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그의 손은 크고 거칠었다. 카루스를 떠올리게 하는 손이었다. 오랫동안 직접 전쟁터를 돌아다녔던 만큼 호되게 단련된 손이었다.
율리아는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했다.
“우린 언제든 죽을 수 있어요.”
“율리아.”
“그래서 제안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 두 사람 중 누군가 죽어 버리면 어차피 또 같은 순간으로 돌아갈 테니까. 날 살려 두고 이번 삶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조금이라도 지켜보든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내가 미친 여자라는 걸 확인하든가.”
“널 살려 두면 당장 내가 위험해질 것 같은데?”
“내가 당신이라면…….”
율리아가 웃었다.
“한 번쯤은 처지를 바꿔 보고 싶었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여기서 대답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사람이 당신이라면, 대답해야 한다.
“또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율리아가 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드레스 소매나 주머니에 넣으면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작은 접이식 단도였다.
그녀는 그 칼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호르헤의 부하를 쫓아낼 때 스스로 입혔던 상처가 그 자리에 있었다.
“저주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건이 뭔지, 제 생각을 말해 줄까요?”
율리아가 말했다.
“승자가 패자를 잡아먹는 거예요.”
마지막 해적왕은 해적들의 왕국을 세우지 못했고, 그의 대적자였던 광산 노예는 노예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그들은 서로를 죽이고 심장을 취했어도 저주를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삶을 반복한 끝에 복수를 이루었는데, 당신은 통일 제국의 정복 황제가 되긴커녕 저주에 집착하느라 본래의 자리마저 위태로워졌다.
“그러니 먼저 승자가 되어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영원히 내 삶에 질질 끌려다니기만 할 테니까.
* * *
“폐하, 괜찮으십니까?”
호르헤가 걱정스레 물었다.
“내가 왜? 안 괜찮아 보이나?”
“표정이…….”
호르헤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황제의 얼굴이 이상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기뻐하는 건지 화내는 건지. 그림 위에 두꺼운 유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뭉그러져 보였다.
크세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리가 있나.”
그가 소매를 걷어 팔뚝을 드러냈다. 부드럽고 두툼한 옷인데도 그 안에 오돌토돌하게 닭살이 돋아 있었다. 바짝 일어선 털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율리아를 납치하러 갔던 호르헤의 부하가 돌아와 ‘그 여자는 미쳤습니다.’라고 말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소름이 끼치진 않았는데.
“율리아 아르테는 미쳤어.”
그 여자는 자기 목숨을 소모품처럼 쓸 수 있다. 심지어는 대적자인 황제의 목숨도 도구처럼 이용할 수 있다.
삶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조차 달라졌다.
“나는 이 세상의 중심이 나라고 생각했었지. 황제니까. 그러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부터 그 생각이 바뀌었어.”
율리아는 반대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보잘것없는 평민. 먼지, 혹은 하루살이. 아지랑이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는 일시적 존재.
“이제 달라. 율리아는 이 거대한 세상이 먼지라고 생각해. 일시적이라고 생각해.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라고 생각해. 하나의 놀이판이라고 생각해.”
이 얼마나 오만한 대적자인가.
“하하하, 하하하하!”
그래서 그녀였다. 가장 높은 곳의 크세노와 가장 낮은 곳의 율리아.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와 푸른 바다의 환초. 이 둘은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상대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향하도록 짝지어져 있다.
“하면…… 그 여자가 황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호르헤가 물었다. 그의 얼굴에 짙은 불신과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호르헤는 저주에 대해 알았다. 크세노가 삶을 반복하면서 어떤 괴물이 되었는지 이해하는 유일한 측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율리아가 무서웠다.
크세노가 웃음을 멈추고 호르헤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여전히 뭉그러져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가능해. 율리아는 황제가 될 수 있어.”
그뿐 아니었다.
“정복자나 제사장, 신이 될 수도 있지.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내가 비밀을 파헤치며 정보를 모으는 동안 고작 복수 따위에 매달렸던 주제에, 나보다 더 적은 조각으로도 전체를 봐. 아홉 번째에 이만큼이나 왔으니, 그 두 배를 산다면 저 여자가 과연 뭐가 되어 있을지 상상해 봐.”
율리아는 신화를 이룰 수 있다.
“대단한 여자야.”
저주에 걸리기 이전의 크세노가 지금의 율리아를 알았다면, 그는 아마 지독한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폐하…….”
호르헤가 신음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루빨리 저 여자를 죽여야 합니다.”
“안 돼.”
“폐하!”
