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하지만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저택에 도착한 율리아가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가 달려 나와 알렉사에게서 온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읽는 율리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평소보다 더 차가운 눈빛이었다. 숨을 쉬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율리아가 말했다.
“트루디.”
“네, 백작님.”
눈치 빠른 트루디가 서둘러 서재 문을 열고 그녀를 혼자 있게 해 주었다.
식사는 취소되었다. 집사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갖다주었지만, 율리아는 거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편지를 올려놓고 하염없이 그걸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황제를 죽여라.”
황제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고 그의 피를 뒤집어쓰면 저주를 완성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이 빌어먹을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황제가 원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그가 신이 되고 싶어 할 거라는 건 사실 반쯤 추측이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왕이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 제정일치를 이루려 했으니까, 그도 그렇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 반대로도 해석할 수 있어.’
율리아가 다시 편지를 바라보았다.
알렉사의 글씨인 건 확실한데 평소보다 굵기가 일정치 않고 흔들림이 있었다. 율리아는 그녀가 이 편지를 쓰면서 무척 혼란스러워했음을 알았다.
아마 알렉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황제가 일찍이 저주를 완성했다면 나도 진작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구나.’
율리아가 이렇게 생각하리란 걸.
복수를 이룬 뒤에 황제의 손에 죽어야겠다. 황제에게 달려가 내가 네 대적자이니 내 심장을 찔러 나를 잡아먹으라고 외쳐야겠다.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매달려야겠다.
네 번째의 율리아라면.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번째의 율리아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내 손으로 나를 죽여도 벗어날 수 없었던 굴레이니, 방법을 찾은 것만으로도 기뻐 날뛰었으리라.
‘죽을 수 있었어.’
율리아가 편지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종이에 깃든 알렉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어쩌면 이 편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벽난로 안에서 불꽃이 춤을 추었다. 편지를 들고 벽난로 앞으로 걸어간 율리아가 붉은 열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 아르테.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편지가 툭 떨어져 불꽃에 몸을 맡겼다. 다 떨어지기도 전에 반쯤 타 재가 되어 버린 편지를, 율리아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언제든 원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라니, 그런 건 갖고 싶지 않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없다. 너무 힘들었다. 너무 최선을 다했다. 고통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황제를 죽여라.”
다짐하듯 중얼거린 율리아가 한 손으로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을 더듬었다. 이 단단한 뼈 안에 무른 심장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삼킨 저주가 깃들어, 그녀를 계속 다시 살게 한 심장.
* * *
남부 연합의 수뇌가 된 카루스는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고작 편지 한 장을 전달하기 위해 멀리서 왔다는 쾌속선이 연일 오르테가 항구에 밀려들기도 했다.
늦은 시각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카루스에게 바바슬로프가 다가와 말했다.
“해적들이 드추바로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데요.”
“왜?”
“여기 있기 면구하답니다.”
“미친놈들인가.”
“자기들은 섬세하다면서, 제발 드추바로 가게 해 달래요.”
“안 돼.”
카루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적들이 오르테가에 버려 둔 가족들은 카루스에게 일종의 인질이었다. 그러니 되도록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모습을 보게 하는 편이 좋았다.
그리워했던 자들은 그리움을 달래고, 증오했던 자들은 화를 내야 할 것 아닌가.
“알렉사 시녀님이 맥스웰을 통해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곧바로 율리아 시녀님한테 갖다 드리긴 했는데, 가서 무슨 내용인지 말씀 나눠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게 언젠데?”
“오늘 저녁이었습니다.”
“마차 대기시켜.”
카루스는 벗었던 외투를 다시 걸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율리아의 저택으로 가는 길, 창밖의 어둠이 깊어졌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카루스는 바다 한복판에서 만났던 해적 선장들을 떠올렸다.
배가 한 척인 선장도 있었고, 여러 척인 선장도 있었다. 선장들의 선장이라 불리는 늙은 해적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악명 높은 범죄자였기에, 카루스는 해전까지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그는 대포 앞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무장하게 했다. 만약 해적들이 먼저 공격해 온다면, 그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남부 해상을 텅 비우려고도 했다.
해적들은 남부 함대의 신임 제독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자, 처음엔 코웃음 치며 돌아가라는 답변만 전해 왔다.
