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늙은 선장이 난간 너머로 팔을 내밀어 담배를 털었다. 불이 꺼진 담배에서 마지막 연기가 흩어지고, 그는 카루스가 건넨 향신료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내가 죽여 줄까요.”
“당신이?”
“아르테 백작의 원수라면 뭐…… 마조람 후작의 부스러기라거나 그런 놈들이겠지. 아니면 바이칸 제국 사람인가? 데네브라 황비의 사람? 그것도 아니면 뭐, 드추바 해전에서 도망친 놈?”
“글쎄.”
“말만 하시오. 카루스 란케아의 이름으로는 건드릴 수 없는 인간쓰레기라면, 해적의 손으로 처리하는 게 딱 알맞지 않겠소. 나는 못 죽여 본 놈이 없어. 나보다 강한 놈은 물론이거니와, 나보다 나쁜 놈도, 나보다 천박한 놈도 모두 죽여 보았지.”
“저기 있는 건 그런 놈이 아니야.”
“그럼 약한 놈인가? 반항 한마디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겁쟁이요? 그래도 괜찮소. 나는 그런 놈도 많이 죽여 봤으니까.”
“자랑하는 건가?”
“해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요?”
“쓰레기.”
늙은 선장이 또 한차례 흐하하 웃었다.
“맞는 말이군!”
카루스가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황제의 배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출발하려는지 선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바람이 불어 카루스의 망토가 크게 휘날렸다. 하여간 기사 출신은 그놈의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잘도 두르고 다닌다고, 늙은 선장이 비아냥거렸다.
카루스가 타고 있는 배는 평범한 상선이었다. 군함이나 해적선을 끌고 오면 황제가 눈치챌 게 뻔했기에, 그는 힌치 백작이 내어 준 상선을 타고 황제를 감시했다.
늙은 선장은 그를 만나기 위해 해적선에서 작은 배를 타고 건너온 참이었다.
“카루스 님!”
그때 또 하나의 작은 배가 접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카루스의 부하들이 다가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냐.”
“아르테 백작님입니다.”
난간에 기대 있던 카루스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의 망토가 바람도 없이 크게 펄럭였다. 손에 묻은 향신료와 옷에 배인 담배 냄새를 툭툭 털어낸 그가 달리다시피 걸어갔다.
“호오.”
늙은 선장이 기막힌 솜씨로 휘파람을 불었다.
율리아는 카루스와 함께 있던 늙은 선장을 만났다. 세 사람은 배 안에서 간소한 식사와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바다에선 무혈 제독의 명성이 최고였으나, 육지에선 율리아의 명성이 최고였다.
평민들 사이에선 레위시아 국왕보다 인기가 많다는 그녀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된 늙은 선장이 허탈한 감상을 내뱉었다.
“어린애로군.”
율리아가 평온히 받아쳤다.
“그쪽은 늙었네요.”
“신은 너무 잔인해. 이제 갓 성인이 된 여자한테 세상을 움직일 운명을 지워 주다니, 그런 임무는 다 늙어서 죽기 직전인 자들한테나 던져 줄 일이지.”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에요. 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려고 하는 짓이죠.”
“해적이 될 생각은 없소?”
“미쳤어요?”
율리아가 대놓고 그를 욕했다. 해적들 사이에서도 공포로 군림하는 늙은 선장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겁먹지 않는 그녀를 보며, 카루스가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해적들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부탁할 게 있어서요.”
율리아가 선실에 난 작은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배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아나요?”
“당신의 원수가 타고 있다고 하더군.”
늙은 선장이 카루스에게서 들은 얘기를 꺼내자, 율리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수인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 일이에요. 우린 아직 제대로 싸워 본 적이 없거든요.”
“부탁이라…… 죽여 달란 거요?”
그런 거라면 아무 문제 없다고, 늙은 선장이 웃었다.
그가 오르테가에 끌고 온 해적선은 수십 차례의 개량을 거쳐 속도와 파괴력으로는 으뜸가는 최고의 배라며, 부하들을 모두 끌고 달려가서 저 배를 산산조각내고 시체를 전시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율리아가 전혀 다른 이야길 꺼냈다.
“발목을 붙들어 주세요.”
“뭐라고?”
“아무도 죽이지 말고, 공격적으로 굴지도 말고.”
최대한 발목을 붙잡고 늘어져 달라고, 남부 해상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 느끼게 해 달라고, 오랜 항로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던 해적들이 얼마나 노련한 선원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라고.
율리아는 그에게 저들의 시간을 빼앗아 달라고 말했다.
늙은 선장의 얼굴에서 끔찍한 문신이 꿈틀거렸다. 그가 소리도 없이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저 배에 타고 있는 게 누구기에.”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
율리아가 그에게 진실을 말했다.
“제국의 황제예요.”