“약속했단 말이야.”
“무엇을 말입니까?”
“누가 먼저 저주를 완성하느냐.”
그때까지 크세노는 율리아에게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번 삶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고 싶지 않으냐고 묻잖아. 호르헤, 나는 알고 싶어. 보고 싶어. 저 여자는 내가 모르는 진실까지 파헤칠 수 있을까? 오르테가는 남부의 패자가 될 수 있을까? 카루스는 나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
아직은 크세노의 바이칸이 강자였다. 황제는 절대자에 가까웠다.
북부와 남부가 손을 잡는다 해도 바이칸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고, 크세노는 자신했다.
* * *
거짓말을 하도 많이 했더니 뭐가 거짓이고 뭐가 진실이었는지 잘 구분이 되질 않았다. 크세노를 속이려 꺼낸 말에 스스로 설득되기도 했다.
죽이고 싶은데, 죽일 수가 없다.
그건 율리아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크세노가 율리아를 함부로 죽일 수 없듯,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가에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율리아는 푸른 바다의 환초를 삼켰던 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게 특별한 보석이라는 건 보자마자 알았다. 어른들에게 들키면 두들겨 맞는 것으로 모자라 빵 한 조각 얻어먹지 못하고 빼앗기게 될 거라는 것도.
그녀는 어릴 때부터 독한 아이였다. 빼앗기느니 없애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바다가 옆에 있었다면 그녀는 아마 그 보석을 깊은 물 속에 던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건 내 거야. 아무도 못 갖게 할 거야. 그렇게 생각한 율리아는 보석을 삼켰고, 저주에 걸렸다.
크세노는 달랐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었을 때, 그는 그 보석을 갖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복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전리품이었으나 자랑스러움과는 별개로 직접 몸에 지니고 싶지는 않았다고.
피를 머금은 듯 불길한 붉음에 죽은 자들의 원념이 모여 굳은 것 같은 형상. 많은 이야기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이란 결국엔 관계의 파국을 의미하지 않던가.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끈질겼다. 버리고 버려도 그에게 돌아왔다. 크세노는 결국 그걸 가공해서 데네브라의 목에 걸어 주었다.
“갔어?”
욕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데네브라가 걸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크세노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창가에 혼자 서 있던 율리아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셨어요.”
“뭐?”
“여기 황비 전하의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데네브라가 말문을 잃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왕비궁에 충원된 오르테가의 사용인들은 전부 저와 코코가 심은 세작이에요. 그런데 황비 전하께서 데려온 제국인들이 전부 황제의 세작인 줄은 몰랐죠.”
“아니야.”
“맞아요. 그때 다 걸러 냈다고 생각했는데, 일개 문지기나 노예까지 전부 황제의 사람이었어요. 그들은 몰랐다고 할 거예요.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명령을 듣는 자가 심은 거였으니까.”
그래서 침입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이름을 말해 주세요.”
“호르헤.”
“그 사람부터 죽여야겠네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황제의 측근을 죽이겠노라 말하는 율리아를 보며, 데네브라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늦게 일어난 코코가 식당으로 내려와 의자에 앉았을 때, 율리아는 이미 왕자궁으로 돌아와 진한 감자 수프를 먹고 있었다.
코코가 길게 하품하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니.”
율리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제 얼굴이 왜요?”
“또 뭔가 못된 짓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뭐래. 내가 널 몰라? 네가 처음 시녀가 됐던 날에도, 크리스틴의 약혼식 날에도, 심지어는 왕비를 협박하던 날에도 비슷한 얼굴이었는데.”
율리아가 재빨리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식당 한쪽에 있는 장식장으로 달려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뭐예요. 똑같은데? 사기 치지 마요.”
“바보니? 거울 앞으로 달려간 순간부터 네 얼굴은 너한테 익숙한 모양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 원래 남의 시선이 더 정확한 법이란다.”
코코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녀들이 나타나 그녀의 아침 식사를 챙겨 주었다.
고소한 감자 수프와 달콤한 샐러드가 차려졌다. 코코는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투정 부리지 않고 포크를 들었다.
할 일을 마친 하녀들이 부엌으로 돌아가고, 식당엔 율리아와 코코만 남았다.
“코코.”
“왜.”
“황제가 다시 정복 전쟁을 시작할 거예요.”
율리아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수프를 휘적거리던 코코의 숟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황제가?”
“네.”
“그걸 어떻게 알아.”
“만났거든요.”
“뭐? 너 그게 무슨 말이야. 황제가 지금 오르테가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