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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화 (260/319)

227화

“실패했습니다!”

“무엇을?”

“아르테 백작의 저택에 잠입했던 녀석들이 대부분 죽었습니다. 살아남아 도망친 녀석들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한 놈도 찾지 못했느냐?”

“아닙니다. 아르테 백작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쳤던 녀석은 돌아와 보고를 마쳤습니다.”

“데려와라.”

호르헤의 뒤를 따라 복면을 쓴 괴한이 끌려 들어왔다. 복면을 벗기자, 흉터투성이의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크세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호르헤가 물었다.

“왜 실패했지?”

“저택을 떠났던 무혈 제독이 갑자기 돌아왔습니다. 그가 밤새 아르테 백작과 함께 있던 터라 밤 동안 대기하고, 그가 저택을 떠난 뒤 정원사들이 출근하기 전에 습격을 감행했으나…….”

“갑자기 돌아왔어?”

“그렇습니다.”

“혼자서 말이냐?”

“아닙니다. 부하가 하나 있었는데…….”

“그러니까 고작 두 명에게 너희가 전부 당했다고?”

호르헤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그가 극도로 분노했음을 아는 부하들이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크세노가 웃으며 말했다.

“그만둬. 카루스가 있었다잖아. 저놈들이 무혈 제독을 어찌 물리치겠나.”

“하오나 폐하.”

“실패한 원인은 그것뿐이냐? 그럼 다음엔 성공할 수 있겠지?”

크세노가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장담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폐하, 아르테 백작은…… 미친 여자입니다.”

크세노의 술잔이 크게 출렁였다.

“칼날에 제 목을 가져다 대고,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베이면 죽는 급소였는데…….”

심지어 칼을 빼앗고 스스로 죽겠다며 적을 위협했다.

“그 여자는 폐하께서 상처 하나 없이 안전하게 데려오라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오거나 제 사람들을 위협한다면 스스로 심장을 찌르겠다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부하의 말이 길어질수록 크세노의 눈꼬리도 길어졌다.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런 여자는 처음 보았습니다. 폐하, 그 여자는 미쳤습니다!”

“그래?”

“달아나는 저를 보고…….”

부하가 보고를 마치자 크세노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가 놓친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었다.

한참 동안 몸을 가누지 못하도록 크게 웃던 크세노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안 되겠다.”

“폐하.”

“오르테가로 가자.”

그가 타고 있는 것은 배였다. 창밖으로 펼쳐진 것은 푸르른 남부의 바다였다.

오르테가가 코앞에 있었다.

호르헤가 열어 놓은 창문에서 변덕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바닷바람이었다. 저 멀리에서 높은 파도가 밀려왔다.

* * *

레위시아 국왕의 명령으로 오랜 항로가 세간에 공개되었다.

‘옛 항로’라고 불리는 이 바닷길은 남부와 서부를 잇는 거대 항로와 닿아 있으면서도 드추바 섬 앞바다에 교묘하게 걸쳐져 있었다.

배를 타고 다니는 모든 이가 국왕의 이 결정에 환호했다. 먼바다로 조업을 나가는 어부들은 물론이거니와 상인과 해군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해적들이 저들끼리 감춰 놓고 해군의 추적을 피해 사용해 왔던 오랜 항로는 이제 모두의 것이었다.

“율리아!”

억류에서 풀려난 데네브라 황비가 밝은 얼굴로 왕자궁에 찾아왔다.

레위시아가 완전히 본성에 들어가게 되면서 주인을 잃은 왕자궁엔 율리아와 코코가 머무르고 있었다.

“괜찮으냐? 다쳤다고 들었는데, 누가 암살자를 보냈다면서?”

데네브라가 달려와 율리아의 목과 귀를 살폈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약 냄새가 나는 그녀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보란 듯이 화를 냈다.

“너는 오르테가에서 왕과 가장 가까운 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겁이 없느냐. 경비 몇 명이 전부인 저택에 혼자 머무른다며? 카루스가 구하러 달려가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어?”

율리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데네브라를 바라보았다. 코코는 입가에 미묘한 웃음기를 매달고 있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걱정은 무슨! 네가 죽으면 내 위치가 불안해지니까 하는 말이다. 너는 말이다.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벌여 놓았으면 그에 맞는 책임감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송구합니다, 황비 전하.”

율리아는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웃음이 터지려는지, 코코가 슬그머니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걱정에서 시작해 화풀이로 넘어갔다가 마지막엔 신세 한탄으로 이어지는 데네브라의 말을 들으며, 율리아가 물었다.

“사생아는 찾았나요?”

“아직 연락이 없다. 전령이 오가기에 여긴 너무 멀어!”

“바이칸 서남부니까 쾌속선으로 가면…….”

