년 동안 남부의 태양 빛에 적당히 그을린 그의 피부색이 결정적이었다.
귀에는 귓바퀴를 감싸는 화려한 모양의 귀걸이를 매달아 시선을 분산시키고, 갑옷을 최소화하되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코코가 마지막으로 카루스에게 요구한 것은 자세를 구부정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너무 꼿꼿하고 반듯하다며, 구부정하고 껄렁껄렁해지라고 충고했다.
카루스는 코코의 말에 충실하게 따랐다.
짧게나마 남부 사투리를 배우고, 말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구부정하고 삐딱한 자세로 서 있다가 느릿느릿하면서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때로는 블라이스처럼, 때로는 해적처럼 굴었다.
율리아가 그의 손에 뺨을 기대고 말했다.
“정말 다른 사람 같아요.”
“낯설어?”
“낯설어서 좋아요.”
카루스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끌어올렸다. 낯설어서 좋다니. 율리아가 흘린 도발적인 말에 그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자라났다.
“그렇게 좋으면 가짜 이름으로 불러.”
율리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카루스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도발적인 목소리로 코코가 지어 준 가짜 이름을 말했다.
“루이스.”
“이상하지.”
카루스가 한 손으로 소파를 짚고 몸을 숙였다. 율리아의 뺨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네가 그러니까 그게 진짜 내 이름인 것 같아.”
남부에선 무척 흔해 특별할 것 없는 이름인데, 율리아가 부르자 그 이름이 세상에 하나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루이스, 호위 임무에 충실해야죠.”
“아무도 네게 손가락 하나 닿지 않게 할게.”
“거기 당신은 포함되지 않나 봐요?”
카루스가 소파를 짚지 않은 손으로 율리아의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짜릿했다. 율리아는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지만, 카루스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매일 이런 장난을 치고 살자.”
“매일?”
“난 루이스가 되고, 이안이 되고, 크리스토퍼가 되고.”
“전 뭐가 될까요.”
머릿속에 많은 이름이 떠올랐다. 율리아가 재밌다는 듯 그 이름들을 고르자, 카루스가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넌 아무것도 하지 마.”
다음 날 율리아는 르세라 앞바다에 여러 척의 해적선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혼비백산한 르세라의 해군이 프랑크 후작을 다급하게 찾았지만, 그는 온종일 데네브라에게 붙들려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말해봐라. 내가 왜 그 사생아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느냐? 둘이나 데려온 이유는 무엇이고? 분명히 말했잖으냐. 적당한 아이를 하나 골라 놓으면 그 녀석을 황제로 만들겠다고!”
“하오나 황비 전하.”
“고르는 것까지 내가 해야 해? 너희는 도대체 사람 볼 줄을 모르느냐? 둘 중에 더 영특하고 고분고분한 아이를 고르면 되잖아!”
“전하께서 아들처럼 여기며 사셔야 하는데, 어찌 그 귀한 분을 저희가 멋대로 선택할 수가 있습니까.”
“아들처럼이라니,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평소처럼 버럭 화를 내려던 데네브라가 움찔하더니 율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너는 만나 보았느냐?”
“네, 전하. 두 분 다 만나 뵈었습니다.”
“어떻더냐?”
“프랑크 후작께서 말씀하신 대로 황제 폐하를 꼭 빼닮은 황자 전하들이셨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풍채가 헌앙하고 의기 당당하셨어요.”
“그래?”
데네브라가 율리아에게 뭔가를 더 물으려던 때였다. 바깥에서 세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르세라의 해군 장교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다.
“후작님! 큰일입니다. 빨리 나오셔야 합니다.”
“아니……. 전하, 죄송합니다.”
프랑크 후작이 데네브라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녀는 발끈하여 그를 노려보았으나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해적선이 나타났습니다. 출정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해적선이라니? 데네브라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대화에도 흔들림 없이 앉아 차를 마시던 율리아가 생긋 웃으며 프랑크 후작을 바라보았다.
