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이곳은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본대 곁에 붙어 있지 않으면 언제 소리 없이 죽임당하게 될지 몰랐다.
그런데도 무시무시한 사내들은 알렉사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그동안 지휘관을 여럿 죽였는데도 적의 본대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명령을 내리는 자가 뒤에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놈을 찾아 죽이고 소규모 부대를 따로 운용하며 바이칸 동부로 향할 겁니다.”
“동부?”
“네, 란케아 영지로 갑니다.”
충격적인 소식을 아무렇게나 던진 알렉사가 두툼한 가죽을 몸에 두르며 물었다.
“길은 아시죠?”
“물론이다.”
그들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웃음기가 깃들었다.
* * *
황제가 물러났으니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율리아의 말에 코코와 레위시아가 정색하며 반대를 외쳤다.
“안 돼.”
“코코 말이 맞아, 안 돼!”
황제가 지금은 바다 위에 묶여 있지만 다른 누군가를 시켜 율리아를 위협할 수도 있다며, 당분간 왕성을 벗어나지 말라고 그녀를 타일렀다.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왕성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요. 곧 데네브라 황비를 제국으로 돌려보낼 거잖아요. 제가 함께 가야 할 수도 있고.”
“왜 네가 가? 오르테가에 외교 사절로 보낼 만한 귀족이 너 하나뿐인 줄 알아? 여기 멍청이가 너무 많아서 인재 찾기 어렵다는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너를 보내야 할 정도는 아니야.”
“코코, 데네브라 황비는 제가 아닌 사람과는 잘 대화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지금까지 그 여자랑 수준 높은 대화가 가능해서 이 모든 일을 성사시켰다고 생각해? 대화가 안 돼도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기 마련이야.”
“황비가 예전으로 돌아가면 어떡해요?”
“그럼 버려야지.”
그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버릴 거라고, 코코가 냉정하게 말했다. 제국의 황비면 뭐 하나. 써먹을 수가 없는데.
“데네브라가 다시 예전의 멍청하고 오만한 황비로 돌아가서 섭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내가 직접 제국으로 가서 사생아 하나를 고른 다음에…….”
“세상에, 레위시아 님에 이어서 황제까지 키워 보려고요?”
“한 번 해 봤으니까 두 번째는 더 잘하겠지.”
코코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위시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물었다.
“두 사람 뭔가 잊고 있는 모양인데, 오르테가의 젊은 국왕에게는 측근 시녀가 세 명뿐이야.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중요한 임무를 맡아 멀리 떠나 있다고. 너희까지 떠나고 나면 난 도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해?”
“전하.”
“불과 2년 전이야. 내가 이 왕성 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받으며 언제 죽을까 두려워하던 시절이.”
“전하는 이제 왕이에요.”
“지금은 내가 남부 연합의 중심에 있으니까 다들 날 좋아해 주지만, 실수라도 조금 하는 날에는 침을 뚝뚝 흘리며 달려와 물어뜯겠지.”
율리아가 물었다.
“그게 두려우세요?”
두려워해도 된다며 율리아가 웃었다. 레위시아는 카루스나 크세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장점은 결핍에서 태어났고, 두려움과 같은 어두운 감정도 때로는 도움이 될 수 있다.
레위시아가 입술을 쑥 내밀며 투덜거렸다.
“당연한 거 아니야? 사람을 이 정도로 철저하게 길들여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나는 내 시녀들이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그런데 언젠가 너희 세 사람이 내 곁을 떠나거나 날 배신한다면 부왕처럼 쓸모없는 겁쟁이 왕이 되겠지.”
“맙소사.”
코코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10년이 넘도록 정성을 다해 키웠는데 독립심을 까먹었어.”
“그래, 난 실패작이야.”
“누가 그렇대요?”
“네가 지금 그랬잖아!”
“사람이 왜 그렇게 비뚤어졌어요?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이제 나한테 맡기고 쉬라고 말해도 모자랄 판에, 꼭 그런 식으로 나와야겠어요?”
“쉬긴! 아직 젊잖아. 앞날이 창창한데 일 좀 더 하면 어때서!”
“자꾸 그러면 아무 영애나 데려다가 결혼시켜 버릴 거예요!”
“잘됐네! 남부 연합 수뇌부한테 딸 하나씩 데려오라고 할까? 중혼에 중혼에 중혼이면 되겠지!”
“전하치곤 아주 쓸모 있는 생각이네요!”
코코와 레위시아의 말다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율리아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전 이만 일어날게요.”
“어디 가!”
