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맥스웰!”
“다 쓰셨습니까? 최대한 빠른 배편으로 보내겠습니다.”
그에게 편지를 건넨 알렉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북부 연합과 전선을 맞대고 있는 정복군의 수장은 누구입니까?”
“얼마 전까진 황제가 친정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자가 사령관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제가 특별히 신임하는 중앙군 최고위 장군이고, 또…….”
“강합니까?”
“강합니다.”
“카루스 님보다 강합니까?”
“예? 아니요.”
맥스웰이 그건 아닐 거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알렉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에게 말했다.
“그 사령관을 죽인 뒤에 복귀하겠습니다.”
“예…… 예? 뭐라고요? 그자는 왜요!”
“전선을 유리하게 만들어 놔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알렉사는 율리아나 코코처럼 머리를 써서 일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젊은 나이에 전쟁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여자였다.
북부 연합이 확실하게 승기를 잡으면 황제는 압박을 느낄 것이고, 그가 율리아를 신경 쓰느라 북부를 포기하면 바이칸에 분열이 일어나리란 것 정도는 알았다.
그리고 율리아가 그걸 원하리라는 것도.
“사령관을 죽이고 복귀하겠습니다. 트리스탄과 함께 이후의 일정을 잡아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시녀님.”
“네.”
“혼자 쳐들어갈 생각은 아니죠?”
알렉사가 아무리 대단한 전사라 해도 겹겹이 보호받고 있는 적의 사령관을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고 운명이 함께해야 가능할 것이다.
맥스웰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눈짓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그러곤 알렉사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아군을 좀 늘리죠.”
“아군 말입니까?”
“네, 합류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 좀 있어서요.”
트리스탄한테 가짜 신분증과 용병패를 좀 더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며, 맥스웰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 * *
황제의 사절단은 오르테가 왕궁에 들어온 뒤부터 자신들이 토끼몰이를 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오르테가는 아주 이상한 곳이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햇볕은 따스한데 바람은 난폭하고, 아름다운 바다엔 무시무시한 전설이 우글거렸다.
시녀들의 겉모습은 예의 바르고 우아한 데 반해 제국의 사절단을 앞에 두고도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시종이나 하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황실과 비교하면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어디에나 그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레위시아 국왕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사절단의 알현 요청을 매번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는 친근하고 호의적이었다. 한데 아무리 이런저런 말로 설득하고 괜찮은 대가를 내밀어도, 생각해 보겠다고만 말할 뿐 좀처럼 확답을 해 주지 않았다.
데네브라 황비는 황제의 사생아 이야기를 꺼냈던 날부터 사절단을 한꺼번에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사절단을 둘 또는 셋으로 쪼개어 만났다. 그날 만날 사람을 그날 지정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절단은 자기들끼리도 누가 언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모여서 머리를 맞대려 해도 누가 고발하거나 변절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답답해 미치겠구나. 그냥 한데 가둬 놓고 나와 손잡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린다고 협박하면 되잖으냐!”
놈들이 금세 마음을 바꾸지 않고 미적거리자, 성격 급한 데네브라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율리아를 불러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닦달했다.
“남부 연합이 태동할 거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지 않느냐.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해!”
“기다리라고 하세요.”
“언제까지?”
“자그마치 황제를 배신하는 일이에요. 그게 그렇게 쉽게 이뤄질 리 없잖아요?”
“그럼 나더러 어떡하라고!”
“최악의 경우엔 전하께서 원하는 대로 해 드릴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사절단을 전부 참수하고 황비 전하의 이름으로 제국에 선전포고하죠.”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시녀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서남부 귀족 중 전하께 호의적인 자들만 골라 초대하세요. 억류된 침략군 지휘관도 부르고요. 전하의 친정 가문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부터 확실히 보여 주죠.”
시녀들이 잽싸게 움직였다.
며칠 뒤 왕궁 하늘에 황제의 새가 나타났다.
온종일 하늘만 쳐다보며 새를 관찰하던 궁수들이 소리 없이 신호를 나누었다. 새가 사절단과 접촉하기 전에 화살을 쏠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에 날려 보낼 때 쏠 것인지 빨리 결정해야 했다.
저 새가 가져오는 황제의 명령서와 다시 날아갈 때 가져갈 사절단의 보고서 중, 무엇을 입수하는 편이 좋은가.
“쏘자.”
한 젊은 궁수가 시위를 당겼다.
