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62/319)

229화

비가 와서 건물 입구까지 마차가 들어와 있었다. 율리아는 시녀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마자 문을 탁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그러곤 이렇게 물었다.

“황비 전하는 무사한가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협박이라도 당하셨어요? 편지는 아닐 것 같고, 누군가 은밀하게 찾아왔나요?”

“율리아 시녀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황비 전하는 사실 그렇게 변덕스러운 사람이 아니에요.”

데네브라는 가끔 미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정말로 미치진 않았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어린애. 딱 그 정도였다.

“어제 돌아가실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끼는 시녀를 내치고 당신을 보내셨을까요. 심지어 그 시녀는 저와 만날 때마다 자리를 함께하던 전하의 측근이었는데.”

“그 아이가 전하께 실수했겠죠.”

“그럼 죽었겠죠.”

율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시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죽었을 거라는 율리아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왕비궁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호위 병력도, 복도를 오가는 시종들의 얼굴도 평소와 같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코코가 심어 놓은 첩자였는데도 그랬다.

그들 모두를 속일 정도로 용의주도한 자였다. 시녀가 바뀌지 않았다면 율리아조차 아무 의심 없었을 것이다.

누굴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저택에 침입했던 괴한들에게 이미 이 문제의 답을 들어 알고 있었다.

“산맥을 넘진 않았을 테고, 배 타고 왔어?”

“협박하는 건가?”

“그 배엔 누가 타고 있지? 설마 황제 본인이야?”

괴한은 율리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대처가 완벽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주 큰 배겠네. 황제는 물을 무서워하니까 작은 고깃배를 타고 오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 폭풍도 이길 수 있을 만큼 눈에 띄게 큰 배라면 찾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을 테고.”

“…….”

“돌아가서 말해. 율리아 아르테는 미쳤다고. 그 여자는 자기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버릴 만큼 미쳐 있고, 늘 품속에 칼을 지니고 다닌다고. 달아나는 네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해.”

“…….”

“또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는 율리아의 말을 전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죽음과 가까운 자는 동류를 알아본다. 그가 지금까지 수없이 사람을 죽여 온 암살자였기에, 율리아는 그를 속일 수 있었다.

“황비 전하, 율리아 시녀를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데네브라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문을 여는 시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율리아는 두툼한 외투를 벗어 한쪽 팔에 걸치고 침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주 조용했다. 율리아의 구두가 카펫을 스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드레스 자락이 흔들리며 바스락거리고, 바깥에선 바람 소리가 유령의 울음처럼 들렸다.

“황비 전하.”

율리아가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를 걸쳤다. 데네브라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반쯤 내린 침대 커튼 사이로 데네브라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율리아입니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율리아는 외투를 잡지 않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붙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곤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사이 침실 문이 닫혔다.

데네브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율리아는 데네브라를, 데네브라는 크세노를, 크세노는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율리아가 다시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녀와 아주 가까운 곳, 두어 걸음 떨어진 방 한가운데에 크세노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런데도 율리아는 그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오직 데네브라만을 바라보았다.

“율리아…….”

데네브라가 새된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누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긴장 때문에 몸이 굳어 누워 있는데도 팔다리가 아팠다.

데네브라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 고요한 방에 그 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율리아에게 크세노가 네 곁에 있노라고, 왜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구느냐고 물어야 했다. 이러다 죽는다고. 너도, 나도 죽는다고.

“괜찮아요.”

그런데 율리아가 먼저 말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기분 나쁠 만큼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 긴장으로 바짝 굳어 있던 데네브라의 몸이 천천히 풀어졌다. 긴 숨과 함께 어깨가 내려가고, 시선은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수고했어, 데네브라.”

크세노가 말했다.

“이제 그 이불을 몸에 감고 욕실로 들어가.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귀를 막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데네브라는 크세노가 명령한 대로 움직였다.

죽은 시녀가 아직도 문 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시체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으나, 어쩐지 그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병사도, 하인도, 시종들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곁에는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렇다고 데네브라를 경멸하는 율리아가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켜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데네브라.”

크세노가 보채듯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데네브라가 움찔거리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뒷걸음질 치며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율리아는 그런 데네브라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떤 말로 구워삶았는지 모르겠는데.”

크세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아내는 네 동료가 될 수 없어.”

그가 뚜벅뚜벅 걸어 율리아와 욕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시야를 강제로 빼앗아 자신을 보게 했다.

“멍청해서 사랑스럽긴 하지만, 변덕스럽기 때문에.”

율리아의 입가에 실낱같은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미처 그 모습을 보지 못한 크세노가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제 율리아의 시야엔 크세노뿐이었다. 그로 가득했다. 그녀의 짙은 초록색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자, 크세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침내 율리아의 입에서 황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

* * *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에게 세상의 중심은 그 자신이었다.

바이칸의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가장 지체 높은 귀부인들이 앞다퉈 그를 길렀고, 가장 명망 높은 학자가 그를 가르쳤다.

가장 아름다운 아이들이 그의 친구가 되고, 가장 값비싼 노예가 그의 수족이 되었다.

먹는 것, 입는 것, 버리는 것까지.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에게 세상은 재미없는 백과사전이요, 결말이 정해진 장편 소설이었다.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그날의 일은 잊히질 않았다. 자고 일어나 평소와 같은 일과를 보내던 그는 사람들이 자꾸 얼어붙은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 왜 들어가냐는 그의 질문에, 관리는 사람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크세노는 안전시설 설치를 주장하는 관리의 보고서를 찢어 버렸다. 다시는 이딴 일로 귀찮게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이럴 시간이 있으면 경고문이나 써서 붙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관리는 당황했다. 글을 모르는 백성은 어떻게 하냐고, 경고가 소용없는 아이들은 또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크세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한 번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엔 그게 죽음인 줄도 몰랐다. 갑자기 온몸을 감싸는 지독한 추위에 주위 모든 게 멈췄고, 가슴엔 심장이 사라진 것처럼 시린 한기가 가득했다.

몸을 떠난 영혼은 세상이 아니라 그를 관조했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 그는 세상의 주인인 듯 살았으나, 그저 연약한 한 인간일 뿐임을 가르쳤다.

그건 정말 긴 시간이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지독하게 두려웠던 시간이기도 했다. 찰나였으나 영원이었다.

크세노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죽을 수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금세 지나갔고, 모든 건 정상으로 돌아왔다. 몸을 떠났던 영혼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그에게 스며들었다. 한기만 가득하던 가슴엔 어느새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의사를 불러와라! 당장!”

크세노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믿었다.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었다.

황제를 보살피는 황성의 모든 의사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크세노의 병이 무엇인지 시원하게 밝혀내는 자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병이 아니었으니까.

꿈을 꾼 것입니다. 마음이 병든 것입니다. 기가 허해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의사들은 모두 목이 잘렸다.

황성에 기거하는 의사가 모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된 뒤에도 크세노는 매일 그들을 불러 모아 진찰을 받았다.

“강건하십니다. 완벽하십니다.”

정확하지 않은 병명을 말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사들은 그렇게 말하며 황제를 칭송했다. 그래도 그는 안심하지 못했다.

그러다 두 번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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