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68/319)

234화

오르테가는 기적처럼 자라고 있었다. 강해지고 있었다. 바이칸이라는 적을 만났기 때문이다.

늙은 선장은 생각했다. 여기서 해적들의 손에 황제가 죽어 버리면, 남부는 다시 와해될지도 모른다.

율리아는 말했다.

황제는 당분간 살아 있어야 한다고. 북부와 남부를 잇고 해군과 해적이 함께 싸우게 하려면 황제라는 적이 필요하다고. 당신이 할 일은 황제를 죽이는 게 아니라, 황제의 걸음을 늦춰 시간을 벌어 주는 거라고.

그건 해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그녀에게 충고했다. 황제는 적당히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라고.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왜 그 많은 왕이 황제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겠느냐고.

율리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해적의 딸, 율리아.

그녀가 푸른 바다의 환초를 삼켰다.

바다에는 많은 전설이 있었다. 사랑하는 두 남녀를 신이 갈라놓았다던 이야기나 서로 증오하는 두 사람을 신이 떨어뜨려 놓았다던 이야기가 대표적이었다.

늙은 선장이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에는 맹점이 있었다. 신의 존재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었다.

신은 무엇인지, 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신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세상엔 많은 종교가 있는데, 그중 어떤 이들이 믿는 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설이란 것도 결국 인간이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지 않으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해적들은 대부분 신이 아니라 바다를 섬겼다. 바다에 이름을 붙이거나 인격을 부여하기도 했다. 상징물을 만들고,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바다는 언제나 심장이 차갑고 전능하며,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세상의 모든 저주는 바다로부터 시작되었다. 육지의 것들은 절대 바다를 이길 수 없고, 태초에 이 땅은 바다로부터 시작되었다. 벌하는 것도, 포용하는 것도 결국엔 바다였다.

배가 나아간 길을 따라 흰 거품이 일었다. 파도를 거스르며 길게 이어지는 포말을 바라보던 늙은 선장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그가 오랜 벗을 불러세웠다.

“바다의 저주가 시작되었어.”

“뭐요?”

“푸른 바다의 환초 말이다. 마지막 해적왕이 삼켰다던 그 저주.”

“그게 뭐 어쨌다고요?”

“새 주인이 나타났다는군.”

“뭐요? 그게 누군데?”

흰 담배 연기가 쭈글쭈글한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늙은 선장이 시퍼런 바닷물을 응시하며 말했다.

“해적의 딸, 율리아.”

네가 간절했다던 황제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귀가 아프도록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서 있던 율리아는 고독에 무너져가던 크세노의 눈빛을 떠올리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를 지배하는 외로움, 그를 갉아먹는 좌절, 그를 분노케 하는 상실.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절절히 공감했다.

애초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율리아와는 달리 크세노는 황제였다. 대륙의 지배자였다. 그동안 그가 느껴 왔을 공허함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선장이 며칠이나 벌어 줄 수 있으려나.”

“잘할 겁니다. 항해에 있어선 따를 자가 없으니.”

부두 한쪽에서 카루스와 힌치 백작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떠나보낸 바이칸 서남부의 귀족들이 데네브라의 친정 가문과 손을 잡고 제국 안에서 반황제파를 결성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니, 황제의 외유는 길면 길수록 좋았다.

“크세노 황제는 북부로 올라가지 않을 겁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건 전부 남부에 있으니까 어떻게든 이쪽을 견제하려 하겠죠.”

“그럼 그사이에 북부가 좀 더 힘을 내야 하겠군요.”

힌치 백작의 붉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그가 카루스에게 뜨거운 차를 건넸다. 카루스는 그걸 다시 율리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추우면 안에 들어가 있어.”

데운 도자기 잔에 뜨거운 찻물이 찰랑거렸다.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 있으려니 얼었던 손가락이 녹으며 간질거렸다.

율리아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북부는 걱정하지 마세요.”

“이유는?”

“지금쯤이면 바이칸 북부 전선도 어수선할 거예요. 황제에겐 정복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고, 그들은 결국 영원히 전쟁터에서 고통받을 거란 소문이 돌고 있겠죠.”

크세노가 북부를 버리지 않았다면 소용없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평원을 빼앗긴 것 때문에 분위기가 안 좋다고 들었어요. 전선을 지키는 자들은 결국 그 평원을 나눠 갖고자 싸우는 건데, 황제가 나 몰라라 하고 내려가 버렸으니까요.”

“거기다 정복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면.”

“전에 말했던 대로예요. 황제는 북부에 관심이 없어요. 그들은 고립되고 버림받았다고 느낄 거예요.”