“걱정하지 마. 크세노의 사생아라면 내가 몰래 파악해 둔 녀석만 해도 넷은 된다. 그중 하나는 죽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나머지는 아직 살아 있을 거야. 놈들에게 그 정보도 넘겨주었으니 찾는 건 시간문제일 거고.”

“다행이네요.”

처음으로 데네브라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하긴, 그녀는 황제의 하나뿐인 아내이기에 사생아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율리아.”

“네, 전하. 말씀하세요.”

“크세노가 보낸 암살자더냐?”

데네브라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할까 말까 망설이는 율리아 대신 코코가 시원스레 입을 열었다.

“카루스 란케아가 다 죽여 버려서 심문은 못 했어요. 하지만 크세노 황제가 보낸 납치범일 거라고 확신해요.”

“다 죽여 버렸어?”

“상황이 여유롭지 않아서 전력을 다했더니 다 죽었대요. 몇은 살아서 달아났는데, 추적하지 못했어요. 다들 다쳤거든요.”

“카루스가 다쳤어?!”

데네브라가 꽥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코코가 왜 소리를 지르냐는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많이 다쳤어? 그는 괜찮은 것이냐? 의사…… 의사는? 어디 불구가 됐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괜찮아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기지로 돌아간 건 아니겠지?”

카루스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면 금방이라도 달려갈 기세였다.

율리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위층에 있어요.”

카루스는 바바슬로프와 함께 왕자궁 손님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상처는 그리 큰 게 아니어서 생활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그는 율리아와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왕자궁으로 들어오라는 코코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등에 긴 자상을 입은 바바슬로프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독한 수면제를 먹고 잠든 그를 내려다보던 카루스가 밖으로 나가려 몸을 돌렸을 때였다.

의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트루디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가세요? 제독님도 며칠은 쉬셔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할 일이 많아. 바바슬로프를 잘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 아저씨도 팔이 다 나을 때까지 휴가라서, 저도 여기 있기로 했어요.”

“그래.”

“저기, 그리고요.”

트루디가 슬금슬금 다가와 카루스에게 말했다.

“아래층에 데네브라 황비께서 와 계세요. 곧 2층으로 올라오실 기세였어요.”

“그래?”

카루스가 눈썹을 휙 추켜 올리더니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데네브라의 시중을 드는 자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알려 줘서 고맙다.”

카루스가 트루디에게 금화를 던져 주었다. 그러곤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중앙 계단이 아닌 측문으로 돌아 왕자궁을 빠져나갔다.

트루디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앞치마 주머니에 금화를 집어넣었다.

데네브라가 선전포고라도 할 기세로 2층에 올라왔을 때, 카루스는 이미 왕자궁을 떠나고 없었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아까 나가시는 것 같았다고 말하는 트루디를 보며, 율리아와 코코가 알 만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데네브라는 용건도 없으면서 왕자궁에서 서성거리다가 저녁까지 다 먹은 후에야 왕비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로 향했다.

“전하, 모시겠습니다.”

젊은 시녀가 달려와 데네브라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는 걸 도왔다. 긴 드레스를 정리하거나 안에서 마차 문을 닫는 것도 그녀의 역할이었다.

왕비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데네브라는 자신의 시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범한 금발에 눈이 예쁘장한 아이였다. 언젠가 크리스틴 마조람이 바이칸 황성에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서 빼앗은 반지를 던져 주고 시녀가 되라고 명령했던 아이이기도 했다.

손가락을 보니 그때 그 반지가 여태 끼워져 있었다.

“그거 버려라.”

“예?”

“너희는 왜 이렇게 꼭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 그 반지 말이다. 버리라고 하였다.”

자기가 말을 알아듣기 어렵게 하는 편인 줄도 모르고, 데네브라가 호통을 쳤다.

당황한 시녀가 최대한 빠르게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오랫동안 끼고 있어서 손가락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전에는 꼭 맞아 빼기 어려웠는데, 그새 살이 빠진 것인지 이번에는 제법 수월하게 나왔다.

“버리겠습니다, 전하.”

“이리 내놔.”

버린다고 해 놓고 간직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데네브라가 시녀에게서 반지를 빼앗았다. 그러곤 마차 창문을 열어 냅다 던져 버렸다.

시녀가 큰 눈을 깜박거렸다. 데네브라는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보고 코웃음 치더니, 자신의 손가락에서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쑥 뽑아 내밀었다.

“차라리 이걸 가져라.”

“예? 저, 제게 주시는 거예요?”

“가지래도!”

시녀가 얼른 반지를 받아 손가락에 끼웠다. 손가락에 맞지도 않았고, 너무 크고 화려해서 자신의 취향도 아니었지만, 시녀는 최선을 다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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