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아래층에서 들리던 고함이 잦아들었을 때였다. 말없이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율리아가 칼날에 목을 갖다 댔다.
날카로운 칼날에 여린 피부가 베였다. 순식간에 피가 흘러나와 흰 잠옷 위로 뚝뚝 떨어졌다.
“뭐 하는……!”
율리아는 당황한 남자가 자신에게서 칼날을 떨어뜨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죽으려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남자가 칼을 회수하기도 전에 아예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목을 누르고 있던 칼날이 이번에는 그녀의 귀를 베었다.
“이 미친 여자가!”
“모르고 왔어?”
귀에서 미지근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한 손으로 상처를 문지른 율리아가 어느새 그에게서 빼앗은 단도를 손에 들고 말했다.
“네 주인이.”
그러곤 직접 제 목에 갖다 댔다.
“생채기 하나 없이 잡아 오라고 했지?”
당황한 남자가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동료를 부르는 소리였다.
해적들과 약속이 있어 아침 일찍 부두로 나온 카루스는 어쩐지 가슴 한쪽이 울렁거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고 목이 말랐다. 가슴에 물이 차 파도처럼 출렁였다. 율리아와 함께 밤을 보냈기 때문인지, 아니면 방향도 없이 부는 바닷바람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해적 선장들이 모두 서명한 협약서가 카루스의 손에 전달되었다.
“여기 있소.”
“좋아. 그럼 국왕에겐 이렇게 전달하도록 하겠다.”
허울뿐인 협약이라도 문서로 남겨 두는 건 중요하다. 해적들도 그 사실을 아는지 근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카루스는 해적선을 떠나 부두로 돌아왔다. 아침 일정을 마친 그에게 바바슬로프가 다가와 물었다.
“이제 왕궁으로 가십니까?”
바람이 뒤집히듯 요란하게 불었다. 망토를 젖히고 그 안까지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불현듯 율리아의 저택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던 카루스가 훌쩍 말에 올라 말했다.
“아르테 백작의 저택으로 간다.”
“시녀님이랑 같이 가시려고요?”
“아직 왕궁으로 출발하지 않았을 거야. 시간이 이르잖아.”
“그럼 엇갈리기 전에 빨리 가야겠네요.”
바바슬로프도 서둘러 말에 올랐다. 두 사람은 부두 외곽의 한적한 길을 따라 말을 달렸다.
가까운 바닷가였기에 율리아의 저택까지 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루스는 굳게 닫힌 저택 문을 보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평소처럼 경비병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얼른 문을 열어 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택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경비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어?”
바바슬로프가 의아하다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카루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저택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바깥에선 알 길이 없었다. 저택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경비병은커녕 사람의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방향도 없이 부는 바람을 타고 정원 너머 안쪽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닮은 고함이었다.
“바바슬로프!”
카루스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바바슬로프도 그를 따라 말을 세우고 몸을 날렸다.
망토를 찢듯 벗어 던진 카루스가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곤 저택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 정신 차려요!”
트루디가 울고 있었다. 작은 하녀가 죽은 경비병 옆에 주저앉아 그의 가슴을 마구 흔들었다. 복면을 쓴 괴한들이 그런 트루디에게 조용히 하라며 칼을 들이밀었다.
트루디는 악에 받쳐 엉엉 울었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는 괴한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집사가 그런 트루디를 안고 달래었으나 소용없었다.
“닥치라고 했을 텐데.”
화가 난 괴한이 트루디를 붙잡고 칼을 꺼냈다. 그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 나온 트루디가 소리를 질렀다.
“두고 봐! 너희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우리 백작님이 어떤 분인 줄 알고! 이거 놔! 놓으라고! 내 몸에 손만 대 봐! 다 죽일 거야!”
“시끄러워!”
괴한은 트루디를 죽일 셈이었다. 처음엔 머리채를 자르거나 몇 대 때려 입을 다물게 하려 했으나 마음을 바꾸었다.
그때였다. 제발 그러지 말라며 그에게 애원하던 집사가 갑자기 하던 행동을 멈추고 홱 뒤로 물러났다.
열린 창문으로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카루스였다.
“카루스 님!”
카루스는 가장 먼저 트루디를 죽이려던 자에게 달려들었다.
