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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화 (263/319)

230화

처음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늦은 저녁 크세노는 술을 마시던 중에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이번에도 같았다. 그의 의식이, 영혼이 한없이 가벼워지더니 몸에서 빠져나왔다.

그 모든 과정이 지나치게 섬세했다. 전보다 더한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영혼이 몸을 떠나던 그 순간 크세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의지와는 달랐다.

세상은 그를 지키지 않았다. 애도하지 않았다. 인식하지도 않았다.

두 번째가 되니 두려움도 두 배가 되었다. 착각인 줄 알았던 것들이 선명한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이건 죽음이었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억울하고 분하고, 무섭고 슬펐다.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크세노는 빌었다. 제발 살려 달라고.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마음을 다해 빌었다.

살려만 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당신을 위해 살겠다고 애원했다. 신이 아니라 악마여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폐하,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경고문을 읽을 수 없습니다. 호기심 왕성한 아이들에겐 전혀 소용없는 방법일 것입니다.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뭐?”

“이번 겨울에만 벌써 수십 명입니다. 온갖 헛소문에 위령제를 지내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크세노는 관리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수도 상업지구를 감싸고 도는 강에서 화물 수송과 세금을 총괄하는 관리였다.

들고 있는 보고서의 감촉이 낯설었다. 크세노는 의자에 앉은 채 짧은 경련을 일으켰다.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던진 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자, 관리가 놀란 눈을 들어 올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크세노는 그에게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었고, 네가 누구냐고도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냐고, 이 보고서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답하는 관리의 얼굴에 깊은 불신과 두려움이 깃들었다. 황제가 미친 사람처럼 군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다음에 오겠다며 도망치듯 집무실을 떠났다.

그날 하루가 다 지나고 난 뒤에야 크세노는 자신이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와 다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날 하루 동안 그는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다. 황성에 기거하는 의사를 모두 불러다 놓고 진찰을 받았으며, 지나가는 병사나 하녀에게도 내가 누구냐고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었다.

그가 직접 죽였던 의사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폐하의 몸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왜 살아 있는 거지.

크세노는 자신의 죽던 순간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토록 애타게 빌지 않았던가.

제발 살려 달라고, 신을 따르겠노라고, 당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다.

추하게.

그 뒤부터 그는 한동안 겁쟁이처럼 살았다. 황성에 틀어박혀 명령만 내리고 도시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언제 또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의사와 사제를 끼고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안심하게 되었는데.

또 죽었다. 세 번째였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같은 날로 돌아와 관리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수도 상업지구를 감싸고 도는 강에서 화물 수송과 세금을 총괄하는 관리였다.

“안전시설을 설치해라.”

“제발 다시 생각해…… 예?”

“아이들이 다니는 길목마다 안전시설을 세우고 경고문을 붙여. 경고문엔 반드시 그림을 그려 넣어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폐하. 역시 현군이십니다!”

관리가 기뻐하며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크세노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은 것도, 미친 것도, 아픈 것도 아니었다.

이건 저주였다.

* * *

율리아와 크세노의 시선이 서로에게 들러붙었다.

율리아는 크세노의 시선이 자신을 물어뜯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크세노는 율리아의 시선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주이면서,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지.”

크세노가 웃으며 말했다.

“미친 듯이 찾아 헤맸어. 이건 무슨 현상인가. 나는 무엇에 씌었는가. 네가 죽을 때마다 나까지 죽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찾아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리라 다짐하기도 했고.”

“그래도 저주는 풀리지 않아요.”

“네 심장을 찔러 그 피를 뒤집어쓰고, 네 영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거야. 네 무덤 위에 집을 짓고 거기서 잠들 생각이다. 나는 무엇이든 할 거야. 너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나는 황제니까. 크세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율리아는 그가 사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흉상을 매달고 나타났던 사절단의 배를 떠올리면서, 제법 잘 만든 조각이 아닌가 감탄하기도 했다.

