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두를 순찰하던 치안대 기사들이, 상인연합 간부들이, 부둣가에 사는 귀족들이 한꺼번에 달려와 왕을 찾았다.
“큰일 났습니다! 배들이, 배가……!”
“전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예? 남부 함대가……!”
레위시아는 당황했으나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외투를 걸친 뒤에 코코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곤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너희는 가서 데네브라 황비와 사절단을 부두로 모셔라.”
“예, 전하!”
기사와 시종들이 손님을 데리러 움직였다.
가장 먼저 부두에 발을 내린 건 레위시아와 코코, 율리아였다. 뒤이어 데네브라와 그녀의 사촌이 도착했고, 가장 마지막에 온 건 사절단의 귀족들이었다.
중앙 부두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나와 서 있었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앞다퉈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몰려왔다.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고, 누군가는 신을 찾았다.
“저게 도대체…….”
바다에 배가 떠 있었다.
해적선이었다.
수십 척이었다. 거대한 군함과 위협적인 해적선이 나란히 서서 오르테가를 바라보았다.
남부 함대와 해적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조합에 모두가 말을 잃었을 무렵, 해적들이 흰 깃발을 올리기 시작했다.
수십 척에 달하는 해적선에서 동시에 흰 깃발이 펄럭였다. 싸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겁먹은 부둣가의 사람들을 향해 흰 깃발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남부 함대는 그런 해적들을 감시하듯 조금씩 움직였다. 긴 수평선을 따라 해적선과 군함이 번갈아 자리를 잡았다.
장관이었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두 세력의 배가 수평선 위에 나란히 늘어섰다.
카루스의 기함엔 어느새 오르테가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황제가 그토록 저어했던 남부 연합의 발호였다.
* * *
긴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에 발을 내린 카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레위시아가 그를 마중하려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카루스가 거만하게 내민 손을 스스럼없이 잡았고,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카루스가 레위시아에게 눈짓으로 바다를 가리키더니 입술 끝을 한쪽만 올려서 웃었다.
그 얄미우면서 믿음직한 모습에, 레위시아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오르테가에 새 물결을 일으킨 젊은 왕과 무혈 제독이 손을 잡았다.
레위시아는 카루스를 가볍게 끌어안고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카루스는 그에게 예의를 다해 인사를 건네면서도 으쓱거림을 감추지 않았다.
“진짜 성공할 줄 몰랐는데.”
“너는 나를 좀 믿어야 할 필요가 있어.”
“왕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변절자 카루스, 이제 내가 네 왕일 텐데.”
“불만 있으면 덤비시죠, 전하.”
카루스가 결투 신청이라면 언제든 받아 주겠다며 농담을 건네자, 레위시아가 알렉사를 대전사로 고르겠다고 받아쳤다.
“도대체 저 고집불통 해적들을 무슨 수로 설득한 거야?”
“가족을 위해 싸우라고 했을 뿐이야.”
“가족?”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이 전부 오르테가에 살고 있어. 놈들이야 해적이 되었으니 이미 버린 몸이지만, 가족이 살아가야 할 오르테가를 황제가 짓밟게 내버려 둘 거냐고 물었지.”
“정말 그게 다라고?”
“이미 한 번 이긴 상대인데, 두 번 못하겠냐고.”
해적들은 20여 년 전 티타니아 전투를 자신들의 승리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크세노 황제는 정복자가 아니라 도망자였다.
“장관이군.”
놀란 건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데네브라와 사절단은 정말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바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오르테가의 백성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카루스와 남부 함대, 그리고 해적들을 바라보았다.
바이칸의 귀족이라면, 정복 전쟁의 수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절대 카루스 란케아를 적대할 수 없다.
무혈 제독은 영웅이었다. 진짜 정복자였다. 그런 그가 리바이어던에 이어 남부 함대와 해적 세력까지 손에 쥐었다. 오르테가와 남부 연합이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 아마 북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제가 공적公敵이었다.
“전하, 사절단이 황비에게 달라붙었습니다.”
“그렇겠지.”
“자취를 감추려는 자들이 있습니다만.”
“가둬 놓고 감시해.”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사절단은 둘로 갈라졌다. 데네브라의 권유에 마음을 돌린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뉘어 서로를 적대하게 된 것이다.
카루스가 남부 해적 세력을 데려온 뒤부턴 연합에 들어오려는 자들이 더 많아졌다. 뒤늦게 저울질을 끝낸 자들이 새로운 물결 위에 배를 띄우고자 부지런히 노를 저었다.