찻잔을 손에 쥔 율리아는 여느 왕궁 시녀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우아하고, 어여뻤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힌치 백작의 눈엔 어느새 존경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하면 백작은 바이칸 북부 전선의 귀족들이 서남부의 손을 잡고 반황제파에 가담할 수도 있다고 보는 건가?”

“네.”

“허…….”

“그럴 수도 있겠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에요.”

율리아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꿀꺽 삼켰다.

“되게 만들어야죠.”

그러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북부 연합의 연속된 승리와 더불어 바이칸 북부 전선의 연속된 패배, 황제의 무관심과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무력감, 서남부 귀족들과 데네브라 황비의 친정 가문이 손을 잡고 반기를 들며, 바다에선 해적들이 준동하고, 남부 연합이 결성되어 바이칸을 상대로 선전포고한다면.”

힘센 사자도 혼자서는 무리를 이룬 늑대를 상대할 수 없다.

적은 상상처럼 강하지 않다.

힌치 백작이 가슴 벅찬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르테 백작…….”

“우리는 그걸 위해 달려왔어요. 이 모든 상황을 차근차근 만들어 왔어요. 커다란 판을 짜고 거미줄처럼 엮었어요.”

심지어 가장 강한 무기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카루스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율리아도 그를 따라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북부의 용병왕.

트리스탄은 요즘 동료들이 자신을 놀리듯 부르는 별명에 조금 으쓱한 상태였다. 무스빌리에선 트리스탄도 제법 유명한 용병에 속했지만, 사실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세상엔 그보다 잘난 인간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북부 연합의 병사들이 그를 ‘어이, 용병왕 트리스탄!’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왕이라니. 내 개 같은 인생에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트리스탄은 풍선처럼 가슴이 부풀어, 누구에게건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헛기침 속에 웃음을 감춘 그가 전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북부 연합 기사 중 친하게 지내는 자들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도대체 누구야?”

“뭐가.”

“오늘 도착한 사람들, 누구냐고?”

이게 무슨 소리지. 트리스탄이 투구를 벗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굵은 목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누가 왔어?”

“정찰대 인원이 추가되었어. 콴이 새 동료를 데려왔잖아. 용병이라던데…… 모른다고?”

“아아.”

트리스탄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이잖아, 인마. 용병이야 아무 때나 추가되는 놈들인데 뭐가 놀랍다고 이래? 여긴 승리의 전장이야. 대가도 후한 편이라고. 용병들이 안 몰리는 게 이상한 거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하하하하! 왜 그래. 쫄았냐?”

“아무리 봐도 기사단 같았단 말이야…….”

기사?

트리스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는 얼마 전 맥스웰이 빙글빙글 웃으며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동료를 몇 명 더 데려와야 하는데, 가짜 용병패와 신분증을 만들어 달라는 얘기였다.

알렉사의 활약으로 덩달아 입지가 넓어진 트리스탄은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웃으며 맥스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아…… 알렉사!”

트리스탄이 쿵쿵거리며 숙소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알렉사가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거인 같은 사내였다. 키가 어찌나 큰지, 덩치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던 트리스탄이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긴 팔다리엔 단단한 각반이, 허리춤엔 묵직한 장검이 매여 있었다. 심지어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거대한 사내들이 그 안에서 인사를 나누자 알렉사의 방이 좁아 보였다.

그들은 기사였다.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트리스탄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기사단의 상징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정체를 알 수는 없었으나, 어쩐지 누군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어, 트리스탄!”

맥스웰이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곤 사내들에게 트리스탄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배님들, 이놈이 그 가짜 신분증 만들어 준 놈입니다. 인사들 나누세요.”

사내들이 고개를 돌려 트리스탄을 바라보았다.

미소는커녕 감정도 없고, 피도 흐르지 않을 것 같은 강직함이 그들에게 깃들어 있었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 한계까지 단련된 자들에게만 느껴지는 날카로움이었다.

칼날 위에서 사는 자들 특유의 형형한 눈빛이 트리스탄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트리스탄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잘 부탁한다.”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기소개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트리스탄이 만들어 준 용병패 속의 가짜 이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들이 물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와 싸우면 되지?”

맥스웰이 트리스탄의 등을 슬쩍 밀며 말했다.

“그것도 이놈이 알려 줄 겁니다, 선배님들.”

트리스탄이 살려 달라는 얼굴로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동료라는 맥스웰조차 잔뜩 겁먹고 그들 앞에 나서지 않는데, 혼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알렉사가 말했다.

“우리는 오늘부터 본대와 떨어져 움직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