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왕비궁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어둑어둑한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간 데네브라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시종에게 물었다.
“연락은?”
“아직입니다. 약속했던 부두로 전령을 보내 놓았으니, 연락이 오면 바로 달려올 것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굼벵이 같은 놈들!”
데네브라가 기다리는 건 바이칸으로 돌아간 서남부 귀족들의 보고와 그녀의 친정 가문 소식이었다.
황제와 척을 지기로 한 이상, 그녀는 이 모든 사람의 목숨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런 책임감을 가져 본 적 없던 그녀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바이칸은 거대한 국가였다. 남부와의 전쟁이나 북부와의 전쟁보다, 내전의 규모가 더 클 것이다.
만약 이 싸움이 바이칸을 분열해 내전으로 이끈다면 오르테가를 수호하는 율리아에겐 이로운 일일 것이나, 그 거대한 땅엔 수많은 제국민의 피가 흐르리라.
데네브라는 그만큼의 대가를 바쳐야만 섭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황제를 죽여야 했다. 크세노의 시체를 밟고 그 위에 올라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처음 느끼는 공포였다. 율리아를 그렇게 윽박질렀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위치에 걸맞은 책임감을 가지라는 건 실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술을…….”
평소처럼 취해 잠들려던 데네브라가 머뭇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아무것도 아니라며 성큼성큼 걸어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늦은 밤이 되도록 잠이 오질 않았다.
도대체 무슨 변덕으로 술을 물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냥 평소처럼 취하도록 마시고 잠이나 잘걸. 뜬눈으로 새벽을 맞으니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데네브라는 자신이 율리아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과는 통하는 구석이 없는 타인이라고, 적으로 만나지 않았어도 적이 되었을 상대라고 믿었다.
율리아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건 인식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들은 천금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한 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율리아는 데네브라를 필요할 때마다 쓰고 버리는 도구처럼 여겼다. 알고 있었다.
자존심 상하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참아야 했다. 폐위당하지 않고 미친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율리아의 손을 잡아야 했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도구라.’
데네브라는 율리아가 자신을 왜 경멸하는지, 그 이유가 뭔지도 알았다. 사람을 도구처럼 쓰고 버렸기 때문이다. 입에 넣었다 뱉는 디저트로 여겼기 때문이다. 재미로 죽이거나 무료함을 달래려 가지고 놀기도 했다.
지금 율리아가 데네브라를 그렇게 가지고 놀고 있었다.
‘건방진 것!’
계획했던 대로 언젠가 섭정의 자리에 오른다면 저 건방진 시녀를 바이칸으로 끌고 가리라. 그 드넓은 황성에서 이 조그만 왕국의 시녀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였는지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런 뒤에는…….’
어떻게 할까.
죽일까. 아니면 영원히 곁에 두고 괴롭힐까.
율리아가 내 시녀장이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함께 마차를 타고 왔던 시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어설프기 짝이 없더니 신기하게도 오르테가에 온 뒤로는 조금씩 전문 시녀다운 모습을 보이는 아이였다.
‘율리아를 따라 하는 건가.’
율리아가 오르테가 백성들에게 무척 인기 많은 귀족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평민 출신으로 자신이 모시는 왕족을 왕좌에 앉히고 귀족이 되었으니, 신분제를 법보다 우선하는 사회에선 희망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비쳤으리라.
그런데 자신의 시녀마저 율리아를 우상처럼 여길 줄이야.
데네브라의 시녀는 바이칸 제국에서도 제법 이름 있는 가문의 딸이었고, 그만큼 신분에 대한 고정 관념이 뿌리 깊은 자였다. 그런 아이가 이 작은 왕국의 시녀를 떠받들다니, 참 웃기는 일이었다.
새벽이 깊어지자 복도를 오가는 호위 기사들의 발소리도 잦아들었다. 교대를 마친 기사들이 제 자리를 찾아갔기 때문이리라.
지나치게 조용한 밤, 데네브라는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몸에 감았다.
술이 원인인가 싶었는데, 어쩌면 몸이 편해 이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칸 황성에선 매일 요란한 연회를 열어 즐기던 그녀가 요즘엔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하루 세 번 식사하고, 하루 세 번 옷을 갈아입고, 정해진 시간에 낮잠을 잤다. 율리아가 다쳤다는 소리를 듣고 왕자궁으로 달려갔을 때는 드디어 외출할 일이 생겨 기쁘기까지 했다.
