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어떤 사람에 대한 이해는 긴 시간에 걸쳐 서로를 알아 가며 서서히 깊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한순간에 상대의 모든 것을 수용하게 되기도 한다.
율리아는 크세노를 이해했다. 그가 택한 방식, 그가 썼던 가면, 아홉 번째의 삶을 살면서도 그가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
“황제.”
그는 진짜 권력자였다. 제왕이며 천자였고, 바이칸 그 자체였다. 그러니 저주 따위가 그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이다.
미치기 직전까지 내몰려도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겠지.
세상을 통제하는 자는 자신을 잃어선 안 되니까.
좁은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곧 바바스로프가 데리러 올 것이다. 율리아는 펼쳐 놓았던 책들을 한데 모았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무거운 책을 빼앗아 들었다.
“카루스 님?”
발소리도 듣지 못했다. 율리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카루스가 커다란 손으로 여러 권의 책을 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말을 걸어도 모르는 거야.”
“그랬어요?”
“놀랄까 봐 일부러 발소리까지 내면서 걸어왔는데.”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요.”
“무슨 생각?”
“크세노 황제는 그렇게 많은 전쟁을 치렀는데, 왜 공식적인 패전 기록은 없는 걸까.”
인간인 이상 처참하게 패배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정복군도 처음부터 그렇게 대단하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크세노와 정복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항전했던 국가도 있었다.
카루스가 책을 책꽂이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아홉 번 졌어도 마지막에 한 번 이기면 승리라고 기록했으니까.”
“역시.”
“문제 삼는 사람도 거의 없었어. 그 마지막 승리가 결정적이긴 했거든. 젊은 시절의 크세노 황제는 배포가 큰 사내였고, 함께 싸웠던 자들에게 정복지의 영토와 재화를 아낌없이 베풀었지.”
“주위에 사람이 많았겠네요.”
“군주가 직접 남의 것을 빼앗아 나눠 주니까 기회주의자들이 넘쳐 났지.”
“이제 더 올라갈 곳도 없을 텐데 그는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요.”
“글쎄다, 신이라도 되고 싶었나.”
책 정리를 마친 카루스가 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태도가 워낙 자연스러워, 율리아는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바바슬로프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그놈은 일찍 퇴근했어.”
“쫓아낸 게 아니고요?”
“드추바 해전 이후 오르테가 해군과 종종 어울리더라고. 수가 적긴 해도, 해적들의 옛 항로에 대해 그들보다 많이 아는 자는 드물지.”
“해적들의 옛 항로는 왜요?”
율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어보긴 했는데,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카루스 님, 해적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세요?”
“시도는 해 봐야지.”
“예전처럼…….”
“여덟 번째의 카루스 란케아가 성공했던 일을 아홉 번째의 카루스 란케아가 실패할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
카루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거친 울림을 지그시 눌러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는 신기하게도 율리아를 안심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그가 괜찮다고 말하면 정말로 뭐든 다 괜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얼굴에 노을이 드리워졌다. 드추바 해전을 치르느라 조금 살이 빠졌는지 눈매가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던 율리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크세노 황제예요.”
“뭐가.”
“제 대적자요.”
아직은 추측일 뿐이라 좀 더 확실해지면 털어놓으려고 했는데.
“그도 알고 있을 거예요.”
카루스가 걸음을 멈추고 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등 뒤에서 짙은 노을이 쏟아졌다.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가 움찔 떨렸다.
그의 눈이 검었다. 검다 못해 새카맸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숨기고 싶었던 것들이 자꾸 튀어나왔다.
“그래서 황제를 끌어내리고 데네브라를 황제로 만들기로 했어요.”
믿을 수 있는 사람. 등이 아니라, 심장을 맡겨도 될 든든한 남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꽉 잡혀 있던 손을 풀어, 이번에는 카루스의 손가락을 자신이 살짝 감아 잡고 물었다.
“제 편이 되어 주실래요?”
카루스가 커다란 몸으로 빛을 막았다. 그들은 높은 책꽂이 사이에 서 있었다. 그가 등으로 노을을 막자, 율리아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만약에 네가.”
이마가 간지러웠다. 카루스가 고개를 숙여 가까이에서 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에 닿았다.
“크세노를 죽여 달라고 말하면.”
“네?”
“난 당장이라도 반역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어.”
바이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배신할 수 있다. 변절자, 패륜아, 배신자. 그 어떤 비난도 다 감당할 수 있다.
카루스가 율리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아슬아슬하게 갖다 댔다. 그의 피부에서 아지랑이 같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절대 패배하지 않을 거야.”
돌아오는 길엔 두 사람 다 거의 말이 없었다. 마차 안에서도 함께 저녁이나 먹자는 짧은 대화만이 오갔다.
어색하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카루스는 어떻게 하면 그녀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저택에 도착한 뒤에는 트루디의 시중을 받으며 함께 식사했다. 저택에 머무는 날이 적어 전문 요리사를 고용하진 않았으나, 하녀들의 솜씨가 좋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러곤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가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자잘한 소리를 냈다. 율리아는 카루스와 함께 정원을 거닐다 저택 앞 백사장으로 향했다.
