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사절단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그들의 얼굴에선 조금의 두려움이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식민지나 다름없던 속국이 멋대로 보호 동맹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건방을 떨어 대니, 겁만 좀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황비 데네브라가 그들을 가로 막고 섰다.
이 순간을 위해 코코가 특별히 준비한 새카만 드레스와 검붉은 망토가 크게 휘날렸다. 데네브라는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마녀처럼 풀어헤치고 있었다.
“황비 전하…….”
“전부 꿇어라!”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단단한 고함으로, 데네브라가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건방진 것들이 감히, 나 데네브라 앞에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뭐 하는 짓이냐. 꿇어라! 꿇고 말해라!”
“예? 황비 전하, 왜 이러십니까.”
“제국법상, 황제가 없는 곳에선 나 데네브라가 너희의 주인이다. 너희가 바이칸의 귀족이라면 응당 황제를 대하듯 나를 대해야 할 것이야. 내 말이 틀렸느냐? 말해 보아라! 입이 붙었느냐? 내가 지금 묻고 있지 않으냐!”
“지금 무슨, 저희한테 무슨 말씀을…….”
“내가 아무것도 모르리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오르테가에 내려온 틈에 멋대로 내 군사를 움직여 손발을 자르고, 또 멋대로 폐위를 논하고 있지 않으냐! 멍청하고 한심한 것들! 배은망덕한 놈들! 너희가 감히, 나 데네브라를 욕보이려 여기까지 와? 사지를 찢겨 죽고 싶으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데네브라의 목소리와 당황한 사절단,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레위시아.
율리아가 코코를 바라보며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가 입술 끝을 슬그머니 올리며 웃었다.
데네브라는 레위시아와 달랐다. 현명하거나 친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샤트린처럼 포용력이 있거나 강한 황족인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특별한 장점이 있었다.
코코는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망나니는 망나니답게.”
사절단은 레위시아 국왕과 제대로 인사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다.
성대한 환영 연회는커녕 그들을 맞이한 건 데네브라의 불같은 분노와 비난의 화살이었다. 그녀는 사절단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을 전부 무릎 꿇렸다. 그러곤 패전의 책임이 자신이 아닌 황제에게 있음을 반복해서 말했다.
사절단의 임무는 간단했다.
데네브라 황비에게 패전의 책임을 떠넘기고 남부의 협조를 얻어 내는 것.
그러나 그들은 시작부터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진격 명령을 내린 건 내가 아니라 크세노다! 그는 나를 희생양 삼아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거야! 너희는 정녕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냐?”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럼 이건 무엇이냐! 두 눈 뜨고 똑바로 봐라!”
데네브라가 사절단 대표의 얼굴에 구겨진 명령서를 집어 던졌다.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다. 이건 나를 폐위하려는 크세노의 덫이야! 내가 오르테가에서 죽어 버리면, 너희를 앞세워 남부와 전쟁을 벌이겠지!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으냐!”
“황비 전하!”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어차피 폐위되어 죽을 거라면 네놈들이라도 데리고 가야겠으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데네브라가 곁에 있던 호위 기사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었다.
기겁한 사절단이 제발 도와 달라는 얼굴로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위엄 있는 척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레위시아가 그제야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황비 전하를 모셔라.”
* * *
“아주 잘하셨어요.”
진심이었다. 데네브라는 기대보다 더 잘해 주었다.
율리아가 웃으며 칭찬의 말을 건네자, 이마에 찬 수건을 올리고 있던 데네브라가 버럭 짜증을 냈다.
“한 놈쯤은 칼로 찔러도 됐잖아! 마지막엔 왜 말린 것이냐. 자고로 화라는 건 충분히 해소해야 가라앉는 법이란 말이다. 이러다 화병 걸리겠구나.”
“그들 중 두엇은 전하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죽여 버리면 어떡해요.”
“그게 가능할까.”
“카루스 님이 가능하게 만들 거예요.”
율리아가 카루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데네브라가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기분 좋아 보이는구나.”
“그럼요. 전하께서 저희 편이 되어 주셨는데.”
“착각하지 마라. 너희 편이 된 게 아니라 내 안위를 위해 잠시 손을 잡은 거지. 너희는 지금 날 이용해서 바이칸을 무너뜨리려는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일 것 같으냐? 카루스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건 못해. 바이칸은 제국이야. 대륙이란 말이다.”
율리아가 무너뜨리려는 건 바이칸이 아니라 크세노였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알려 주는 대신 의뭉스레 웃기만 했다.
“넌 참 못됐어. 너 같은 계집은 처음 본다.”
데네브라가 중얼거렸다.
“카루스는 도대체 왜 너를 사랑하는 걸까.”