어지럽게 뻗친 머리카락과 날카롭게 각진 턱이 인상적이었다. 눈빛도 그랬다.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만족할 수 없었던 야생의 정복자. 그는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는 우두머리 수컷이었다.

“나는…….”

율리아가 입을 열었다.

“대적자인 당신이 바이칸의 황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이건 해볼 만한 싸움이다.

“불쌍해라.”

율리아가 미소 지었다. 연민으로 가득한 미소였다.

“이 얼마나 가엾은 사람인가.”

그가 저와 같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동정할 수 있었다. 자신이 죽을 때마다 함께 죽어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율리아는 크세노가 불쌍했다. 그는 만인에게 가해자였으나, 적어도 율리아 한 사람에게는 피해자였다.

“저주를 완성해 신이 되려 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율리아가 물었다.

“그런데 그 방법에 확신이 있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크세노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율리아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가 아니라 그에게 깃든 저주를 상대로 말을 걸었다.

“내 심장을 찔러 그 피를 뒤집어쓰면 되나요? 그럼 날 납치할 게 아니라 내 심장만 도려내서 가져갔어도 되는 일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해?”

“하물며, 그게 전부였으면 마지막 해적왕이 왜 실패했겠어요. 그의 대적자는 한낱 노예였는데. 그 노예도 마찬가지죠. 삶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영웅이 된 그에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없었을까.”

“그야 모르지. 기록되지 않았으니.”

“전설이라는 건 언제나 그래요. 거짓 속에 진실을 감추고, 진실 속에 거짓을 끼워 넣어요. 심장을 찔러 그 피를 뒤집어쓰라는 건 진실이겠지만 그게 저주의 완성인지, 아니면 저주를 해제하는 방법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율리아, 북부의 주술사들은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어. 이건 여섯 번째가 되어서야 그들에게서 알아낼 수 있었던 진실이야.”

“그럼 뭘 망설여요. 이 자리에서 날 죽이지 않고.”

율리아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황제인 당신이 나보다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보다 덜 고민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당신은 대륙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 일에 대해 논의했을 수도 있겠죠.”

그랬다. 끝없이 찾아 헤맸다. 누구에게건 물었다.

삶을 반복할 때마다 율리아는 복수에 매달렸고, 크세노는 저주에 매달렸다.

“네 말이 맞아.”

크세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율리아를 노려보던 그가 돌연 미소를 지우고 본래의 얼굴을 드러냈다.

지치고 지긋지긋해진 자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결정한 거야. 이번 삶에선 내 손으로 너를 죽여 보려고.”

어차피 실패하면 다음으로 넘어갈 테니까.

“내가 네 정체를 알게 됐으니 이제부터는 마조람이 아니라 나로부터 도망쳐야 할걸. 나는 이 조그만 왕국의 후작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륙의 정복자니까, 너는 이제까지보다 더 고달픈 삶을 살게 되겠지.”

그가 물었다.

“대적자인 내가 황제란 걸 알았을 때 동정심을 느꼈다고 했지? 그럼 네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땠는지 알려 줄까.”

“당신…….”

“크세노라고 불러.”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나와 동등한 사람은 오직 너 하나뿐이라며.

“율리아, 나는 네가 무서웠어.”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율리아 아르테가 두려웠다.

“아홉 번의 삶을 거쳐 마침내 내게 닿은 여자.”

소름이 돋았다. 죽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독종이기에 신으로부터 황제인 자신을 쓰러뜨릴 자격을 부여받았나.

나는 이 여자를 이길 수 있을까. 이 싸움의 승자는 누구일까.

어쩌면 신은 승자가 정해진 싸움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무섭기만 했던 건 아니야.”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다.

“네 모습을 보고 싶고, 너에 대해 알고 싶었지.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삶을 반복할 때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낯설어하는 사람들 속에서 오직 너만은 나와 같은 길을 걸었을 테니까.”

나는 네가 간절했다.

크세노가 고백하듯 털어놓은 진심에, 율리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 줘.”

그가 손을 내밀었다.

“너는 어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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