궁수들은 깊이 고민할 여유도 없이 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조금만 늦어져도 놓치게 될 것이다. 바람을 찢고 날아간 화살이 정확하게 새를 꿰뚫었다.
새가 낮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해가 졌으면, 바람이 거셌으면, 비라도 내렸으면. 아마 실패했을 것이다.
새의 다리에 매달린 나무통을 떼어 낸 궁수가 소리 없이 왕자궁으로 향했다.
율리아는 궁수들이 가져온 황제의 명령서를 들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지막에 쓰여 있는 이 한 문장 때문이었다.
[율리아 아르테를 보호하라.]
그는 또 죽기 싫은 모양이다. 율리아가 자꾸 비명횡사하니까, 이번에도 그럴까 봐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한 걸음 멀어져서 바라보면 참 재밌는 상황이었다. 서로를 적대하라고 맺어진 대적자인데, 상대가 죽지 않게 지켜야 한다니.
심지어 율리아는 황제를 지킬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죽음에 황제가 원인이었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조급한 건 저쪽이다. 불안해하는 것도 저쪽이다.
“좀 더 멋대로 굴어도 되겠어요.”
“여기서 더?”
레위시아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힌치 백작이 가져온 서류를 읽고 있었는데, 황제의 사절단이 방문한 틈을 타 바퀴벌레처럼 행동을 개시한 친제국파 귀족들의 동향 보고서였다.
그들은 레위시아가 보호 동맹 조약을 파기하자마자 발작하며 튀어나온 참이었다.
율리아는 레위시아에게 친제국파가 사절단에게 뭘 갖다 바치건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쟁은 안 일어나요.”
“진짜?”
“일어나더라도 국지적인 분쟁 정도겠죠.”
“그걸 어떻게 확신해.”
“전쟁은 길어요. 준비하는 데도 오래 걸리고, 수습하는 데는 더 오래 걸려요. 인내심이 필요하죠. 하지만 크세노 황제는 지금 조급하고 충동적이에요. 그게 우리한테 얼마나 큰 이점인지 곧 알게 될 거예요.”
“황제가 뭐라고 했길래 그래?”
“황비를 폐위하는 일이나 남부 연합에 대한 대비책 같은 건 한마디도 없었어요. 그는 사절단에게 다른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율리아 아르테만은 반드시 확보하라고 명령했어요. 심지어 다치지 않게 철저히 보호하라면서.”
“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전하!”
그때 코코가 문을 열고 들어와 레위시아의 책상 위에 한 뭉치의 서류를 올렸다.
“이거부터 처리해 주세요.”
“이게 뭐야?”
“남부 연합에 들어오고 싶다는 자들의 명단이에요.”
레위시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들고 있던 서류를 내팽개치듯 던진 그는 재빨리 코코가 가져온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서류에 얼굴을 파묻은 채 집무실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시에라? 이 나라 아직 안 망했어?”
“망하긴요. 거기 왕족들이 끈질기고 독한 성미로 유명하잖아요. 제국에 충성하는 척하면서 뒤로 군비를 벌고 있었대요.”
“록스는?”
“그 나라 국왕이 자식이 열둘인가 그랬잖아요. 그 자식들을 전부 제국에 반대하는 자들과 결혼시켰대요. 혼인 외교에 성공해서 가족 세력이 된 거죠.”
“다 남부 연합에 들어오고 싶대?”
“제국 내에서 독립을 준비하던 자들이잖아요. 우리보다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어요.”
“하.”
레위시아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에 물감처럼 번져가는 감동의 기운을 읽어 낸 코코가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징그럽게 쳐다보지 마세요.”
“뭐? 내 얼굴이 징그러워?”
“그건 다 아버지…… 힌치 백작께서 상인연합과 함께 이뤄 낸 성과니까 그분한테 가서 그 징그러운 얼굴 보여 줘요.”
“백작은 무서워!”
레위시아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가을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사절단과 데네브라, 레위시아 국왕의 기 싸움이 절정에 달했다.
이쯤 되자 사절단의 귀족들도 의견이 같거나 믿을 수 있는 자들끼리 파벌을 이루었고, 황제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자들은 새가 날아오지 않아 몹시 불안해했다.
레위시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의 태도는 늘 한결같았다. 다정하고 친근한 그의 태도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오르테가에서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그와는 달리 인내심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데네브라가 율리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남부 귀족들을 찾아가 패악을 부렸던 어느 날이었다.
부두에서 급보가 도착했다.
“전하, 국왕 전하! 당장 부두로 나가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