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두 사람에게 깃든 단 하나의 신화
나는 왜 선택되었을까.
괴한의 칼을 빼앗았던 순간, 율리아는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먼저 저주에 걸린 건 크세노 황제였다. 율리아는 그의 대적자로 뒤늦게 선택되었다. 그녀의 ‘어떤 부분’이 황제에게 맞서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만약 푸른 바다의 환초에게 사람과 같은 의지가 있다면 그는 생각보다 꽤 단순한 존재일지 모른다.
오기와 인내심이 기준이었나. 아니면 복수심? 그것도 아니면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 어쩌면 이 모든 걸 적당히 고려했을 수도 있다.
삶을 반복할 수 있다는 건 지독한 고통인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멍청하고 순진했던 율리아가 아홉 번째엔 아르테 백작이 되어 남부를 손에 넣기까지 했으니.
“남부 연합에 오랜 항로를 공개하겠습니다.”
회의실에 울려 퍼지는 율리아의 목소리엔 온기가 없었다.
그녀는 웃지 않았고, 친근하게 굴지도 않았다. 둥글게 퍼진 치맛자락은 아름다운 곡선인데, 그녀의 눈빛은 서슬 퍼런 칼날처럼 자비가 없었다.
처음엔 율리아를 우습게 보며 무시했던 귀족들도 이제는 전력으로 그녀를 상대했다.
“반대합니다. 항로를 독점한다는 건 장기적으로 오르테가에 엄청난 이득입니다. 지금까지 남부 함대가 해적들을 소탕하지 못했던 것도 그 오랜 항로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남부 함대가 언제 해적을 소탕했습니까?”
율리아가 물었다. 그녀의 입가엔 약간의 비웃음마저 떠올라 있었다.
“카루스 란케아가 오기 전, 남부 함대는 해적들의 금화 수송책이었습니다. 그걸 알고도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렇다 해도 오랜 항로를 공개해 버리는 것은…….”
“해적들의 오랜 항로는 자유 항로로 통하는 가장 빠르고 은밀한 길입니다. 그걸 알아낸 건 우리가 아니라, 카루스 란케아와 그의 부하들이고요. 오르테가의 귀족들에게 반대할 명분이 있습니까?”
“아르테 백작, 그는 변절했으니 이제 오르테가의 귀족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개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의 위험을 안고 있으니까요.”
율리아가 ‘전쟁’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였다.
감히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이 날의 화제, 전쟁.
율리아는 그 무거운 단어를 회의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단 한 사람도 거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
“직시하세요. 우리의 적은 제국 바이칸입니다.”
“아르테 백작!”
“해적 세력은 오랜 항로를 통해 자유 항로로 진입, 바이칸 서부 해상을 견제할 것입니다.”
“남부 함대는요?”
“그들은 드추바를 중심으로 오가며 오르테가를 지켜야죠.”
카루스의 남부 함대가 오르테가를 지킨다는 말에 누군가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율리아는 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상석에 앉아 말없이 팔짱을 끼고 있는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국왕 전하.”
“듣고 있다.”
“허락해 주세요.”
귀족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왕을 설득하면 된다. 오르테가는 왕정 국가였다.
레위시아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전하!”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바이칸 서부로 가는 항로는 너무 중요한 정보입니다. 우리가 그걸 독점하고 향후 백 년간 상행을 주도한다면…….”
“그대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레위시아가 하하 웃었다.
그가 팔짱을 풀고 회의실 탁자 위에 팔을 올렸다.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내가 선왕처럼 크세노 황제 앞에 엎드려 빌 거라 믿고 있어.”
귀족들이 한꺼번에 입을 다물었다.
힌치 백작이 거칠게 헛기침을 내뱉고, 샤트린은 아예 욕을 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드러내 놓고 분노하는데도 레위시아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잘 들어라.”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율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오르테가는 두 번 다시 바이칸의 황제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
“전하!”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황제를 섬기지 않는다. 티타니아를 빼앗기지 않는다. 너희 중 누군가가 오르테가를 제국의 속국이라 부른다면, 그의 입을 찢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아르테 백작의 주장대로 오랜 항로를 남부 연합에 공개해 모든 배가 그 길을 이용할 수 있게 하라고, 왕이 말했다.
때맞춰 율리아가 입을 열었다.
“전하, 바이칸 서남부의 대영주 두 사람이 우리에게 돌아섰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던 정보였다. 율리아는 겁 많은 귀족들에게 바이칸 제국 내에 남부 연합과 뜻을 함께하는 자들이 있음을 주지시켰다.
“그게 정말입니까?”
회의실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서남부 해상과 항구의 문을 열고, 제국 내에서 황제에게 반대하는 세력의 주축이 되어 움직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황제를 끌어내려 데네브라를 섭정으로 세우겠다는 소리였다.
“또한, 북부 연합이 우리와 함께 움직일 것입니다.”
율리아가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급하게 숨을 삼키며 몸을 들썩이는 자도 있었고, 저들끼리 이게 다 사실이냐고 따져 묻는 자도 있었다.
그래도 율리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데네브라 황비의 친정 가문과 그 세력, 남부 해적과 상인연합, 시에라와 록스의 왕족들, 그리고 독립을 염원하는 정복 국가의 영웅들이 모두 전하께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 모든 걸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말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쳐 운명이 되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남부의 칼 아래.”
율리아는 그냥 이 모든 게 당연하게 일어날 일인 양 담담하게 선언했다.
“바이칸은 무너질 것입니다.”
* * *
“폐하, 너무 늦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주무셔야 합니다.”
호르헤가 염려를 가득 담아 말했다. 주름과 검버섯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세노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르헤, 너는 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폐하께 쓰임을 다 하고 죽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재미없는 놈.”
크세노가 커다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그의 손엔 북부 주술사들이 피운다는 독한 담배가 들려 있었다.
방 안 가득 매캐한 연기가 들어차, 호르헤가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추워. 닫아라.”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어차피 오래 못 산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 대적자는 무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여자야. 제 계획이 조금만 틀어져도 다음을 기약하면서 벼랑에 몸을 던질지도 모른다니까?”
“세상에 그런 자가 있다는 게 참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크세노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도 한동안 그렇게 믿었다며, 불쌍하고 박복한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미친 여자였다고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항상 살아 있었어. 늙은이가 오래도 살아남는다고 농담을 건넨 적도 있었지.”
“다 폐하의 은덕입니다.”
“거짓말하지 마. 네놈이 몸을 잘 사렸기 때문이겠지.”
크세노가 빈정거리듯 던진 농담에 호르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깊은 주름이 옆으로 길어지는 모습을 경이로운 듯 바라보던 크세노가 술잔 가득한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이러다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실 기세라, 호르헤는 황제의 불호령을 각오하고 술병을 치우려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호르헤의 부하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