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2-2화 (266/319)

48. 깨어나지 않으면 그게 꿈인 줄 어떻게 알아요

해적들이 자꾸 카루스를 찾아 대니 그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이번에 일어난 습격 사건으로 율리아가 한동안 저택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기에, 우연히 마주치는 것조차 기대하기 어려웠다.

바바슬로프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탓이야. 내가 빨리 나아야 하는데.”

“그게 왜 바바슬로프 탓이에요?”

“그야 내가 카루스 님 옆에서 오늘 할 일은 대충 마무리됐으니 이제 백작님 보러 가자고 조르거나, 오늘은 왠지 날씨가 좋으니까 백작님 만나러 가자고 조르거나, 오늘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니까 백작님한테 가서 밥이나 얻어먹자고 조르거나…….”

“그게 뭐예요. 누가 보면 제가 뇌물이라도 준 줄 알겠어요!”

율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바바슬로프의 상처를 직접 소독하던 그녀는 조심스레 약을 바르며 그에게 말했다.

“카루스 님은 지금 바쁠걸요. 해적들이 소문 무성한 무혈 제독이랑 동료가 됐다는 생각에 그분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잖아요.”

“복덩이 너는 아무것도 몰라. 우리 대장이 얼마나 일을 후딱 빨리 해치울 수 있는 인간인지.”

“그래요? 철두철미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바로 소문의 힘이지!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아! 황제가 하기 싫은 일을 시킬 때마다 이렇게 인상을 콱 찡그리고 나타나서는 남들 코 후빌 시간에 대강대강 처리해 놓고 다 했다면서 벌떡 일어나 사라져 버리곤 했다고.”

“피곤했나 봐요. 그분도 쉬어야죠.”

“아닐걸. 누가 찾아와서 떼를 쓰거나 어려운 부탁을 하거나 그럴 때마다 대장이 뭘 어떻게 했는지 알아?”

“어떻게 했는데요?”

“악당처럼 웃으면서 배를 타고 나가 버렸어.”

바바슬로프가 한숨과 웃음을 동시에 흘렸다.

“리바이어던의 군함은 바이칸 서부에서 인식이 좀…… 무서운 편이라서. 그 검은 배를 타고 휙 바다로 나가 버리면 사람들은 감히 쫓아오지 못하고 육지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거야.”

“카루스 님이 그랬다고요?”

“그것도 꼭 배가 요만하게 보이는 데까지만 나가서 약 올리듯 유유자적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못된 인간, 무책임한 인간!”

“그런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

“그렇지? 실망스럽지? 막 혼내고 싶지?”

바바슬로프가 신이 나서 몸을 들썩거렸다. 상처가 벌어질지도 모르니 움직이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도 소용없었다.

율리아에게 등을 맡기고 있던 그가 고개를 한계까지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율리아, 우리 대장 보러 갈래?”

“시끄러워요. 바바슬로프는 환자예요.”

“붕대를 두 배로 감으면 되잖아.”

“붕대를 두 배로 감는다고 상처가 빨리 낫는 것도 아니고, 오늘 왜 그러는 거예요? 카루스 님이 그렇게 보고 싶어요?”

“아니, 나는…… 대장이 너를 보고 싶어 할까 봐.”

너는 별로 안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바바슬로프가 중얼중얼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말은 안 해도 그럴 게 분명해. 사랑이 처음이잖아. 언제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아무 때나 막 찾아가도 되는지. 뭘 원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마음을 고백하면 강요하는 게 될까 봐 무섭고, 감추고 인내하면 때를 놓칠까 봐 두렵고.”

“경험담이다.”

“야!”

바바슬로프가 꽥 소리를 지르다 상처가 벌어졌는지 몸을 둥글게 말고 끙끙 앓았다.

붕대 끝을 잡고 야무지게 매듭을 지은 율리아가 그에게 진통제를 건네주며 말했다.

“누워서 쉬어요. 저는 이제 해적들을 만나러 갈 거예요. 가서 카루스 님한테는 바바슬로프가 보내서 온 거라고 할게요.”