“말씀드린 거 잊지 마세요, 후작님.”
프랑크 후작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는 눈짓으로 데네브라를 가리키며 율리아에게 잘 부탁한다는 뜻을 전했다.
“해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후작이 밖으로 나가 소리쳤다. 그에게 급보를 전하러 온 해군 장교는 다급한 목소리로 르세라 해군 전체에 출정 명령을 내리고 속히 발포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고 있었다.
“르세라 앞바다에 해적이 사라진 게 언제 적 일인데 이러느냐. 너희가 뭔가 잘못 본 건 아니고?”
“후작님!”
“최근에 해적선인 척 연기하는 밀수선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아느냐? 확인도 안 하고 출정 명령 내렸다가 백성들이 생업도 못 하고 겁에 질리면 누가 그 손해를 보상해?”
백성들의 생업까지 염려하는 귀족이라니. 누가 보면 대단히 인자한 영주인 줄 알겠네. 율리아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직접 확인할 것이다. 가자!”
프랑크 후작은 율리아의 부탁을 충실하게 들어주었다.
그가 직접 확인하겠다며 바다까지 나가는 시간에, 저건 해적선이 아니라 밀수선이라며 우기는 시간까지 더하면, 크세노 황제를 쫓았던 해적선들은 르세라에서 무사히 휴식을 취한 뒤 오르테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보급이냐?”
데네브라가 물었다.
“해적들이 르세라에서 보급하게 하려고 이러는 거야?”
“아니에요.”
율리아는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배가 보급을 못 하게 하려는 의도가 더 크죠.”
“크세노가 여기 왔어?”
“근처까지 왔다가 해적선에 쫓겨 물러났을 거예요.”
크세노 황제는 물을 무서워한다. 그런 그가 바다에 갇힌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비밀리에 떠난 길이었기에 그를 수행하는 인원도 많지 않을 것이다. 새를 부르기에도 마땅찮았다. 배는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해적들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떠나 보급이 굳이 필요치 않았으나, 황제는 다를 것이다.
르세라에서 식량과 물을 보급하지 못하면 그는 부득이하게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작은 항구에 배를 대야 하리라.
그러면 그가 황성으로 복귀하는 시간도 늦어지고, 르세라에 귀족들이 모여 반황제파를 만들고 있다는 것도 들키지 않게 된다.
데네브라의 입에서 낮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넌 정말 무서운 인간이야.”
“황비 전하.”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프랑크 후작이 찾았다는 아이들은 황제의 친자가 아니에요.”
차를 마시려던 데네브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내 저것들을 당장……!”
“그러니 제가 고른 아이를 후계자로 내세우는 척하면서 다른 귀족들에게도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걸 흘리세요.”
“난 그런 간계엔 소질이 없어.”
“그래서 제가 왔잖아요.”
그런 간계라면 자신 있다. 율리아 아르테는 여러 번의 삶을 거치며 단련되었고, 코델리아 힌치로부터 나쁜 시녀가 되는 법을 배웠다.
“율리아.”
데네브라가 율리아의 손을 잡았다.
“바이칸의 귀족들은 오르테가를 우습게 봐. 그뿐 아니야. 너를 내 하녀라 여기면서 희롱하고 무시할 것이다.”
“각오했어요.”
“그러니까 내 시녀장이 되어라.”
“네?”
“너를 내 새 시녀장이라고 소개할 거야. 황비궁엔 시녀장이 없거든. 하도 심하게 감시를 하길래 내가 죽여 버렸어.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여자도 크세노의 첩자였겠구나.”
“타국의 귀족도 시녀장이 될 수 있어요?”
“알 게 뭐냐.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오르테가와 바이칸의 동맹 관계는 아직 유효해.”
그러니까 네가 나와 함께 가서 그 두 명의 아이 중에서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해야 할지 알려 달라고, 데네브라가 율리아의 손을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