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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화 (251/319)

219화

해적들은 어떤 협박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육지로 끌려간 뒤에는 계속 어부 행세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바바슬로프는 그들을 치안대에 넘길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냥 나랑 몇 마디 수다나 좀 떨다 가라니까? 궁금했던 거 다 해소되면 풀어 준다고 했잖아.”

“그걸 누가 믿습니까.”

“안 믿을 건 또 뭐야. 우리가 너 같은 피라미 몇 명 끌고 가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여기까지 사흘이나 걸려서 나왔는데 네놈들 처형대에 세우려고 우리가 저 먼 길을 다시 돌아가겠냐?”

“해적을 소탕하려고 나온 거면서!”

“아닌데?”

바바슬로프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하하 웃었다.

“덤비지도 않는 남부 해적이랑 싸워서 뭐 해.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무슨 자원봉사자들이냐? 남의 나라에 와서 아무 이득도 없는 싸움에 목숨 걸게?”

“그럼 왜 여기까지 나와서 이러는 겁니까.”

바바슬로프가 놈들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러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 바다의 환초.”

거칠게 요동치던 해적들의 숨소리가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그 보석이 남부 해적들 손에 있다고 들었거든. 무혈 제독께서 그걸 원하시니까, 너희가 좀 찾아 줘야겠다.”

당황한 해적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벌떡 일어난 카루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삐딱한 다리에 한 손은 허리에 있었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그가 해적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 보석을 찾는 자는 소원을 이룰 수 있다던데, 너희도 알고 있나?”

“그야…… 뭐, 주워들은 정도.”

해적들은 협조적이었다. 카루스가 해적을 소탕하러 바다에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이해했는지, 이후부터는 바바슬로프가 질문하는 대로 순순히 대답했다.

포승줄에서 풀려난 그들은 카루스의 배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른 채 선실 안에서 술을 얻어 마셨다.

바바슬로프가 커다란 잔에 독한 술을 가득 부으며 말했다.

“그렇군! 남부의 해적들이 원하는 건 오르테가가 아니라 서북부로 향하는 옛 항로란 말이지?”

“해적은 바다를 떠돌아야 하는데 양어장 물고기처럼 한데 처박혀 있으니……. 뭐, 그렇습니다.”

“그럼 20년 전에 티타니아까지 올라와서 제국군과 싸웠던 것도?”

“황제가 자유 항로에 멋대로 이름을 붙이더니 제국령이라고 했으니까.”

바다는 자유 영토여야 한다. 크세노의 정복욕을 막지 않으면 육지는커녕 바다에서도 쫓겨날지 모른다. 해적들은 그래서 참전했었노라고 말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한 해적이 카루스에게 물었다.

“푸른 바다의 환초는 왜 찾으려고 합니까?”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어서.”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황제를 죽이고 점령당했던 옛 왕국들을 독립시키는 거다.”

“뭐라고요?”

해적들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진심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카루스가 피식 웃더니 그들의 술잔에 직접 술을 부어 주었다.

“나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 것 아닌가. 황제한테는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있어. 그러니 우리가 푸른 바다의 환초 정도는 손에 쥐어야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황제한테…… 뭐라고요?”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 저주는 한 쌍이고, 서로를 대적자로 여긴다며.”

카루스가 다시 물었다.

“너희가 믿는 건 뭐냐. 처형당하는 것보다 동료한테 쫓기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는 뭐지? 또 이상한 미신이 원인인가?”

해적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숨과 함께 무거운 입을 열었다.

“가족 때문입니다.”

“……뭐?”

“우리 중엔 오르테가에 가족을 두고 온 놈들이 많습니다. 동료를 배신하면 그 동료가 가족을 찾아갈 테니까…… 차라리 나 혼자 처형되는 게 낫지요.”

그런 거였군. 카루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 하나만 하자.”

“뭡니까?”

“너희 선장을 만나고 싶다.”

* * *

알렉사가 등에서 긴 검을 뽑아 들었다. 칼바람 계곡의 전사들처럼 긴 천을 둘둘 감아 얼굴을 가린 그녀는 북부 진영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용병이었다.

알렉사가 소속된 건 평원을 빙 둘러 다니며 제국군의 움직임을 읽는 정찰 부대였다.

본래는 용병들의 변절과 탈영을 우려해 외부인에게 맡기지 않는 임무였으나, 트리스탄이 북부 진영의 지휘관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알렉사는 합류한 지 열흘도 안 되어 정찰 부대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멈춰라!”

적군이 물러나 텅 빈 평원을 가로지르던 알렉사가 칼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 아지랑이 같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적의 정찰병이다. 암행이 특기인 것 같으니, 섣불리 다가가지 말고 포위해!”

동료들에겐 조심하라고 말해 놓고, 그녀는 저 혼자 놈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또, 또, 또 저런다!”

트리스탄이 간신히 욕지거리를 삼키며 그녀를 따랐다. 맥스웰은 나머지 병사들과 함께 알렉사의 명령대로 포위 대열을 짰다.