“뭐? 너, 복덩이 너, 지금까지 나 놀린 거야? 만나러 갈 거면서 아닌 척한 거냐고!”

“제 전속 하녀들이 간호할 거예요. 의사도 대기 중이니까 아프면 불러요.”

뭐라 투덜거리긴 했어도 바바슬로프는 율리아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엎드렸다. 그가 입은 상처가 제법 컸기에 완쾌될 때까지 왕자궁에서 나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율리아가 신신당부했다.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바바슬로프는 제 걱정하면서 기다려요.”

“내가 왜?”

“연약한 저는 이제부터 무시무시한 해적들을 만나러 갈 거니까요.”

“그럼 해적들을 걱정해야겠네. 지금까지 아르테 백작님 우습게 봤다가 큰코다친 놈이 한둘이야?”

그러니까 어서 다녀오라고, 바바슬로프가 한 손을 휘휘 저었다. 백작님 나가신다고 밖에 있는 하녀들을 부르기까지 했다. 율리아는 그에게 쫓겨나듯 방 밖으로 나왔다.

황제를 죽이고 싶다.

카루스는 황제의 배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저 커다란 상선에 황제 크세노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그는 애매한 거리에서 그 주위를 맴돌며 그를 감시했다.

적이 눈앞에 있는데 죽일 수가 없다니. 심지어 크세노는 지금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늘 개미 떼 같은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다니던 황제가 고작 측근 한 무리만을 대동한 채 남부 해상에 나타났다. 율리아를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그가 무모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할 거라는 율리아의 말이 머리로는 이해됐어도 크게 실감이 나진 않았다. 카루스가 아는 크세노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 떠 있는 황제의 배를 보고 있자니, 그를 향해 무기를 꺼내 들고 달려가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크세노를 죽여 율리아의 저주를 풀 수 있다면 카루스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크세노를 죽여 그의 심장을 율리아에게 바치고, 신이 되든 악마가 되든 그녀의 곁에서 살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를 죽일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율리아가 저주의 완성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도 크나큰 걸림돌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오?”

늙은 해적 선장이 다가와 물었다. 문신으로 뒤덮인 얼굴에 긴 수염을 기른 자였다.

그는 아주 독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그 담뱃잎이 진통제 역할을 한다는 걸 아는 카루스가 쯧 혀를 차며 물었다.

“죽어 가고 있나?”

“누구 말이오?”

“당신.”

“우리는 다 죽어 가고 있어.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을 날만 기다리는 가련한 짐승이 아닌가.”

“뻔한 소리 하지 말고, 의사를 만나.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요즘 의사들은 예전하고 달리 솜씨가 좋거든. 긴 전쟁의 영향이지.”

“그래서 싫은 거요.”

늙은 선장이 피식 웃으며 카루스에게 담배를 권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와 가까워지려 선뜻 손을 내밀었을 것이나, 카루스는 율리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무혈 제독이 샌님이었나?”

“지난 2년 동안 자꾸 죽으려는 여자를 붙들고 살라고 윽박질렀는데, 내가 그런 거에 손대면 뭐가 되겠어.”

“뭐긴, 개새끼지.”

늙은 선장이 흐하하 웃으며 연기를 흘렸다. 카루스는 그가 내민 담배 대신 매운 향신료를 입에 넣고 씹었다.

이곳이 따스한 남부라 해도, 겨울 바다는 사람의 체온을 너무 쉽게 빼앗았다. 망토를 여민 카루스가 해적의 손에 향신료를 건네주자,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바다의 괴물이라는 자가 이런 거나 씹다니.”

“고래가 사자 잡아먹는 거 봤어?”

“이제 말해 보시죠. 저 배에 누가 타고 있길래 내내 그런 얼굴인지.”

“내 얼굴이 왜?”

“찢어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침만 뚝뚝 흘리는 꼴이랄까.”

“볼 만하겠군.”

카루스가 웃으며 말했다.

“저 배에 내 연인의 원수가 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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