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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화 (247/319)

216화

44. 너를 사랑하느니

나는 왜 카루스 란케아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데네브라는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혼자 갇혀 있는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심술이나 부려 볼까 하는 마음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만찬 초대를 보내던 날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왕비궁에 나타나더니 그녀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레위시아 국왕의 어머니였다.

선왕의 애첩이었던 그녀는 데네브라의 눈에도 무척 아름다웠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농염함과 처연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얼굴이었다. 순수하고 청초한데, 그 안에 짐승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께름칙하기도 했다.

아들이 왕이 되었으니 전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살 줄 알았는데, 그녀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데네브라가 물었다.

왕에게 기생하는 애첩이라 평생 손가락질받고, 하나뿐인 아들을 내팽개치면서까지 왕을 사랑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식사를 마친 그녀는 우울하게 웃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율리아가 궁금하다는 듯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지금까지는 무슨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율리아가 관심을 보이자, 데네브라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사랑하느라 나를 잃었다고 했어.”

“그랬구나.”

“뭔 개소리냐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피하더라고.”

“전하는요?”

“내가 뭐?”

“전하도 카루스 님을 사랑하잖아요. 꽤 오랫동안,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하셨잖아요. 그러느라 자신을 잃었다고 생각하세요?”

“미쳤느냐? 그를 사랑하는 것도 나고, 그에게 집착하는 것도 나야. 그 감정과 판단 모두가 나잖아. 그런데 왜 나를 잃어?”

그렇게 착각하고 있구나. 율리아가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세상 사람이 전부 전하처럼 자기중심적이진 않거든요.”

“너는?”

데네브라가 흥미로워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시녀가 곁에 앉아 손톱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율리아는 데네브라의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는 전하처럼 되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것참 해괴한 대답이구나. 너는 언제나 나를 어린애 가르치듯 하지 않느냐.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진심이에요. 저는 제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그럼 뭐라고 생각하는데?”

“율리아 아르테요.”

데네브라는 율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뭔가 화를 내려는 찰나, 손톱을 매만지던 시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 같습니다, 전하.”

“누가 너한테 끼어들라고 했느냐!”

“죄송합니다.”

시녀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데네브라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손톱을 마저 정리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율리아가 데네브라에게 물었다.

“카루스 님을 왜 사랑하세요?”

“난 검은색이 좋아.”

대답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데네브라는 의외로 고민조차 하지 않고 이유를 댔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 눈동자가 좋다. 낮고 거친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차분하게 말하려 노력하는 것도 좋아. 아름다운 몸이나 무관심한 태도, 그런 것도 좋아.”

“네……. 그렇구나.”

“그중 가장 좋은 건 존재만으로 크세노를 엿 먹인다는 점이지.”

데네브라가 입술을 비틀었다. 남은 손으로 술잔을 들고 크게 한 바퀴 굴린 그녀가 그걸 한입에 꿀꺽 삼켰다.

“술은 그만 드세요. 이틀 내로 사절단이 도착할 거예요.”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시녀에게 가볍게 고갯짓했다. 그러자 손톱 정리를 마친 시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물러났다.

“저것도 이제 내가 아니라 네 명령을 듣는구나.”

“그게 기분 나쁘면 시녀들한테 잘해 주셨어야죠.”

“내가 왜?”

“전하 같은 분을 모셔야 했다면 저도 왕궁 시녀가 되진 않았을 거예요. 분명 다른 방법으로 귀족이 됐겠죠.”

“그건 네가 평민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조언이야. 아랫것들이란 자고로 잘해 주면 기어오르고, 방심하면 배신하기 마련이란다.”

“윗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고분고분할수록 함부로 대하잖아요?”

“넌 정말 한마디도 지지 않는구나.”

“그런 칭찬 많이 들어요.”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 그러곤 이번에 오르테가에 방문하기로 한 사절단 명부를 들이밀며 그중 황제의 진짜 측근이 누구인지 짚어 보라고 했다.

데네브라는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더는 비협조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녀도 율리아가 시키는 대로 해야 폐위당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놈과 이놈은 아니야.”

“왜요?”

“크세노는 멍청한 놈들을 좋아하는데, 이 두 사람은 너무 영악해. 황제가 서부의 비옥한 정복지를 내준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이 사람은요?”