짧은 비명과 긴 신음이 뒤따랐다. 알렉사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야생의 설표처럼 움직이며 놈들을 사냥했다.

그녀의 실력에 놀란 적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트리스탄!”

“알았다고!”

눈치 빠른 트리스탄은 그중 명령권자로 보이는 놈들을 골라 추적해서 잡았다. 나머지는 맥스웰과 병사들의 포위망에 갇혔다.

“끝났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힘있게 털어 낸 알렉사가 그걸 다시 등에 걸쳤다. 그러곤 적 정찰대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었다.

“이거 놓으…… 으아아아악!”

“너희 대장이 있는 곳을 불어.”

“웃기지 마라. 우린 그냥 탈영병일 뿐이야!”

“대장이 있는 곳을 알려 주면 이대로 전부 풀어 주마. 그렇지 않으면 너흰 분노한 북부의 부족장들에게 끌려가게 될 거야.”

아마 산 채로 거죽이 벗겨지거나 머리만 내놓고 땅에 파묻히게 되겠지. 알렉사는 있지도 않은 사실까지 지어내 놈들을 협박했다.

“뭐 대단한 배신이라고 이러는 거야. 너희 대장이 어디 있는지 우리가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뭐가 있다고? 쳐들어갈 것도 아닌데. 나도 이대로 돌아가면 면이 안 서니까 그거라도 알려달라는 거잖아.”

적의 정찰대는 끝까지 저항하려 했으나, 알렉사의 마지막 말에는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용병이야. 너희 대장한테 가서 전해. 조금만 더 얹어 주면 그쪽으로 가서 붙겠다고.”

“진짜냐?”

“풀어 준대도 지랄이네.”

알렉사가 자신의 몸값을 놈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쟁 용병치고는 엄청난 액수였으나, 그녀의 실력을 볼 때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다.”

“좋아, 가서 말 좀 잘 전해 줘라.”

알렉사가 웃으며 놈을 풀어 주었다.

그날 밤 적의 선봉 부대가 기습을 당했다. 알렉사와 트리스탄을 앞세운 북부의 기습 부대에 의해서였다.

정찰병을 풀어주고 은밀히 뒤를 쫓아 적의 위치와 규모를 파악한 알렉사는 본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기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날 전투에서 적의 지휘관 중 하나를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천으로 머리를 감싼 알렉사가 거대한 칼을 등에 짊어진 채 한 손으로 적의 지휘관을 질질 끌었다. 그 모습을 본 북부 연합의 수뇌부는 그녀를 자신들의 막사에 초대했다.

“너는 북부 연합의 영웅이다.”

“그런 허명은 바라지 않습니다.”

“허명이라니? 용병이라고 들었는데, 원하는 게 돈과 명성이 아니라고?”

“네.”

알렉사가 천을 끌어 내렸다. 짧게 자른 은발에서 마른 먼지가 떨어졌다.

“당신네 주술사를 좀 만나고 싶은데요.”

“뭐?”

“아무나 만날 수 없다는 진짜 주술사 말입니다.”

당신들이 저 먼 곳에 꽁꽁 감춰 놓고 보호하고 있다는 북부의 정신적 지주, 나는 그를 만나고 싶다.

알렉사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율리아.]

북부 연합 수뇌부의 호의로 그들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는 주술사를 만난 뒤, 알렉사는 율리아에게 편지를 썼다. 막사에 돌아오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이제야 알았어요. 왜 그 보석이 당신을 선택했는지.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이끌리고, 푸른 바다의 환초는 그런 인간을 벌하는 바다의 냉혹함과 자유로움을 상징합니다.]

글씨가 자꾸 비뚤어졌다. 알렉사는 몇 번이나 펜을 놓고 손을 흔들어 긴장을 풀었다. 그녀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를 잡아먹을 수 있어요.]

황제가 율리아의 심장에 칼을 꽂아 그 피를 뒤집어쓰면 그는 신에 필적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언제든, 몇 번이고 원하는 때로 돌아가 다시 살 수 있다.

율리아가 황제의 심장에 칼을 꽂아 그 피를 뒤집어써도 마찬가지다.

본래 하나였던 두 개의 저주.

그것들은 다시 하나가 되려 한다. 완전해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마땅한 대적자를 찾아 헤매고, 서로를 잡아먹을 때까지 삶을 반복한다.

율리아가 지긋지긋한 회귀의 굴레를 깨려면 자신의 대적자를 잡아먹거나, 반대로 상대의 양분이 되는 수밖에 없다.

[율리아, 당신은 황제를 죽여야 합니다.]

저주에서 해방되려면 저주를 완성해야 한다.

북부의 주술사는 말했다. 저주를 완성하지 않고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고. 그래서 마지막 해적왕도 그토록 절박하게 자신의 대적자를 찾아 헤맸노라고.

심지어 황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율리아를 확보하려는 이유는 제 손으로 그녀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기 위함이다.

갈겨쓰듯 편지를 마무리한 알렉사가 손가락에 힘을 꽉 주고 머뭇거렸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끝끝내 편지를 봉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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