다시는 너희와 거래하지 않을 거라며, 군인이라는 놈들이 돈만 밝히는 귀족의 허수아비가 아니냐고 조롱했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고자 하는 이가 무혈 제독이라는 걸 알고 난 뒤에는 태도가 싹 바뀌었다.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해적 선장들이 차례로 카루스의 기함에 올랐다. 그들은 위명 자자한 바다의 영웅을 보러 왔다며 호탕하게 인사를 건네거나, 말없이 카루스를 노려보며 그의 실력을 가늠했다.
카루스는 긴 시간 동안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르테가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었다. 남부에서 활동하는 해적들은 전부 오르테가 항구에 거래처가 있었다.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비자금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누군가는 숨겨 놓은 비자금을 위해, 누군가는 황제를 죽이고 싶어서.
그들은 카루스의 손을 잡았다.
믿음직한 아군은 아니었다. 카루스는 그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남부 함대와 함께 싸우게 할 수도 없었고, 육지로 올려보낼 수도 없었다. 해적에게 등을 맡기고 싸우려는 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
그러다 그는 율리아와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오르테가에 있어.”
“그래서 황제를 배신한 거군?”
“해적의 딸이지.”
해적 선장들은 흥미로워했다. 카루스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큰소리로 웃기도 했다.
해적의 딸이라니, 감당할 수나 있겠냐고 그를 놀리는 자도 있었다.
“아버지가 어린 딸을 보육원에 버리고 떠났어. 굶어 죽을 수는 없어서, 처형당한 해적들의 주머니를 뒤지며 살았다고 하더군.”
“잘했군. 잘했다고 전해 줘. 죽은 놈들 주머니에서 뭐라도 나왔길 빈다고, 참 다행이라고.”
해적들은 카루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에게 대단한 화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정복 전쟁 당시 겪었던 일이나 황제와의 싸움에 대해 말할 때는 모두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난 군인이며, 기사다. 이제 와 너희와 손을 잡고 함께 살 수는 없어. 이미 지은 죄를 용서해서도 안 되지.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다.”
“우리도 그런 건 바라지 않아. 해적은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에서 죽는 거야. 육지는 너희들이나 나눠 가져.”
“우리는 황제로부터 자유를 되찾을 거야.”
“나쁘지 않군.”
선장 중엔 나이가 지긋한 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새하얗게 변한 머리카락과 수염을 아무렇게나 길어 늘어뜨리고, 얼굴까지 흉터로 뒤덮여 본래의 이목구비를 잃어버린 자였다.
선장들의 선장이라는 해적. 그가 카루스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해적의 딸을 사랑할 운명이라서 그랬던 거야.”
“뭐가.”
“바다에서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거, 언제나 승리만을 이뤄 왔던 거, 무혈 제독이라 불리게 된 거.”
바다가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그게 가능했을 것 같냐고, 그가 웃으며 물었다.
카루스는 그들이 믿는 미신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으나,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다.
율리아는 바다 같은 여자니까.
생각을 멈춘 그가 자신의 손을 펼쳐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에 피가 돌아 아지랑이 같은 온기가 맴돌았다.
어쩌면.
저주는 주인을 잘못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마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 주었다. 카루스 그에게 수고했다며 금화를 건네주곤 율리아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율리아는 늦은 밤 갑자기 찾아온 카루스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편지의 내용을 묻는 카루스에게 의뭉스럽게 웃어 보이곤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며 함께 먹겠냐고 물었다.
“여태 뭐 하고 있었어?”
“트루디랑 부둣가에 나갔다 왔어요. 해적선에 고기와 술을 보내려고 금화를 잔뜩 풀었죠.”
그건 해가 지기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율리아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함께했다.
“코코가 황제의 측근을 감옥에 가둬 놓고 얼마나 괴롭혔는지, 그가 바이칸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전부 팔아 몸값으로 낸다고 했대요. 제발 풀어 달라면서요.”
“황제한테 쪼르르 달려갈 게 뻔한데, 코델리아 시녀장이 풀어 주겠나.”
“코코는 좀 혹한 것 같았는데요? 데네브라 황비가 그러는데, 돈이 아주 많은 귀족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이름이 뭐라고?”
율리아가 그 귀족의 이름을 알려 주자, 카루스가 먹던 고기를 얼른 삼키고 웃었다.
“시기를 봐서 풀어 주라고 해. 놈의 재산이라면 오르테가에 왕궁 하나는 새로 지을 수 있을걸.”
“왕궁 하나?”
“왕궁 전체.”
그렇다면 정말 풀어 주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며 율리아도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