율리아가 선해 보이는 건 그녀의 곧은 자세와 차분한 말씨 때문이었다. 단정하고 우아한 태도도 한몫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상대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과 모함으로 상대를 옭아맸다.
진짜 선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일도 스스럼없이 했다. 때로는 교활하게 남의 손을 빌려 누군가를 처단하기도 했다.
“하긴.”
데네브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착하기만 한 계집들은 재미가 없어. 넌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마음에 드는구나.”
“그런 칭찬 자주 들어요.”
어쩌면 카루스도 네 그런 점을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데네브라가 힘없이 속삭였다.
사절단은 혼란스러워했다.
구금되어 있는 줄 알았던 데네브라가 제국 황실에서보다 더 기고만장한 기세로 버티고 서 있었고, 드추바로 향했던 침략군의 지휘관들은 진격 명령을 내린 게 황제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증거도 증언도 완벽하다는 황비의 말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이 모든 일에서 오르테가는 철저히 피해자였다.
그런데도 레위시아 국왕은 화를 내지 않고,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가해자 중 누구도 처형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예의 있고 우아한 태도로 사절단을 맞이했다.
고작 20대 중반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자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니. 왕위 후보조차 아니었던 레위시아는 제국의 정보망에서도 열외였기 때문에 사절단은 그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왕궁으로 들어온 그들은 여독을 풀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밤샘 회의에 들어갔다.
사실 그들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어떻게든 데네브라를 제물 삼아 이 일을 제국에 유리하게 결론짓는 것이다.
물론 그걸 두고 볼 율리아가 아니었다.
시녀들과 함께 무리 지어 움직이는 그녀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외적인 자리에선 코코가 얼굴을 내밀고, 율리아는 샤트린의 시녀들과 함께 은밀히 사절단을 관찰하며 조종하기 시작했다.
“연회는 열어 줄 수 없어요.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줘선 안 되니까. 오르테가는 그들을 철저히 외부인으로 대할 거예요. 다만 만찬 정도는 대접하죠. 물론 그것도 국왕 전하가 아니라, 샤트린 공주님의 명령으로요.”
이튿날 만찬장의 문이 열렸다. 환영 연회는 없었으나 식사 정도는 대접하겠다며 샤트린 공주가 준비한 만찬이었다.
“거기 뭐 하니. 손님들 자리로 안내해.”
샤트린이 시녀들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공주궁의 시녀들이 모시는 왕족을 닮아 도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사절단을 각자의 자리로 안내했다.
사절단은 시녀들이 가리키는 지정석에 앉아야만 했다. 저들끼리 뭉쳐 앉으려고 했다가는 ‘거기 아닙니다.’라는 차가운 지적이 들렸다.
양쪽 상석엔 데네브라와 샤트린이, 나머지 자리엔 사절단과 오르테가의 귀족들이 적당히 뒤섞여 앉았다. 특히 황제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자의 옆자리에는 코코와 힌치 백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했다.
체할 것 같은 식사였다.
사절단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들도 제국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이었다. 한데 이놈의 남부 촌뜨기들은 도무지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하하! 오르테가가 남부의 보석이라 불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공주 전하와 시녀들의 우아한 모습을 보니 영롱한 진주가 떠오릅니다. 바이칸에서도 오르테가의 진주를 최고로 친답니다.”
“제가 고작 장식용 보석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까?”
샤트린이 두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왕위에서 물러난 왕족에게 장식용 보석이라니, 자칫 잘못하면 모욕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깜짝 놀란 사절단이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분위기는 이미 싸늘해진 뒤였다.
데네브라가 그들을 바라보며 대놓고 혀를 찼다.
“내가 대신 사과하마. 바이칸의 귀족들은 권위적인 데다 오만해. 심지어 배타적인 선민의식도 있어.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건 오히려 북부인데도, 자기들이 더 우월한 피를 물려받았다고 착각한단다.”
“아하하하!”
“황비 전하!”
샤트린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대놓고 바이칸을 조롱하는 황비 때문에 사절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려 하면 샤트린과 힌치 백작이 딴죽을 걸었고, 결국엔 데네브라가 화를 냈다.
때로는 코코의 입을 통해 절대 꺼내고 싶지 않았던 화젯거리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크세노 황제께서는 데네브라 황비 전하를 폐위시키려 하시나요?”
“뭐, 뭐요?”
“만약 저희가 황비 전하와 오해를 풀고 화해한다면, 황제께서는 무엇을 명분으로 폐위를 논하시려는지?”
“당신이 왕의 시녀장이라고는 하나, 황제 폐하의 의중을 그런 식으로 속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군요. 실례했어요.”
코코가 하나도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로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