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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화 (256/319)

224화

“카루스 님이 해적들을 잔뜩 데리고 나타난 데다 남부 연합의 덩치가 커지니까, 그동안 시끄럽게 굴었던 친제국파 귀족들이 다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대요.”

“레위시아가 발 좀 뻗고 자겠군.”

“적국을 옹호하거나 이적행위利敵行爲를 하는 자는 작위를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죠.”

“그 정도로 되겠나. 나 같으면 본보기로 한 놈 잡아서 처형대에 세웠을 거야.”

“지금은 공포보단 희망을 줘야 하는 시기니까요.”

카루스는 율리아의 말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레위시아는 왕이 되고, 자신은 군인으로 남는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함께 술잔을 나누었다. 추울 때일수록 잠을 잘 자야 한다며 집사가 권유한 술이었다. 독하진 않으면서 은근히 향이 좋았다.

벽난로 앞에 앉아 말없이 불꽃을 바라보는 율리아에게 카루스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 봐.”

알렉사가 보낸 편지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었는지 그가 다시 물었다. 알렉사 성격에 아무 용건도 없는 안부 편지를 보냈을 리도 없고, 그는 율리아가 일부러 말을 돌린다는 걸 모를 만큼 눈치 없지도 않았다.

“그냥 모른 척해 주시면 좋을 텐데.”

“안 된다는 걸 알잖아.”

율리아가 한숨과 함께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곤 불쏘시개로 벽난로 속 장작을 뒤적거리다 물었다.

“다른 사람의 심장을 찌르는 느낌은 어떤 거예요?”

“뭐?”

“카루스 님.”

장작이 툭 부러지며 불꽃이 한차례 춤을 추었다.

“제가 황제를 죽일 수 있을까요.”

* * *

잠든 율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는 카루스의 머리 위에 달빛이 쏟아졌다. 창백한 달을 몸에 두른 그는 검다 못해 푸르스름했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이불을 멀거니 바라보던 그가 손을 뻗어 커튼을 쳤다.

달빛마저 차단된 방엔 그저 어둠뿐이었다. 트루디가 켜 놓고 간 등불은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카루스는 가만히 앉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등불을 다시 밝히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잠든 줄 알았던 율리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절 만난 걸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과거의 기억에 혼란스러워하는 여자.”

율리아는 그녀가 만약 카루스였다면 절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고 속삭였다.

“사랑은 전쟁하고 닮았어요. 만만한 상대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그렇잖아요. 내가 준 것보다 더 많은 걸 받고 싶어 할 텐데.”

“난 아냐.”

카루스가 웃으며 등불에 불을 밝혔다. 캄캄했던 방에 은은한 불빛이 춤을 추었다.

율리아는 어느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저는 당신한테 줄 게 없는데.”

“누가 달라고 했나.”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당신이 가진 걸 빼앗기만 해도?”

율리아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카루스는 그녀의 손을 감싸듯 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어스름한 불빛을 등지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빼앗긴 건 아무것도 없어.”

“카루스 님.”

“내 마음은…….”

카루스가 고개를 숙여 율리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댔다. 제법 길어진 그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율리아의 뺨을 간질였다.

“내 것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없었다. 있는 줄도 몰랐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너를 만나고, 너를 알게 되고, 네게 속한 뒤에나 그런 게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네가 내 것을 빼앗은 게 아니라, 기적처럼 만들어 준 것이다.

사랑은 전쟁과 다르다. 카루스가 속삭였다.

전쟁은 한쪽의 의사만으로도 할 수 있지만, 사랑은 절대 그럴 수 없으니까.

“고통스럽고 불안해.”

카루스가 진심을 말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광기와 슬픔이 교차하지.”

“카루스 님.”

“근데 난 어떻게 해야 이걸 이겨 낼 수 있는지 알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웠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입술 위에서 나비가 춤추는 것 같았다. 율리아는 어쩌면 자신이 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카루스가 고백하듯 속삭였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저는…….”

“더 깊이 사랑하면 되더라고.”

그러면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광기는 물러가고 온화함이 남았다. 슬픔은 그대로 설렘이 되었다.

그렇게 중독되었다.

“율리아.”

카루스가 말했다.

“넌 황제를 죽일 수 있어.”

율리아가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입에서 믿을 수 없이 달콤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도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은.

그를 품에 가두자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칠 때마다 언제나 나를 살리는 남자.

당신이라면 그 덧없는 감정에 빠져 죽어도 좋아.