이날 오르테가 앞바다에 떠 있던 수십 척의 해적선 중 몇이 슬그머니 자치를 감추었다. 늙은 선장의 배와 그가 거느리는 몇몇 해적들의 배였다.
그들은 오르테가 앞바다를 멀리 돌아 황제의 배를 추적했다. 오랜 항로까지 갈 것도 없었다. 황제는 최대한 빨리 제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므로, 상인들이 이용하는 바닷길을 이용했다.
그런데 출발한 지 단 하루 만에 해적선이 따라붙었다.
“해적입니다!”
혼비백산한 조타수가 방향을 틀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해적이라니. 수많은 상선이 오가는 바다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해적선이라니.
그들은 바이칸에서 넘어온 황제의 부하들이기에 충격이 더 컸다. 바이칸 서부의 바다에선 해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무혈 제독 덕분이었다.
젊은 선원 중엔 해적을 처음 본 자도 있었다. 그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해적선의 위용에 잔뜩 긴장했다.
시커멓게 칠한 기둥엔 굵은 쇠사슬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끼워진 게 죽은 자들의 해골이라는 건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폐하께 알리고 오겠다!”
부하들을 통솔하던 호르헤가 갑판 아래로 달려갔다. 크세노는 선실 안에 틀어박혀 바이칸의 지도를 펼쳐 놓고 있었다.
“폐하, 해적입니다.”
“해적?”
“율리아 아르테가 뒤통수를 친 게 분명합니다. 해적들이 빠른 속도로 추적 중이니, 속히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크세노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였다. 어지럽게 뻗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올린 그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 *
저 배에 바이칸의 황제가 타고 있다.
율리아가 그렇게 말한 순간, 늙은 선장은 위험한 시험대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이칸의 황제는 해적들에게도 원수였다. 크세노가 정복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남부의 해적들은 넓은 바다를 오가며 자유로이 살았을 것이고, 서부의 해적들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오고 있었을 것이다.
해적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많은 사람이 그 문제의 답을 ‘황금’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건 틀린 답이었다. 해적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였다.
“죽여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늙은 선장이 걸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쫓고 있는 배에 황제가 타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그걸 말했다가는 오르테가 앞바다에 모여 있는 수많은 해적 놈들이 전부 황제를 잡겠답시고 몰려올 것이다.
사실 그도 황제를 죽이고 싶긴 했다. 직접적인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정복 황제를 붙잡아 바다에 수장시킨 전설적인 선장으로 남는다면 쓰레기 같던 해적의 삶이 조금이나마 가치 있어질 것 같아서.
“놈들이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망루 위의 젊은 해적이 손나팔을 하고 소리쳤다. 늙은 선장은 항해사를 불러 명령했다.
“전력을 다해 쫓아라.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나가! 아무것도 못 보게 해라! 계속 방향을 바꾸게 만들어!”
“알겠습니다!”
배와 배 사이에 짧은 신호가 오갔다. 그를 따라온 해적들이 황제의 배를 교묘하게 따라붙었다.
호르헤가 구한 배는 어느 부유한 상인이 소유한 밀수선이었다. 상인은 그동안 배의 밑바닥을 개조해 밀수품을 실어 나르곤 했는데, 해군의 단속과 해적을 따돌리기 위해 노련한 선원들이 고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남부 최고의 해적을 상대로는 달아날 수 없었다.
항로를 벗어난 황제의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속도가 빠른 해적선 3척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황제의 배를 몰았다. 늙은 선장은 뒤에서 그들을 따라가며 지시를 내렸다.
“그냥 죽입시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숨바꼭질인가?”
늙은 선장의 부하이자, 오랜 벗이 다가와 물었다.
“선장, 도대체 뭘 노리고 이러는 겁니까?”
“노리는 건 딱히 없어.”
“뭐요?”
“부탁받은 게 있어서 말이다.”
늙은 선장이 흐하하 웃으며 말했다.
“해적의 딸을 만났다. 무책임한 아비가 육지에 버리고 떠나, 굶기 싫어서 죽은 해적의 호주머니를 뒤지고 살았다던 딸.”
“그 여자 부탁이라고?”
“생각해 봐. 그 불쌍한 게 혼자 기를 쓰고 악을 쓰고 기어올라서 귀족이 되었다고 하잖아. 우리야 바다에서 사람 죽이면서 남의 걸 빼앗다 보면 선장이 되지만, 해적의 딸이 왕국 최고의 귀족이 되려면 뭘 해야 할까.”
“뒈지게 고생했겠지.”
“그래, 그래서 이러는 거야.”
부하는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거짓말하지 마쇼. 당신이 남의 딸한테 죄책감을 느낀다고?”
“죄책감이 아니라 자기만족이야. 내가 이렇게 남의 딸한테 잘해 주면, 어딘가에 있을 내 딸도 한 번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저 배에 황제가 타고 있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것까지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지만, 꼭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