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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249/319)

218화

분위기가 적당히 가라앉았을 무렵, 먼저 식사를 마친 데네브라가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트린과 코코, 힌치 백작은 데네브라의 그런 행동에도 익숙해져 대충 인사를 건넸다.

당황한 건 이번에도 사절단이었다. 만찬장에 남아 있기에도 불편하고, 그렇다고 데네브라를 따라 일어나자니 상대에게 실례였다.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데네브라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너무 불편한 상대와 덜 불편한 상대 중에 고르라면 당연히 덜 불편한 상대였다. 사절단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겠다며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데네브라를 따라 만찬장을 떠났다.

코코가 피식 웃고, 샤트린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데네브라의 시녀인 척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율리아의 뒷모습을 음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앉아라.”

“후…… 전하,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에 내가 있으니 나더러 수습하라는 거겠지. 다 알고 있으니까, 닥치고 내 말이나 들어라.”

“전하, 그렇다기보다는…….”

“누가 그렇게 함부로 끼어들라고 가르쳤느냐. 너희는 크세노를 앞에 두고도 그리 말하느냐?”

데네브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특히 화를 낼 때 그랬다. 사절단이 지친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때 데네브라가 눈동자를 스르륵 굴려 자신의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응접실엔 네 명의 시녀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데네브라는 그중 교묘히 다른 시녀들 사이에 끼어 일하는 척하고 있는 율리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율리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황비 전하, 곡해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너희는 크세노의 사생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천둥이 치는 것처럼 충격적인 질문이었다. 사절단의 귀족들이 말문을 잃었다. 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그것조차 잊은 것 같았다.

데네브라가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꼬며 말했다.

“물었잖으냐. 크세노의 사생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니까? 몇 명인지, 몇 살인지. 어디에서 어떤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모, 모릅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넓은 대륙에서 후계 없는 황제에게 사생아가 몇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변수인지 몰라?”

“그게 아니라.”

“카루스 란케아가 변절하였다. 나는 그를 설득하지 못했어. 크세노의 적은 이제 북부뿐 아니라, 남부와 무혈 제독, 나와 내 가문으로 확대되었지.”

사절단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침묵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여기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간 어느 쪽에 의해 살해당할지 몰랐다.

데네브라가 팔걸이를 두드리며 이죽거렸다.

“전쟁이 길어질 것이다. 20년? 30년? 누가 이길지는 모르나, 어느 쪽이건 영원히 고통받겠지. 비옥한 서부는 누구보다 먼저 전쟁에 차출되어 남부를 상대해야 하리라. 쉽게 말해 줄까.”

“전하.”

“너희의 적은 변절한 카루스 란케아다.”

서부의 귀족들이 눈매를 움찔 떨었다.

“또 있지. 남부 연합이 태동할 것이다. 과거 티타니아에서 크세노가 꼬리를 말고 달아나야 했던 그 야만적인 남부의 전사들이 하나로 뭉쳐 제국을 적대하리라.”

데네브라가 다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시녀들 뒤에서 얌전히 찻물을 데우면 율리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응접실에 무거운 침묵이 가득 찼다. 데네브라는 율리아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사절단을 바라보았다.

“황비 전하, 그들은 기회주의자예요. 더 큰 먹잇감을 던져 주는 사냥꾼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죠. 전하께서 그들은 손에 넣으려면 비옥한 서부보다 더 큰 대가를 내밀어야 해요.”

“그게 무엇이냐. 나는 크세노가 아니야. 전쟁으로 영토를 늘려 줄 수 없어.”

“더 올라갈 곳이 없어진 귀족들은 결국 황좌를 노리게 되어 있어요.”

“반역을 종용하란 뜻이냐?”

“아뇨. 황제가 될 수는 없으니, 황제를 만들어 보라고 하세요.”

데네브라는 율리아가 시키는 대로 했다.

“크세노가 없으면 내가 섭정이다.”

“전하!”

“나는 그의 사생아를 데려와 후계자로 삼을 거야.”

사절단이 크게 동요했다. 그들은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데네브라는 그들의 잘 만들어진 가면 속 탐욕에 판돈을 걸었다.

“차기 황제를 친부모처럼 길러 준 후견인.”

그 정도면 너희에게도 만족스러운 명함이 아니냐고, 데네브라가 물었다.

데네브라와의 대화를 마친 사절단이 각자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응접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누구와 어떻게 상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도 몰랐다.

율리아는 만찬장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숙소를 정할 때도 교묘하게 동선을 꼬았다.

서부의 기회주의자들은 데네브라에게 가까우면서도 고립된 곳으로, 황제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자는 데네브라로부터 멀되 여러 시선에 노출된 곳으로.

황비의 시녀인 척하며 숙소까지 그들을 배웅한 율리아가 복도 한가운데 서서 크게 심호흡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넓은 복도 여기저기에 사람이 있었다. 청소하는 하인과 하녀, 물건을 나르는 일꾼과 주위를 경계하는 병사들, 시녀와 전령까지.

왕비궁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코코의 수족이었다. 데네브라의 묵인 아래, 이 거대한 궁은 코코가 쳐 놓은 거대한 덫이 되었다.

촘촘하게 짜인 그물망 안에서 율리아는 굶주린 거미처럼 움직였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하녀들이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병사들은 교묘히 무기의 방향을 바꾸었으며, 누군가는 창문을 열고 정원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먹잇감은 정해졌다. 이제 씹어 삼키는 일만 남았다.

“나는 카루스를 사랑해. 내 삶을 통틀어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너는 내가 바이칸을 등지고 너희 편이 되어 줄 거라고 믿는 거냐?”

“고작 그런 이유라뇨. 사랑보다 더 대단한 이유가 또 뭐가 있는데요?”

“내 사랑이 가짜라고 했잖아! 네가 그랬잖으냐!”

“증명해 보세요.”

“율리아!”

“저야 물론 사랑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나 탐욕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폐위당해 죽느니, 섭정이 낫잖아요. 하지만 그 이유를 꼭 사랑이라고 포장하고 싶으시다면야, 그렇게 하세요.”

“너는 아무렇지도 않으냐? 내가 거슬리고 밉지 않아?”

“카루스 님을 사랑하세요?”

“몇 번이나 그렇다고…….”

“황제를 사랑하느니 그를 사랑하는 게 낫겠다고 계산한 게 아니고요?”

“율리아!”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꾸며 낸 사랑이잖아요. 설마 그걸 진짜라고 믿는 건 아니죠? 그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잖아요, 황비 전하. 저를 실망케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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