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7-2화 (272/319)

49. 사생아들

바이칸 서남부엔 ‘르세라’라고 불리는 항구가 있었다. 대륙을 통틀어 가장 크고 부유한 항구는 오르테가였으나, 두 번째로 꼽히는 게 바로 서북부의 무스빌리와 서남부의 르세라였다.

르세라는 바이칸 서부 해상에 해적들의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발달한 도시였다. 그렇다 보니 카루스 란케아의 리바이어던 함대가 바이칸 서부 해상에서 해적들의 씨를 말려 버린 뒤에는 조금씩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오르테가 왕국과 혈맹을 맺고 남부 연합을 등에 업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상인들이 몰려와 이 넓은 부두에 배 댈 자리가 없다며 서로 다투게 될걸요. 비싼 자릿세는 영주를 배부르게 하고, 선원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부두로 몰려들 거예요.”

율리아의 말에는 중독성이 있었다.

“배가 모이는 곳엔 돈이 쌓이고, 문화가 발달해요. 르세라는 바이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될 수 있어요.”

르세라의 영주이자 바이칸 서남부를 대표하는 귀족인 프랑크 후작은, 시간이 갈수록 데네브라보다 율리아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황제가 르세라에 배를 댈 거라는 게 사실이오?”

“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황제에게 배를 빌려준 밀수 상인은 르세라에서 활동하는 자예요.”

“해적에게 쫓겨 먼바다까지 나갔다고 했잖소. 그럼 다른 항구로 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지치고 겁에 질린 선원들은 가장 가까운 항구에 닻을 내리고 싶지 않을까요?”

“벌써 다른 곳으로 달아났을 수도 있잖소.”

“의심이 많으시네요.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후작께서 손해 볼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냥 하나만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율리아가 한 손으로 르세라 앞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적선이 나타나도 못 본 척해 주세요.”

“그거면 된다고?”

프랑크 후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황제가 배에서 내리길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거나, 도시에 숨어 있을 그의 수족을 찾아내 전부 죽이자고 할 줄 알았는데.

율리아는 그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냥 모른 척해 주시면 됩니다.”

“흠.”

“저는 황제 폐하를 공격할 생각이 없어요. 지금은 폐하께서 살아 계셔야 우리에게 유리하거든요. 후작께서도 비슷한 생각이시죠?”

“그렇소.”

“너무 이른 시기에 적의 경계심을 높일 필요는 없잖아요.”

“백작이 왜 레위시아 국왕의 최측근인지 잘 알겠군.”

프랑크 후작이 율리아에게 호감 가득한 미소를 내보였다. 그게 귀족들 특유의 거짓 미소라는 걸 잘 아는 율리아는 그와 똑같은 접대용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그럼 이제 후작께서 확보하셨다는 사생아를 만나 보러 갈까요?”

“황비 전하는 어쩌고?”

“전하께서는 뱃멀미가 너무 심하셔서, 오늘은 아무런 일정도 소화하실 수 없어요. 찾아뵙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괜찮소. 전하의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지.”

멀미에 시달린 데네브라를 찾아갔다가 뺨이라도 맞을까 걱정되었던 프랑크 후작이 구렁이처럼 화제를 돌렸다.

“내가 찾은 사생아는 둘이오. 하나는 열두 살, 다른 하나는 여덟 살이지. 둘 다 사내아이인데, 황제를 아주 쏙 빼닮았어.”

“친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나요?”

“내가 보기엔 확실하오.”

황제의 사생아를 후계자로 내밀려면 누구도 감히 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출신 정보가 있어야 한다.

율리아가 그 점을 지적하자, 프랑크 후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어미가 둘 다 살아 있어서 얼마든지 증언할 수 있소. 황제의 연인이었다는 증거도, 증인도 있지.”

“좋네요.”

“내 눈엔 큰 아이가 영특해 보이는데, 백작의 의견을 듣고 싶군.”

후작이 구렁이처럼 웃었다.

변방 귀족 주제에 다음 대의 황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니. 그는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일 것이다. 바닥이 없어 언제 추락할지 몰라 불안하고 긴장되지만, 하늘 위의 풍경에 취해 공포가 마비된 상태.

율리아가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리며 속삭였다.

“당연히 후작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겠어요? 저는 이리저리 머리 굴릴 줄만 알지, 사람 볼 줄은 모르거든요. 후작께서는 다복한 가정을 이루셨다 들었어요. 그럼 아이를 보는 눈도 남다르시겠죠.”

“하하! 백작이 아직 미혼이라는 걸 깜박했군.”

때로 칭찬은 협박보다 더 큰 힘으로 사람을 조종한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황제의 사생아를 찾아낼 줄은 몰랐다며, 율리아가 프랑크 후작의 정보력을 칭찬했다. 한 수 배워야겠다는 농담까지 곁들이자 짐짓 겸손한 척하던 후작도 끝까지 말을 거르지 못했다.

“하나는 내가 찾은 아이가 맞는데, 다른 하나는 내 이웃 영지의 주인이 찾았다오. 그 사람이 내가 찾은 아이마저 데려가려고 비겁한 수를 쓰기에 둘 다 데려와 보살피고 있지.”

“그러셨군요.”

“하하하! 이제 후계자로 떠받들어야 하니, 황자 전하라고 불러야겠군. 어디 가서 실수라도 하면 안 되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철두철미하시네요.”

후작이 앞장서서 걸었다. 율리아가 그녀의 뒤를 따르던 호위 기사에게 눈짓했다. 그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크 후작의 저택엔 창문 없는 귀빈실이 있었다. 주로 가주가 밀애나 밀담을 나누기 위해 쓰이는 공간이었다. 크세노 황제의 사생아는 그곳에 갇혀 있었다.

율리아는 프랑크 후작과 함께 두 아이를 모두 만나 보았다. 황제와 꼭 빼닮았다는 후작의 말은 반만 사실이었다.

“어때요?”

늦은 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율리아가 물었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호위 기사는 창문과 욕실, 천장과 바닥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둘 다 친자가 아니야.”

“어떻게 알아요?”

“염색했더군.”

어쩐지. 율리아가 피식 웃으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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