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카루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응접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데네브라는 화를 내고 싶었다. 바이칸 황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물건을 집어 던지고 사람을 죽여서 화풀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엔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리기는커녕, 한심하고 골치 아픈 여자라며 손가락질하기 바빴다.
아무도 없었다. 모두 다 적이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왜 이렇게 됐지? 언제…… 언제부터?’
카루스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처음 오르테가에 발을 내렸을 때, 데네브라의 곁에는 많은 사람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가 바이칸 황성에서부터 데려온 시녀와 시종, 호위 기사와 수행 귀족들이었다.
오르테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왕비궁을 차지하고도 모자라, 블라이스가 머무르던 귀빈궁까지 써야 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그녀의 곁에서 수발을 들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왜?’
데네브라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헤매었다. 넓은 응접실엔 율리아와 카루스가 앉아 식사를 함께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그녀의 벗이 아니었다.
바이칸의 시녀들은 모두 죽거나 쫓겨나고, 오르테가의 왕궁 시녀가 문밖에서 대기했다. 호위 기사도, 시종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오르테가인이었다.
블라이스가 죽은 뒤부터였나.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인가.
데네브라의 등 뒤엔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다. 식사를 시작할 때는 등이 따스해서 좋았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더니 그 열기마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누군가 그녀의 목덜미에 횃불을 가져다 대고 머리카락을 태우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불안했다. 사방이 적이었다.
데네브라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
“네, 황비 전하.”
“난 언제 바이칸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태연한 척 물었으나 말끝이 떨리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카루스가 뒤늦게 식사를 시작하고, 이번에는 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으세요?”
“그냥 물어보는 것이다.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지 너희 왕과 상의해야겠지.”
“전하의 친정 가문에서 마중을 보내거나, 서남부 귀족들이 사생아를 확보한 뒤에 전하의 거처를 마련하면…….”
“그때까지 나 혼자 여기 있으라고?”
데네브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는데 혼자 멋대로 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꼭 누가 가지 말라고 붙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조금 더 괴롭혀야 하나. 잠시 침묵하던 율리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국왕 전하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성격 급한 데네브라는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율리아를 불러들였다. 할 말이 있으니 빨리 만나러 오라는 전갈이었는데, 율리아는 일부러 느긋하게 걸어서 왕비궁으로 갔다.
“찾으셨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무슨 일 있으셨어요?”
율리아는 데네브라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으면서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스레 물었다.
화를 내려던 데네브라가 율리아의 손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네?”
“나랑 같이 바이칸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너, 분명히 내게 말했지? 크세노를 끌어내리고 날 섭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잖아. 그럼 내가 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인데, 너 하나 책임지지 못하겠느냐?”
누가 누굴 책임진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율리아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샤트린의 시녀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데네브라는 목소리까지 한껏 낮추었다.
“백작이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다. 네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아. 이 작은 나라에서, 그것도 고작 백작? 율리아, 나랑 같이 가자. 너는 바이칸의 공작이 되어야 해.”
데네브라의 속삭임이 율리아의 귓바퀴에 흘러들었다. 진득하고 달콤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율리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공작이요?”
“그래! 너는 할 수 있잖아. 평민에서 백작이 되기도 했는데, 공작이 대수더냐? 내가 섭정이 되면 너는 바이칸을 손에 넣을 수 있어.”
“진심이세요?”
“탐나지 않아? 자그마치 공작이다. 바이칸의 공작들은 어지간한 왕국의 왕보다 높은 자들이야. 돌아가면 크세노의 측근을 몰아내고 황성 인근 영지를 주마. 수도에서 가장 큰 저택도 주마. 영주성은 새로 지어도 된단다. 아르테 공작, 듣기 좋지 않아?”
듣기 좋았다.
“바이칸의 오만한 귀족들이 네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겠지.”
아르테 공작.
가슴에서부터 웃음이 솟았다. 아르테 공작이라니.
율리아가 눈을 깜박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녀가 흔들렸다고 생각한 데네브라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그날 밤 흰 눈이 쏟아졌다. 눈을 거의 볼 수 없다던 남부에 또 한 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캄캄한 왕궁 정원을 드문드문 밝히는 등불, 그 주위에 모여든 눈송이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일과를 끝낸 레위시아가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왕자궁으로 가자. 오늘 저녁은 거기서 먹기로 했어.”
“석찬 회의는 취소할까요?”
“힌치 백작이 알아서 진행할 거야. 이 나라 관리들은 왕이 없으면 회의도 못 한다더냐? 오늘은 좀 쉬자.”