“누군가는 데네브라 황비에게 바이칸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말을 해야죠. 우릴 좋아해 주는 건 괜찮은데, 여기서 영영 살려고 하면 곤란해요.”
레위시아가 잘됐다며 손뼉을 쳤다.
“그래, 이제 좀 꺼지라고 해. 지긋지긋해 죽겠어.”
코코가 입술을 비죽이며 물었다.
“카루스 란케아가 여기 있는데 순순히 돌아가려고 할까?”
“안 가려고 하면 질질 끌고서라도 갈 거예요.”
어차피 저녁은 그 두 사람과 함께 먹으려고 생각 중이던 터라, 율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드레스를 정돈했다.
긴 테이블에 데네브라와 카루스가 먼저 앉았다. 그들은 식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다만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카루스는 데네브라를 없는 사람처럼 대놓고 무시하는 쪽이었고, 데네브라는 카루스를 싫어하는 척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은밀히 힐긋거렸다.
율리아는 그 가운데 앉아 혼자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식사를 시작했다.
두 명의 시녀가 데네브라에게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황비 전하,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세요. 저희는 문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알았다.”
측근 시녀가 크세노의 손에 죽은 뒤, 데네브라는 코코가 추천해 준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공주궁에서 온 샤트린의 시녀들이었다.
코코는 바이칸에서 온 사용인들은 믿을 수가 없으니 전부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데네브라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샤트린의 시녀들이 물러나자마자 율리아가 데네브라에게 말을 건넸다.
“좋은 시녀들이에요.”
“그래서?”
“샤트린 전하께서 무척 아끼는, 자매와도 같은 시녀들이고요.”
식사를 시작하려던 데네브라가 고개를 들고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나도 그 철없는 공주처럼 시녀 따위와 자매 놀이라도 해야 한다고?”
“아뇨. 다정하게 배려해 달라는 말이었어요. 여기 계시는 동안만이라도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요.”
이게 말도 안 되는 요구라는 건 율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데네브라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샤트린의 시녀들이 데네브라를 너무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우아하게 웃으며 나긋나긋한 태도로 시중을 들고 있긴 하지만, 샤트린의 시녀들은 당장이라도 데네브라가 벼락 맞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그녀를 싫어했다.
데네브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정하게 대하면 저 애들이 내 편이 된다더냐? 천지가 뒤집혀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걱정하지 마라. 바이칸 황성에도 시녀는 아주 많단다. 오르테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지. 난 그동안 안 해 본 게 없어.”
시녀는 많았으나, 모두가 적이었다.
“다정하게 대하면 날 뜯어먹으려 하고, 냉정하게 대하면 날 죽이려 해. 잘못한 일에 벌을 주면 울면서 날 악인이라 욕하고, 잘못하지 않은 일로 벌을 주면 머리를 조아려.”
데네브라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했다.
율리아는 샤트린의 시녀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이러다 데네브라와 샤트린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일이 한 번 더 일어났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카루스가 불쑥 끼어들어 말을 꺼냈다.
“당신이 바이칸의 황비이기 때문이다.”
“뭐?”
기를 쓰고 그를 무시하던 데네브라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녀는 카루스를 노려보았다가 그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혼자 울컥해서는 다시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황비이기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자리가 그런 자리라는 말이다. 기사가 되기 이전에도 나는 란케아의 후계자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모함과 비난, 이유 없는 추앙을 받았다. 동부의 척박한 영지에서조차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황비는 오죽할까.”
“이 모든 게 결국 나 때문이라고?”
“머리가 나쁘면 착하기라도 해야지.”
“카루스!”
“데네브라, 바이칸으로 돌아갈 때 누구를 데려갈 생각이지?”
카루스가 별안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에게 버럭 화를 내려던 데네브라는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긴 식탁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많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음식을 부지런히 덜어 먹는 사람은 율리아 하나뿐이었다.
카루스는 데네브라를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고, 데네브라는 그런 카루스의 시선이 버거워 어쩔 줄을 몰랐다.
“왜, 왜 날 그렇게 봐?”
“데네브라.”
“이게 다 내 탓이야? 크세노가 전쟁에 미친 게 내 탓이냐고. 내 시녀가 죽은 것도 내 탓이고, 오르테가의 왕이 죽은 것도 내 탓이냐?”
“말했잖아. 당신이 바이칸의 황비이기 때문이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황비인데,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카루스의 말투가 엄했다. 그는 데네브라의 투정을 받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자리에 앉으려거든 권리보다 의무를 먼저 배웠어야지. 권력자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했느냐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