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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화 (245/319)

214화

“후계자였던 아들 바실리 마조람은 실종된 이후 소식을 찾을 수가 없고, 후작 부인은 재판 당시 왕비의 손에 살해당하였습니다. 후작은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딸인 크리스틴 마조람은 데네브라 황비께서…….”

“나 참.”

크세노가 하하 웃었다. 그가 한쪽에 따로 떨어져 있던 마조람 후작 가문에 대한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호르헤.”

“예, 폐하.”

“너는 이 어린 평민 여자가 이 가문을 상대로 싸워서 이런 식으로 승리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한 사람이면 모를까 가문과 파벌, 심지어는 왕가를 상대로도 싸운 것으로 압니다. 조력자가 있었다고는 하나 율리아 아르테에게 기묘한 행운이 연속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기묘한 행운의 연속.”

삶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죽고, 죽고, 또 죽어 가면서 체득한 정보를 그녀가 꽉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엾은 것.”

크세노가 율리아의 초상화를 자신의 책상 한가운데에 두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해적이었던 아버지가 보육원에 버리고 간 아이라……. 기구하고 가엾기 짝이 없어. 연인에게선 버림받고, 귀족의 도구로 쓰이다가 배신당하고, 그렇게 계속 살해당했단 말이지.”

“폐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야, 그렇지?”

크세노가 혀를 쯧쯧 차며 초상화를 노려보았다.

초록색 물감으로 채운 율리아의 눈동자가 그를 마주 노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 정도로 선명해, 그림인데도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직접 마주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는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호르헤.”

“예, 폐하.”

“율리아 아르테가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

“명을 받듭니다.”

호르헤가 깊이 머리를 숙였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

율리아는 맥스웰이 남기고 간 정보원들에게서 그에 대해 꽤 많은 것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오르테가 왕궁에도 관련 서류가 많았다. 왕의 허락하에 극비 문서까지 뒤져 가며 크세노에 대해 조사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브레웨 아카데미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린 율리아가 아카데미 정문을 앞에 두고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는 것 같죠.”

“난 엊그제 왔다 간 것 같은데?”

바바슬로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카루스의 명에 따라 율리아를 호위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아카데미를 찾은 참이었다.

바바슬로프가 율리아의 곁으로 다가와 다시 물었다.

“졸업시험 보러 왔을 때, 기억나?”

“그럼요. 바바슬로프가 초콜릿을 사 줬죠.”

“난 네가 공부하다가 머리가 홱 돌아 버린 녀석인 줄 알았어.”

율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묻자, 바바슬로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시험이면 긴장해야 정상이잖아. 넌 인마, 그날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네 뒷모습이 어땠는지 모르지?”

“어땠는데요.”

“들어갈 때는 뭔가 귀찮은 일을 빨리 해치우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세상 급해 보였는데, 나올 때는 콧노래를 불렀다고.”

“제가요? 콧노래요?”

“그래. 발걸음은 또 왜 그렇게 춤추는 것처럼 가벼워 보이던지. 지긋지긋한 시험이 끝나서 그러나, 오해했다니까.”

“안에서 크리스틴을 만나서 그랬을걸요.”

“어째 그 이름은 오랜만에 들어도 재수가 없냐.”

바바슬로프가 팔뚝을 벅벅 긁었다.

두 사람은 아카데미 도서관을 향해 걸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바바슬로프는 율리아가 이제 백작이 되었으니 그에 따른 예의를 차려야겠다고 말했고, 율리아는 제발 그러지 말라며 그를 따라 팔뚝을 벅벅 긁었다.

“율리아 아르테?”

그때 도서관 앞에서 누군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브레웨 학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단상 위에 꼿꼿하게 서서 짓궂은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그는 그때보다 조금 구부정해진 모습으로 나타나 율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아니…… 네 소식이야 항상 살펴 듣고 있다마는.”

학장이 허허 웃으며 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아르테 백작이라 불러야겠지.”

“아뇨. 학장님. 그냥 율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율리아가 그의 손을 잡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의 훈훈한 대화에 바바슬로프의 얼굴에도 푸근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네가 브레웨 훈장을 받은 뒤부터 아카데미에 좋은 변화가 생겼단다. 귀족들은 전보다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됐고, 입학을 희망하는 평민 아이들도 많아졌지.”

“다행이네요.”

“정말 재밌는 일이 뭔 줄 아느냐? 똑똑한 평민 학생을 후원하려는 귀족들도 늘었다는 게야.”

“왜요?”