오래전에 정복당한 국가의 왕족과 더불어 대륙을 아우르는 상인회와 해적 세력, 남부 함대와 북부. 오르테가는 그 중심에 서서 황제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감옥을 더 지었어야 했는데.”
코코가 감옥 복도에 서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동안 왕비궁에 깔아 놓은 수족들을 통해 사절단 중 누가 황제의 충신이고 거짓 협력자인지 파악해 둔 상태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화해를 청하러 온 타국의 사절을 감옥에 가두다니, 이렇게 경우 없는 짓이 어디에 있느냔 말이오!”
“저희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본국으로 돌아가실 수 있게 정중히 모시려고 했죠.”
“그런데 왜 이러는 거요!”
“데네브라 황비 전하께서 여러분을 가두라고 명령하셨거든요.”
코코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없었다. 더없이 담백하고 차분한 설명이었다.
그런데도 사절단은 왠지 그녀가 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데네브라가 폐하를 배신하기로 한 이상, 그 여자는 이제 바이칸의 황비가 아니오! 어서 우리를 풀어 주고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오!”
“안 그래도 한 번 더 말씀드리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방금 그 말, 황비께 그대로 전해 드려도 되겠지요?”
“뭐라고?”
“‘데네브라가 배신한 이상, 그 여자는 바이칸의 황비가 아니다.’”
코코의 말에 사절들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데네브라가 저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어떤 명령을 내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비는 이미 경고했었다. 사지를 찢겨 죽고 싶으냐고.
“왕실 기사들이 여러분의 숙소를 수색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화해의 임무만 행하고 돌아갈 지극히 정상적인 외교 사절이라면, 당연히 황비 전하를 설득해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써 볼 생각입니다.”
“수색이라니…….”
“하지만.”
코코가 동그랗게 말린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돈하며 말했다.
“우리 오르테가에 관한 정보를 몰래 빼돌리려 했다거나, 누군가를 이간질하려 했다거나, 혹은 흉계와 모략으로 우리를 속여 조종하려 했다거나.”
그런 증거가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당신들은 데네브라 황비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다시 인사드릴까요. 코델리아 힌치라고 합니다. 미력하나마 레위시아 국왕 전하를 교육해 왕위에 올린 측근 시녀였고, 지금은 본궁의 시녀장을 겸하고 있죠.”
한때는 악마 시녀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런 건 그냥 별명이니까 그리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가 웃으며 농을 건넸다.
코코가 감옥에서 자신의 특기를 마음껏 뽐내고 있을 때, 율리아는 왕비궁에서 데네브라와 그녀에게 돌아선 제국 서남부의 귀족들을 모아 놓고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구나.”
데네브라가 똑같은 말을 네 번쯤 중얼거렸을 때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귀족 중 하나가 율리아에게 큰 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도대체 언제부터입니까?”
“네?”
“언제부터 기획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사절로 오게 된 건 황비 전하와 드추바 패전 때문이었지만, 그 모든 건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었잖습니까.”
율리아는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해적 세력을 포섭해서 남부 연합의 사냥개로 쓰다니. 기발하고 충격적인 방식입니다. 시에라와 록스의 왕족들도 마찬가지고……. 다른 정복 국가의 잔존 세력도 이 소식을 듣고 나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그런가요.”
“북부와는 이야기가 끝난 것입니까? 설마 북부 연합이 연일 승전을 기록하고 있는 게, 남부의 은밀한 지원 덕분이었습니까?”
그들은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평소라면 멋대로 나선다고 버럭 소리 질렀을 데네브라도 말없이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크세노 황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
“예?”
“2년쯤 전에 황제의 성격이 갑자기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귀족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이내 데네브라를 바라보았다. 데네브라가 그들을 대신해서 말했다.
“알고 있다. 유명한 얘기니까. 백성들은 아니어도 권력에 가까운 자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그때부터예요.”
“뭐가 말이냐.”
“황제는 미쳤어요.”
이 자리에 황제가 있다면 목이 잘려도 열두 번은 잘렸을 법한 말을, 율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녀의 말투가 지나치게 담담했던 나머지 뒤늦게 충격을 받은 귀족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보시오, 아르테 백작.”
“황제는 자신을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간을 뛰어넘어 신이 되려 하고 있어요.”
“뭐요?”
“영생을 꿈꾸고 있죠.”
율리아의 말은 그들에게 충격이었고, 깨달음이었다.
식사를 멈춘 데네브라가 술을 병째로 들이켜고, 귀족들은 말을 잃은 채 기계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