“죄송합니다.”
“자네도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가. 올해 첫눈이잖아.”
레위시아의 투덜거림 속에 감춰진 따스한 마음씨를 알기에, 시종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언제나처럼 전하께서 침소에 드신 뒤에 물러갈 겁니다.”
“나 오늘 밤샐 건데.”
“쉬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밤새우면서 쉴 거야.”
“밤새우면서 뭐 하시려고요?”
“오랜만에 내 시녀들 치마폭에 좀 싸여 있고 싶어서. 요즘 외롭고 쓸쓸하거든.”
누가 들으면 그가 정말로 코코와 율리아의 치마에 매달린 어린 국왕인 줄 알 것이다. 시종이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모셔다 드리지요.”
“뭐?”
“누구나 때로는 그런 휴식이 필요한 법입니다.”
왕은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그 시녀들이 무슨 말로 꾀든 흔들리면 안 되는 거라고 충언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레위시아가 되레 시종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마차가 본궁을 떠나 왕자궁으로 가는 동안 레위시아는 끊임없이 시종을 괴롭혔다. 마음씨 넉넉한 시종은 허허 웃으며 그의 짓궂은 장난을 받아 주었다.
왕자궁에 도착할 때쯤엔 눈발이 굵어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레위시아의 긴 머리카락에 눈송이가 달라붙었다. 마차에서 내려 입구까지 걸어온 그가 축축해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어 털어냈다.
“어서 오세요, 전하!”
트루디가 문 앞에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트루디의 동그란 정수리를 발견한 레위시아가 웃으며 물었다.
“왜 미리 나와 있는 거야? 네 주인이 이제는 내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예언하던?”
“그게 아니라…….”
트루디가 머뭇거리며 말을 끌었다. 그러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어쩐지 수상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레위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방금 내가 먼저 도착했기 때문이…… 입니다.”
카루스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직전에 도착했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어깨에도 채 녹지 않은 눈송이가 쌓여 있었다.
레위시아가 괜한 서운함을 담아 트루디에게 말했다.
“카루스를 마중 나왔다가 나까지 얻어걸린 거야?”
“거기 서서 애처럼 굴지 말고 빨리 들어오…… 오십시오.”
카루스가 트루디를 대신해서 레위시아를 마중했다. 그는 아예 문밖으로 걸어 나와서 레위시아에게 먼저 안으로 들어가라며 눈짓했다.
“네가 그러니까 내가 열등감에 찌든 못된 왕같이 느껴지는데.”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재수 없는 놈. 전에도 말했지만 넌 이제 내 백성이야. 왕에게 갖춰야 할 모든 예의를 다해. 명령이다!”
“모시겠습니다, 전하.”
“더 재수 없어.”
레위시아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안으로 들어갔다. 카루스는 피식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왕자궁에 있는 작은 연회장에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하녀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넓고 둥근 테이블엔 아름다운 촛대가 상록수 잎으로 장식되어 있고, 갖가지 요리가 순서대로 등장했다.
“어서 오세요, 전하. 카루스 님.”
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레위시아와 카루스가 제일 늦었는지, 나머지 인원은 모두 자리에 앉아 가벼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율리아를 따라 코코와 샤트린이 일어나 대충 인사를 건넸다. 하기 싫은 인사를 억지로 하는 기색이 분명해, 레위시아가 웃음을 흘렸다. 바바슬로프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일어나지 말라는 레위시아의 배려에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식사합시다.”
거창한 건배사는 필요 없었다. 레위시아의 담백한 한마디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여럿이 함께 앉아 먹으니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이 빠르게 사라졌다. 입이 짧은 코코가 기름진 음식만 골라 먹다가 제일 먼저 포크를 내려놓았다.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는 율리아는 샤트린보다 더 많은 음식을 해치웠고, 레위시아와 카루스는 물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바바슬로프는 의사가 금지한 음식과 술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가볍게 마시던 식전주를 밀어내고 커다란 술병을 새로 꺼낸 샤트린이 레위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전하.”
“왜.”
“데네브라가 율리아한테 공작 작위를 제안했대요.”
“그럴 것 같더라니…….”
“그 여잔 지금 율리아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애가 됐어요. 꼭 예전의 전하를 보는 것 같달까.”
“내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난 보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샤트린!”
레위시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샤트린을 나무랐다. 그건 그렇게 쉽게 정할 일이 아니라고, 율리아가 바이칸에서 얼마나 위험해질지 생각해 봤느냐고 다그쳤다.
그러나 율리아의 생각은 레위시아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