“너 같은 아이가 또 있으려나 싶어, 미리 친분을 다지려는 것이지.”

학장이 크허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율리아가 그를 따라 웃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올해엔 브레웨 훈장을 받은 학생이 없었다고 들었어요.”

“크리스틴 마조람의 졸업 자격을 취소시키고 나서는 다들 눈에 핏발이 서 있었거든. 성적이 적당히 좋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줄 수는 없다고, 검증을 이중 삼중으로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다들 절 원망했겠네요.”

“원망 반, 찬사 반.”

학장이 특유의 짓궂은 미소를 띠고 율리아를 흘겨보았다.

“복수에 성공해서 행복하냐?”

“네?”

“궁금했거든. 네놈이 학창 시절부터 뭔가를 꾹꾹 눌러 참는 기색이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폭발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

“그것 때문에 행복해지진 않은 것 같아요.”

율리아가 학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선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어요. 행복해지진 않았지만, 속은 아주 후련합니다.”

“그럼 되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된 거야.”

학장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네 연락은 받았다. 도서관 출입을 허락해 달라고?”

“네, 금서나 고서까지 다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하하핫! 레위시아 왕의 수석 시녀에게 그 누가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녀석아. 넌 아직 멀었어. 권력이란 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야.”

아뿔싸. 백작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학장이 율리아의 손을 잡고 걸음을 보챘다.

“뭘 찾고 싶어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너라.”

“고맙습니다.”

도서관 사서는 학장이 율리아의 손을 잡고 직접 나타나자 어쩔 줄을 모르며 열쇠를 꺼내 주었다.

학장은 수고하라며 율리아의 어깨를 두드리고 사라졌다. 바바슬로프도 해 질 무렵에 데리러 오겠다며 물러났다.

율리아는 고요한 도서관에 혼자 남겨졌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은 넓은 아래층에 있고, 그녀가 찾은 곳은 높은 천장까지 오래된 책이 가득 쌓인 꼭대기 층이었다.

편한 옷을 입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율리아가 이동식 사다리를 꺼냈다.

그녀가 찾으려는 건 바이칸 황실의 역사와 황제 크세노에 관한 기록이었다. 널리 알려진 정보엔 관심 없고, 이왕이면 숨겨진 폭로자의 증언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어디 보자.”

그녀는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원하는 책이 아니면 미련 없이 제자리에 되돌려 놓고, 원하는 정보가 한 줄이라도 있으면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크세노 황제는 태어나기도 전에 다음 대의 황제로 내정되어 있었다. 이토록 먼 남부의 도서관에도 그가 얼마나 선택받은 권력자인지, 바이칸의 전대 황제가 그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다양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바이칸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데네브라가 말한 대로, 크세노는 젊은 시절부터 정복 전쟁을 핑계로 수없이 바깥으로 나돌았음에도 반역 한 번 일어나지 않았을 만큼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알려졌다.

‘정말 그럴까?’

율리아는 그게 제일 이상했다.

아무리 강한 황제라도 반역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오르테가의 귀족들이 특별히 탐욕스럽고, 제국의 귀족들은 그렇지 않다는 건 이상하다.

누군가는 반역을 꿈꿨을 것이고, 시도했을 것이고, 실패했을 것이다.

어쩌면 황제는 자신의 위명을 지키기 위해 그 모든 기록과 증언을 없애 버린 건 아닐까.

이쯤 되니 크세노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는 건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율리아는 방향을 바꾸어 최근 2, 30년 동안 바이칸에서 사라진 귀족 가문에 대해 찾아보았다.

누군가는 병에 걸려 죽고, 또 어떤 누군가는 불행한 사고에 의해 죽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잊힐 수 있지만, 한 가문의 죽음은 그런 식으로 덮기 어려웠다.

그렇다 보니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 다만 그들은 권력자가 아니라서 그 의문을 공론화시킬 수 없었다.

율리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책꽂이에서 뽑아 온 수십 권의 책을 거대한 책상 위에 펼쳐 놓고 같은 이름을 찾아가며 정보를 엮었다.

시간이 흘러 높이 떠 있던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질 때쯤, 율리아가 두툼한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으며 중얼거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정복 전쟁에 매달렸던 이유가 이거구나.”

크세노 황제의 꿈은 대륙 통일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황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수십 만에 이르는 정복군을 데리고 전쟁터로 뛰쳐나갔다.

“반역을 일으키기 전에 전부 죽이려고.”

이제 알겠다.

“전쟁터로 끌고 나가서 적군과 함께 다 죽여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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