* * *

겨울의 아침이 밝았다.

부지런한 트루디가 가장 먼저 일어나 부엌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저택에서 잠든 율리아를 위해 따뜻한 수프를 끓여 볼 생각이었다.

다른 하녀들에게서 비장의 요리법까지 배운 트루디는 흰 앞치마를 팡팡 털어 허리에 맸다. 그러곤 그녀보다 조금 늦게 하루를 시작하는 집사를 보곤 기운차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집사님!”

“트루디, 부지런하구나.”

집사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월급은 올려 주지 않을 거야. 아르테 백작님은 이미 고용인들에게 너무 많은 월급을 주고 있어.”

“월급 올려 달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요!”

“농담이다.”

“집사님은 제가 얼마나 부자인지 모르죠? 제가요, 어떤 사람이냐면요. 취미로 하녀 일하는 사람이라고요!”

“굉장하네.”

집사가 하하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밤새도록 일한 경비병에게 인사를 건네러 나가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정원에 나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카루스 님?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집사가 깜짝 놀라 카루스에게 다가왔다.

카루스는 막 저택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율리아가 곤히 자고 있어 깨울 수 없었다며, 그는 일이 많아 먼저 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침이라도 함께 드시지요. 백작님께서 좋아하실 텐데.”

“해적들과 약속이 있어.”

집사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찡그린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카루스는 그런 그에게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마차를 타고 율리아의 저택을 떠났다.

아침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율리아가 아침을 잔뜩 먹는 타입도 아니고, 아직 그녀의 저택엔 일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율리아의 늦잠이 길어지고 있었다.

트루디가 따뜻한 수프를 다 끓인 뒤에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다리던 집사가 다른 하녀들과 먼저 식사를 마친 뒤에도 소식이 없었다.

“이러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겠어요.”

“깨워 드려야겠지?”

“제가 갈게요.”

트루디가 앞치마를 벗고 율리아의 침실로 올라갔다.

조용한 복도엔 인기척이 없었다. 언제나 하녀들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던 율리아가 이렇게 늦게까지 잠을 자다니,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백작님, 그만 일어나세요.”

트루디는 율리아의 침실과 욕실을 마음껏 드나드는 유일한 하녀였다. 허락은 없었지만 깨워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녀는 두어 번 노크한 뒤에 그냥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지 마!”

율리아였다.

화들짝 놀란 트루디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하지만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배, 백작님…….”

웬 남자가 율리아를 뒤에서 제압하고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율리아는 잠옷 차림이었다. 자다가 일어났는지, 그녀의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들어와 온몸이 떨렸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분명 잘 잠가 두었는데, 부서진 자물쇠가 눈에 띄었다.

율리아가 트루디에게 말했다.

“괜찮아. 넌 내려가 있어.”

“백작님!”

그때 율리아의 목에 칼을 대고 있던 남자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을 거야. 네 주인이 죽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지 않다면.”

“저, 저는…….”

“트루디.”

율리아가 트루디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목에 칼이 닿아 있는데, 율리아는 너무 침착해 보였다. 온몸을 벌벌 떨던 트루디도 그녀와 눈을 맞추자 가슴에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차분해졌다.

때마침 아래층에서 집사의 고함이 들렸다. 바깥에도 침입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율리아가 말했다.

“트루디, 난 괜찮으니까 모두 가만히 있으라고 해.”

그러곤 자신을 위협하는 남자에게도 경고했다.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마시죠. 원하는 건 저잖아요?”

“그러지.”

소란을 일으켜 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와 한 번 더 눈을 맞춘 트루디가 이를 악다물었다. 덜컹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내리누르고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그동안 율리아의 그늘에서 너무 편하게 살아 잊고 있었지만, 트루디는 오르테가의 가장 더러운 뒷골목에서 악과 깡으로 살아남은 아이였다.

율리아가 다시 명령했다.

“트루디, 네가 할 일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모두에게 반항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전하는 거야. 그래야 아무도 다치지 않을 테니까.”

“네.”

“나는 괜찮아.”

거짓말. 트루디가 다시 이를 악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기도 데려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율리아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치마를 꽉 움켜쥔 트루디가 몸을 홱 돌려 복도로 달려 나갔다.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녀의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저 귀여운 하녀와 집사를 소중히 여긴다면.”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율리아를 잡아당겼다. 그의 손엔 끈과 재갈, 머리에 씌우려는지 자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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