서늘해진 밤바람에 뒷덜미가 오싹했다. 두 팔로 몸을 감싸는 율리아에게 카루스가 다가와 자신의 망토를 걸쳐 주었다.
“요즘 블라이스가 가끔 떠올라.”
“블라이스요?”
“그래. 놈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
“지금쯤 북부에서 잘살고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든 네 곁을 맴돌면서 기회를 노렸을 것 같은데.”
“그가 제게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랬다면 ‘안녕’이라는 말 대신 ‘사랑한다’라는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그도 그때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경쟁자가 많을 줄은 몰랐는데.”
카루스가 과장을 섞어 투덜거렸다.
율리아는 벽이 높은 여자였다. 다가가기는커녕 바라보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벽이 높았다. 그녀는 다정하지 않았고, 운명에 쫓기느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레위시아에 이어 블라이스라는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 카루스는 자신을 질책하며 비웃었다. 너무 안일했다. 안일하다 못해 방심했다.
“내 눈에 아름다운 사람은 남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걸 간과했어.”
“제 얘기예요?”
“그럼 지금 내가 누구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저도 있어요.”
“뭐가 있어.”
“경쟁자요.”
율리아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웃었다. 그러곤 카루스를 얄밉게 노려보며 말했다.
“데네브라 황비는 아름답고 욕망에 솔직하고, 권력자인 데다가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하잖아요.”
“지금 그딴 여자를 경쟁자라고…….”
카루스가 걸음을 멈추고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 율리아를 나무랐다.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데네브라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관심을 끌어낸 적이 없어. 난 그 여자 머리카락이 금발이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그건 좀 너무한데.”
“황제의 아내가 금발인지 적발인지 알 게 뭐야. 난 그냥 그 여자가 자꾸 황성으로 불러 대기에 귀찮아서 피해 다녔을 뿐이야.”
“사랑한다잖아요. 저렇게 대놓고 고백하는데, 그것도 몰랐다고는 하지 마세요.”
“처음엔 그냥 크세노의 관심이 필요해서 날 이용하는 줄 알았지.”
“세상에.”
“네가 나와 함께 데네브라 얘기를 하는 이 상황 자체가 탐탁지 않아. 차라리 레위시아 얘기를 해.”
“전하는 왜요?”
율리아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루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하지.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으니까.”
“애초에 다른 사람 얘기를 꺼낸 건 카루스 님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조금 화가 나려고 하는데요.”
“뭐가.”
“경쟁자라고 했잖아요.”
“그게 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어 보려던 카루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경쟁자. 율리아가 데네브라를 경쟁자라고 했다.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자,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입매를 문질렀다. 간신히 억눌러 왔던 감정이 어지럽게 요동쳤다.
“왜 자꾸 다른 사람 얘기를 하세요.”
율리아는 여전히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이스의 마음에 대해서도, 레위시아의 마음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것이다. 받아 줄 수 없으니까. 희망을 줘선 안 되니까.
하지만 카루스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만약 제가 이번에도 실패하고 다시 눈보라 치는 산에서 당신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율리아…….”
“또 똑같이 시작할까요? 부하들의 생명을 대가로 당신의 일행이 되고, 남부 함대의 비리를 고발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카루스가 머리를 흔들었다. 부정하는 몸짓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려는 것이었다.
그는 그동안 의도적으로 그 생각을 피해 왔다. 실패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율리아를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줘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실패한 뒤의 열 번째에 대해선 대비하려 하지 않았다.
불현듯 죄책감이 쏟아졌다.
율리아는 이번이 네 마지막 삶이라고 강요하는 그의 마음을 배려해 지금까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그 지독한 불안감을 견뎌 왔다.
대적자가 황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그 불안감은 실체를 가지고 그녀를 괴롭혀 왔을 텐데, 이번이 마지막인 것만 같다던 자신의 말을 번복해야 할 정도로 혼란스러웠을 텐데.
“만약 열 번째로 가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
카루스가 율리아에게 다가와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며 주었다.
아홉 번째의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를 대신해 싸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니 아홉 번째의 율리아가 열 번째의 율리아를 포기하지 않게 해야 했다.
카루스가 가만히 말했다.
“‘저주를 믿으세요?’”
율리아가 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저는 죽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어요. 열 번이에요. 죽은 줄 알았는데, 항상 이날로 돌아오죠. 당신은 매번 똑같이 말해요.’”
카루스는 율리아가 그에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되새기고, 되새기고, 또 되새겼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가 어떤 얼굴이었는지, 어떤 심정이었는지. 전부 기억하려고 미친 듯이 되새겼다.
“난 똑같이 사랑에 빠지겠지.”
“카루스 님.”
“날 이용해서 크세노를 죽여. 그 자식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내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등신이야.”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라고, 카루스가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