“거기 누구 없느냐.”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재미없는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이대로 밤을 지새울 것 같았다.
“서재에서 아무 책이나 좀 가져오너라.”
응접실에 황비의 침실을 지키는 당번 시녀가 있어야 정상인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함께 마차를 타고 온 아이가 문밖에서 졸고 있을 터인데.
“거기 누구 없냐고 묻지 않느냐!”
벌떡 몸을 일으킨 데네브라가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를 따라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왜 아무 말을…….”
응접실이 캄캄했다. 문손잡이를 잡고 선 데네브라의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잠옷은 부드럽고 두툼했지만, 순간 끔찍한 추위가 온몸을 감쌌다.
시녀가 움직이지 않았다.
데네브라가 던지듯 건네준 다이아몬드 반지가 시녀의 검지에서 불길하게 빛났다. 침실 앞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 앉은 채, 시녀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이 오르내리지도 않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녀가 죽었다.
데네브라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비명을 질러서 사람을 불러야 한다.
“데네브라.”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크세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의 단단한 두 팔이 데네브라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침실로 이끌었다.
그는 무례하지 않았다. 강압적이지도 않았다. 마치 정말 사랑하는 아내를 대하듯 정중하고 다정한 태도로 그녀를 안았다.
“크세노.”
“황성에 있을 때는 당신이 별로 그립거나 반갑지 않았는데, 여기서 만나니까 느낌이 달라. 당신은 어떻지?”
“이거 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데네브라가 크세노의 팔을 뿌리쳤다. 그는 낮게 웃으며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데네브라는 크세노가 오르테가에, 그것도 왕궁 안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는 건지, 아니면 뭔가 착각하는 건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난 거야. 크세노, 정말 미친 거야?”
“내가 미쳤다는 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지.”
“감히 날 폐위하려고 해? 당신이 감히? 소리 지를 거야. 당신을 증오하는 오르테가의 젊은 왕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겠지. 잘됐네. 전쟁을 벌일 것도 없이 여기서 죽어.”
“괜찮아. 소리 질러.”
크세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우린 부부니까.”
“크세노!”
“데네브라……. 너는 도대체 왜 여태 살아 있는 거야.”
크세노가 한 손으로 데네브라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는 손이 컸고, 데네브라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른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크세노가 혼자서 여기 나타났을 리는 없으니, 최악의 경우엔 바깥에서 왕비궁을 지키는 호위 기사들까지 모두 죽었을지도 모른다.
“율리아 아르테.”
크세노가 데네브라의 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쥐고 말했다.
“그 여자를 내게 데려와.”
* * *
“데네브라 황비께서 찾으십니다.”
다음 날 일찍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유난히 거센 바람이 불고 거기에 비까지 내리니, 두꺼운 옷을 입어도 추위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죠?”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급하게 찾으시긴 했는데…….”
“급하게?”
“예, 기분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율리아를 찾아온 건 데네브라의 시녀였다. 늘 보던 얼굴은 아니었지만, 데네브라의 시녀라는 건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으셨다고요.”
율리아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황비가 급하게 찾는다는데, 그녀는 바로 일어날 기세가 아니었다.
조급해진 시녀가 다시 말을 건넸다.
“여태 침실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식사도 안 하시고…… 율리아 시녀께 꼭 할 말이 있다고, 그 말씀만.”
“걱정되시겠네요.”
“예, 저는 황비 전하를 모시는 시녀니까요. 며칠 전의 일로 몸이 성치 않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시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율리아는 의자에 앉은 채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시녀가 바뀌었는데 이름도 묻지 않았네요. 황비 전하께선 변덕스러우셔서 시녀를 자주 바꾼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당신인가 봐요.”
“예, 알고 계신다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전의 시녀님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아이는…… 잘 있어요. 그냥 그 아이가 질린다면서 사람을 바꾸셨을 뿐이에요.”
“그렇군요.”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트루디에게 손짓했다. 눈치 빠른 트루디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율리아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었다.
“외출하시게요?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나 혼자 다녀올게.”
“하지만…….”
“어차피 왕궁 안인데, 뭐. 점심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코코가 일어나거든 함께 식사하자고 전해 줘.”
“예, 백작님.”
트루디가 물러나고, 율리아는 데네브라의 시녀와 함께 왕자궁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