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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화 (254/319)

222화

46. 우리, 노여워 말아요

“거기 귀족 아가씨! 그쪽으론 안 가는 게 좋을 거요.”

“왜요?”

“해적들이 저기서 죽치고 있잖아. 어휴, 말도 마쇼. 아내들이 죄다 부두로 뛰어나와서 뭐 하러 돌아왔냐고 하도 소리를 질러 대니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오.”

“두 손 들고 반기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런 집보단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욕하는 집이 더 많지. 해적질해서 그깟 돈 얼마나 벌었냐고, 다시 바다로 나가서 확 뒈져 버리라고들 하던데.”

“곧 진정할 거예요.”

“새끼들이 아비 얼굴을 모르니까 아주 가관이야. 너희 아빠는 선장이냐, 우리 아빠는 갑판장이라더라. 누가 높은 사람이냐. 그딴 소리나 해 대고.”

어부들이 말세라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얼굴엔 약간의 웃음기와 안도감이 묻어나 있어, 율리아는 피식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뭍에 올라오진 않나 봐요.”

“놈들도 염치가 있겠지.”

율리아가 행상인으로부터 담뱃잎을 사서 어부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들은 기뻐하며 부둣가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곤 여전히 수평선에 늘어 서 있는 해적 선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귀족 아가씨, 저놈들이 우리를 위해 싸워 줄 거라는 게 사실이오?”

“네.”

“진짜요? 오르테가를 지키기 위해서 저 무서운 황제를 상대로 싸울 거라고?”

“네.”

율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부들은 믿기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연신 바다를 흘깃거렸다.

“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가족은 지킬 수 있잖아요.”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라 그렇다. 배운 것도 없고, 태어나기를 비천하게 태어나서.

그동안 칼 들고 사람을 해치면서 살아 차마 가족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바다 위를 전전했지만, 칼 들고 사람을 해치는 일로 가족을 지킬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해적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뭍에 올라와 어울려 살지도 못할 것이다. 이미 지은 죄는 무슨 수로도 돌이킬 수 없다.

저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도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저렇게 어중간한 위치에 배를 대 놓고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마음이 복잡하고만…….”

어부들이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카루스는 이게 그렇게까지 낭만적으로 해석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만난 선장 중에는 카루스와 레위시아가 제안한 전후 보상에 이끌린 자도 있었고, 자유 항로를 따라 바이칸 서부로 올라가 해적 왕국을 세우겠다며 허풍을 떠는 자도 있었다.

누군가는 복수심에, 누군가는 그저 싸움이 좋아서 나서기도 했다.

그래도 율리아는 이 사람들에게 낭만적인 얘기만 해 주고 싶었다.

“술이라도 갖다주세요. 그 작은 고깃배로 저렇게 큰 물고기를 낚을 정도면, 해적선 따위는 하나도 안 무섭겠네요.”

“하하하하! 나는 물고기가 무서워서 해적질이나 하는 놈들이랑은 수준이 다르지. 이 몸은 혼자서 참치도 잡는다고!”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요?”

“국왕 전하께서 내리시는 거예요.”

율리아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도도한 얼굴로 그녀의 뒤에서 대기하던 트루디가 재빨리 튀어나와 어부들에게 금화를 나눠 주었다.

주머니의 묵직한 무게에 놀란 어부들이 담배 연기를 잘못 들이마시곤 콜록거리며 물었다.

“쿨럭! 으헉…… 전하께서 우리한테 이걸 주셨다고요?”

“해적선으로 술과 음식 좀 가져다주세요. 용감한 고깃배 선장님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율리아가 뒤로 길게 이어진 부둣가를 가리켰다. 왕궁에서 나온 시녀와 시종들이 치안대 병사들과 함께 부두를 오가며 돈을 나눠 주고 있었다.

인근 음식점과 주점의 사장들이 가게 창고를 활짝 열었다. 무섭다며 질색하는 일꾼들을 다독이는 목소리도 들렸다. 커다란 술통이 연이어 배에 실렸다.

가끔 그런 자들을 욕하며 혼내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해적 따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냐며, 죄다 한통속이고 쓰레기들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부두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 온 술집 주인들이 나섰다. 그들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화내는 사람의 팔짱을 끼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술잔 가득 술을 채워 주었다.

“말세야, 말세.”

어부들이 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율리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려던 때였다. 트루디가 그녀의 망토를 쥐고 방정맞게 잡아당겼다.

“백작님, 백작님! 저기 좀 보세요!”

“응?”

“저기요. 저 사람들이요. 보이세요?”

트루디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기가 번졌다. 율리아도, 어부들도 트루디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웬 여자들이 몰려와 작은 고깃배 선장에게 짐 보따리를 내밀고 있었다.