“좀 다른데…… 그놈은 오래전부터 남부를 욕심내던 놈이야. 사절단에 낀 것도 그런 이유겠지.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언젠가 황제에게 오르테가의 풍요로운 항구를 대가로 요구할 수도 있으니.”

“흐응.”

“내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도 없어요.”

데네브라가 얼굴을 확 굳혔다. 긴 명부 어디에도 그녀의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황비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되는 사절단에 그녀의 측근은 단 한 명도 없고, 전부 황제와 함께 정복지를 나눠 가졌던 욕심쟁이뿐이었다.

“율리아.”

“네.”

“내가 정말 폐위되는 것이냐?”

데네브라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닌 척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으나, 율리아는 데네브라가 조금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율리아는 데네브라 같은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대충은 알았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밀고 당기며 길들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상대에게 물들어 버리는 부류였다. 칭찬과 관심이 고픈 나머지 뿌리 없이 자라는 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틀만 지나면 사절단이 도착할 것이다. 율리아는 그 안에 데네브라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율리아가 펼쳐 놓은 명부를 와락 구겨 쥐었다. 그러곤 찻물을 끓이려 피워 놓은 화로에 던져 넣었다.

“무슨 짓이냐!”

“이 명단은 잊으세요.”

“뭐? 왜!”

“이제부터 당신은 황제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에요. 바이칸의 최고 권력자이며, 고귀한 황비죠.”

율리아가 데네브라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마력에 가까운 그녀의 눈빛에 압도당한 데네브라가 말을 잃었다.

“잘 들으세요. 당신은 전쟁에 중독된 황제를 막기 위해 카루스 란케아와 오르테가의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눈치챈 황제가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 버렸어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역사는 결국 승자의 손에 의해 쓰인다는 걸.

“그리고 패배했죠.”

승자는 이쪽이다. 펜을 쥐고 있는 것도 이쪽이다. 율리아가 말했다.

정확히 이틀 뒤 바이칸의 사절단이 도착했다. 그들이 타고 온 배에는 화려하게 도금된 사자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남부의 가을엔 여름만큼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는데, 그 빛을 받아 어지럽게 번쩍거리는 사자상 때문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전부 눈살을 찌푸렸다.

레위시아는 커다란 그늘막 아래에 서서 위엄 있는 척하고 있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흰 망토와 긴 머리카락이 그의 미모를 더욱 빛내 주었다.

태양 빛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사자상을 보고, 레위시아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저게 뭐 하는 짓거리지. 사람 얼굴 같잖아. 기분 나쁘게.”

코코가 그를 따라 입술을 들썩이며 투덜거렸다.

“젊은 시절 크세노 황제의 별명이 사자였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만든 건가 싶네요. 유치하게 진짜.”

“내가 황제라면 낯 뜨거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금을 입힌 동상이라니.”

“질 수 없죠.”

“뭐?”

“우리 군함엔 꼭 전하의 흉상을 선수에 달아요.”

“나 가출할 거야.”

“후미엔 인어 꼬리도 달아 드릴게요.”

두 사람의 대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연스레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데네브라는 그렇게 할 수 없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율리아에게 물었다.

“저 둘은 왕과 시녀가 아니냐?”

“네, 그렇죠.”

“저래도 되는 것이냐?”

“뭐가요? 솔직히 유치하고 웃기잖아요. 황제의 젊은 시절 별명이 사자였다고 사자상을 배에 장식하다니. 금을 입힌 것도 웃기지만, 사죄하러 온 사절단이 저 배를 끌고 온 게 더 웃겨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말문이 막힌 데네브라가 머뭇거리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크세노가 이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놈을 위해 변명하는 건 좀 그렇지만, 저 배는 크세노의 의사와는 하등 상관없이 선택되었을 거야. 그는 물을 싫어하거든. 배도 타지 않지.”

그녀의 말을 들은 레위시아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귀족들이 황제를 조롱하려고 만들었나?”

때마침 사절단이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세련된 차림새의 귀족들이었다.

레위시아와 코코, 율리아가 동시에 데네브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할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서 내린 이가 서부의 귀족이고, 검은 모자를 쓴 놈이 황제의 측근이다.”

“이쪽으로 오네요.”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뒤에서 낮게 속삭였다.

“제가 한 말, 꼭 기억하세요.”

“알았다, 알았어! 누굴 바보로 아는 게냐?”

데네브라가 크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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