괴한이 칼을 꺼내 들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단칼에 그에게 목이 잘릴 뻔했다. 칼과 칼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뒤이어 들어온 바바슬로프가 나머지 괴한들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흩어져서 포위해!”
놈들은 훈련받은 암살자였다. 움직임이 일사불란하고 체계가 있었다.
눈으로 괴한의 숫자를 센 카루스는 바바슬로프 혼자 놈들을 모두 처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하들을 더 데려왔어야 했는데, 후회할 시간이 없었다.
“트루디.”
카루스가 허리띠를 풀어 말없이 던졌다. 거기엔 종류가 다른 단검 두 자루와 살상용 암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가 던진 허리띠를 재빨리 품에 안은 트루디가 집사와 함께 무기를 나눠 가졌다. 눈치 빠른 하녀는 카루스에게 맡겨 달라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카루스가 칼을 크게 휘둘렀다. 그를 막고 있던 괴한은 최선을 다했으나 실력 차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괴한에게 트루디가 달려들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았던 그녀는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깊게 찔러야 사람이 죽는지 잘 알고 있었다.
카루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막아서는 괴한들을 베고, 찌르고, 발로 차서 넘어뜨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급한 마음에 마구 날뛰다 보니 여기저기에 상처가 늘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뒤에선 바바슬로프와 트루디, 집사가 고함을 치며 싸우고 있었다.
“율리아-!”
카루스가 큰 소리로 율리아를 불렀다. 2층에 있을 괴한들에게 들으란 듯, 그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않았다.
“무혈 제독이 올라간다!”
“혼자야! 막아!”
괴한들이 카루스의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바바슬로프의 칼에 맞아 쓰러지는 자도 있었다.
저택이 작은 편이어서 다행이다. 순식간에 율리아의 방에 도착한 카루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막아서는 괴한을 베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목숨을 끊었다.
그러곤 방 안의 광경을 눈으로 훑었다.
율리아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흰 잠옷이 붉었다.
율리아는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그녀의 가느다란 목과 귀에선 여전히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카루스 님.”
카루스는 대답하지 않고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괴한들도 무혈 제독을 상대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동료의 몸을 방패로 써 가며 카루스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싸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카루스가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두 명의 괴한을 베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의 얼굴은 악마 같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굴을 뒤덮었다. 시야를 확보하려 주먹으로 문지른 터라 얼굴 전체가 붉었다.
처음 율리아의 방에 들어와 그녀를 위협했던 괴한이 창가를 향해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여기까지다!”
그는 납치를 포기하고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카루스는 놈들을 단 하나도 살려 보낼 마음이 없었다.
자신은 괜찮으니 그만두라는 율리아의 외침에도 그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이날 율리아의 저택에서 경비병 둘과 하녀 하나가 죽고 바바슬로프가 등에 부상을 입었다.
카루스가 건넨 단도로 괴한에게 덤볐던 트루디는 긴장이 풀리자마자 혼절했으며, 집사는 팔이 부러져 한동안 부목을 대고 다녀야 했다.
혼자서 2층에 있던 괴한을 모두 상대한 카루스는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많아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했다.
소식을 들은 코코가 왕궁 의사를 잔뜩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는 율리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도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상처를 씻고 꿰매는 동안 율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했다.
“황제는 저를 산 채로 잡아 오라고 했어요.”
“산 채로?”
“상처 하나 없이.”
율리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깃든 선명한 투지를 보고, 코코가 소독약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물었다.
“너 무슨 짓 했어.”
“별거 아니었어요.”
방에 있던 사람이 모두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치료를 마친 카루스도, 누워서 끙끙 앓던 바바슬로프도 모두.
율리아는 그들에게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댔던 괴한을 역으로 협박해 무기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가 제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니까 눈에 띄게 당황했어요. 피가 좀 났을 뿐이지 그리 대단한 상처가 아니었는데도 몸을 크게 뒤로 물릴 정도로 거리를 벌리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봤죠. 황제가 그렇게 시켰느냐고.”
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의 침묵에서 확신을 얻었다.
“칼에 목을 들이대니까 무기를 놓치고, 귀를 베었더니 화들짝 놀라 물러났어요. 그냥 산 채로 잡아 오라는 수준이 아니라, 제 몸에 생채기라도 하나 났다간 되려 그들이 대가를 치러야 했을 거예요.”
“그 정도라고?”
“네.”
율리아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