“아저씨, 그레모리호로 가시는 거죠? 거기 토마스라고, 대머리에 인상 더러운 남자가 있어요! 그 자식한테 이것 좀 전해 주세요. 술에 담근 과일을 좋아해서, 뒈지기 전엔 아마 이걸 먹고 싶어 할 거예요.”

“제 남편 이름은 램이에요. 딱히 보낼 건 없는데, 제 말 좀 전해 주세요. 처자식 버리고 쳐나가서 잘 먹고 잘살았냐고, 저는 새 남편 만나서 잘 산다고 해 주세요. 애들도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서 괜찮다고요! 그러니까 우린 괜찮다고요!”

“저희 아버지는 폴이에요! 엄마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도 엄마는 끝까지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았으니까,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 해 주세요. 그렇다고 우릴 찾지는 말고요!”

“이건 빌어먹을 동생한테 저희 부모님이 쓰신 편지예요. 꼭 전해 주세요, 예?”

원망인지 원한인지, 그리움인지 슬픔인지. 그들의 감정은 너무나 복잡하게 깊어 감히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애꿎은 고깃배에 남편의 짐 보따리를 내던지며 욕을 하거나 바다에 침을 뱉는 여자도 있었다.

과거를 숨기고 새 남편을 만난 여자들은 그 사실을 들킬까 싶어 자기가 죽었다고 전해 달라며 돈을 건네기도 했다.

트루디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저걸 받는 해적들의 얼굴이 보고 싶네요. 그렇죠, 백작님?”

“그러게.”

“아저씨들! 저것들 갖다주고 나서 어땠는지 얘기해 주세요. 막 울지도 모르잖아요. 너무 궁금하다.”

어부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해적들의 반응이 못내 궁금했는지, 서둘러 배 위에 짐을 올렸다.

사절단으로 왔던 바이칸 서남부의 귀족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황제의 사생아를 찾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독립을 꾀하려는 시에라와 록스의 왕족들을 지원하겠다고 맹세했다.

데네브라의 사촌은 침략군 지휘관이라 풀어 줄 수 없었다. 그 대신, 그의 측근 중 몇몇이 데네브라의 친정 가문으로 돌아가 황비의 의사를 전달하고 힘을 모으기로 했다.

부두를 떠난 율리아는 왕궁이 아니라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 트루디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벌써 겨울이에요.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죠? 저는 아직도 20대 초반인데 30대, 40대가 되면 얼마나 더 빠르게 느껴질까요?”

“그땐 또 그때의 느낌이 있겠지.”

“예전에 일하던 조직에서 어떤 할머니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거든요. 나이를 먹을수록 꽃은 예쁜데 사람은 못나 보이고, 길가에 돌멩이도 쓰임이 있는데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그렇대?”

율리아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재밌어하자, 잔뜩 신이 난 트루디가 발랄하게 수다를 이어 갔다.

“며칠 전엔 정원사 아저씨들이랑 같이 차를 마셨는데, 다들 집에 들어가기가 그렇게 싫다는 거예요. 자식들은 밖으로만 나돌아다니고, 아내는 그런 자식만 쫓아다닌대요. 아저씨들 마음 알아주는 건 기르는 개밖에 없다고.”

“너는?”

“네?”

“트루디, 네 마음은 누가 알아줘?”

율리아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트루디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저는…… 백작님이 있잖아요.”

“나?”

“저한테 분수에 넘치는 돈도 주시고, 그걸 잃어버리지 않게 관리해 주시고, 게다가 거주지에 일자리까지 주셨는데.”

“나야 네 고용주니까.”

“백작님이 아니었으면 전 이미 어딘가에서 맞아 죽었을 거예요. 좀도둑 거지 부랑아가 어디서 이렇게 호강하고 살겠어요.”

트루디라면 어디에서든 야무지게 잘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율리아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백작님은요?”

“응?”

“백작님 마음은 누가 알아줘요? 저나 집사님한테는 말씀도 잘 안 하시잖아요. 왕궁에는 코코 시녀님도 있고, 전하고 있고, 알렉사 시녀님도 있지만……. 그런데 저택에서는 유난히 말씀이 없으세요.”

내가 그랬던가.

율리아는 최근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았다. 생각할 일이 많다 보니 저택에서는 되도록 혼자서 쉬고 싶어 했던 것 같았다.

왕궁에서는 쉴 수가 없었다. 레위시아, 코코와 함께 상의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데다 데네브라를 혼자 내버려 두기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식사도 혼자 하고, 산책도 혼자 했다. 늦게까지 깨어 있더라도 혼자 있고 싶어 했다.

트루디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자, 율리아가 충동적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다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정말요?”

트루디가 꽥 소리를 지르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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