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수십 장의 편지가 전령에게 맡겨졌다. 그들은 오르테가에서 가장 빠른 쾌속선을 타고 제국으로 향했다.
크세노 황제가 데네브라를 배신했다는 것, 카루스 란케아를 또 죽이려 했다는 것, 그 많은 귀족과 군사를 한낱 휴지처럼 쓰고 버리려 했다는 것.
사실 이 모든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제국의 귀족들이 어떤 자들인지 생각했다.
오랜 전쟁과 넓은 정복지, 그에 따른 피로가 상당할 것이다. 정복지를 영토로 받은 자들은 융화되지 않는 토착민 때문에 골치를 앓아 왔을 것이고, 분쟁 지역의 귀족들은 제발 이 전쟁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으리라.
그런 자들에게 황제가 영원한 전쟁을 원한다는 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일 것이다.
하물며 요즘 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이어 가고 있으니.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
‘어차피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다.
나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니까.
* * *
며칠이 지났다. 잔뜩 긴장한 레위시아가 거울 앞에 섰다. 6명의 시종이 그 곁에 횡대로 서서 의전용 예복을 하나씩 건넸다.
왕이 되기 전엔 코코가 골라 주던 것들인데, 이제는 예복을 담당하는 시종이 따로 있었다.
코코는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흰색이라는 말만 전달해 놓고 다른 일에 매달려 있었다. 요즘 그녀는 율리아와 온종일 붙어서 소곤거리기 바빴다.
“너희 솔직히 말해. 나 몰래 또 무슨 작당인지.”
레위시아가 투덜거리자 시종들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셔츠를 건넸다. 그는 단추를 하나 잠글 때마다 꼭 한마디씩 투덜거렸다.
“집무실로 오라고 했더니 왕자궁에서 일하겠다고 하지를 않나, 데네브라 황비가 또 만찬 타령을 시작했다고 했더니 혼자 가서 먹어 주라고 하지를 않나.”
그가 단추를 다 잠그자 시종이 이번에는 조끼를 건넸다.
“코코, 율리아.”
속닥거리느라 대답하지 않는 두 명의 시녀에게 레위시아가 서운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왕좌에 앉기 전에는 잘만 챙겨 주더니, 왕이 되니까 나 몰라라 하는 거야? 보통은 그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코코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너희가 나만 빼놓고 비밀 얘기를 며칠째 하고 있으니까!”
“전하께 보고드릴 만큼 확실해지면 당연히 말씀드릴…….”
코코가 어린애 어르듯 레위시아를 달래자 시종들이 또 한 번 입술을 씰룩이며 웃었다.
“왜 웃어. 시녀들한테 따돌림당하는 기분을 너희가 알아?”
“모릅니다만, 전하께서 따돌림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압니다.”
“뭐라고?”
“아까 수석 시녀가 이걸 건넸습니다.”
시종들과 함께 서 있던 늙은 보좌관이 레위시아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두툼한 양피지에 화려한 글씨체가 눈에 띄었다.
“오늘 연설문입니다. 내용은 나무랄 데 없었으나 왕궁 역사 기록으로 남겨야 하기에 제가 옮겨 적었습니다. 이 문서를 바탕으로 연설하시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장난스레 투덜거리던 레위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중해졌다. 조끼 매듭을 다 묶은 시종이 한 걸음 물러나 그가 문서를 다 읽기를 기다렸다.
최근 오르테가의 백성들은 어느 때보다 왕에게 관심이 많았다. 잘생긴 얼굴로만 알려져 있던 2왕자가 운명처럼 왕위에 오르더니, 남부 함대의 도움으로 침략군을 물리치고 적국의 황비를 인질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오르테가의 백성들은 자그마치 20년이 넘은 기간 동안 고향이 바이칸의 속국이라 불리는 걸 참아 왔다. 말이 보호 동맹이지 실상은 식민지에 가까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사절에게 왕이 네 발로 엎드려 기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분노한 백성들이 그 일을 잊으려 죄다 술집으로 몰려갔다는 슬픈 농담이 나돌기도 했다.
그런데 볼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줄 알았던 젊은 왕이 그동안 쌓인 울분을 한 방에 뻥 뚫어 주었다.
전 세계의 조롱을 받던 왕국이 한순간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오르테가는 겁쟁이의 나라가 아니었다.
레위시아의 인기가 급격히 치솟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백성들은 오늘을 기억할 겁니다. 전하의 모습과 말, 표정과 눈빛, 전하께서 보여 주는 미래. 백성들은 무엇 하나 잊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모든 건 어미와 아비로부터, 이웃과 스승으로부터, 벗과 적에게서 이어져 오르테가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부담스러워.”
“훌륭하시네요. 그것이 바로 왕의 마음입니다.”
늙은 보좌관은 오랫동안 선왕을 모셨고, 그가 죽은 뒤에는 레위시아의 곁에 남았다.
선왕이 비록 훌륭한 왕은 아니었으나 보좌관은 그의 두려움을 이해했다. 바이칸은 그만큼 강력한 제국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왕은 달랐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는데도 타인을 아꼈고, 한때는 두려운 마음에 왕위 다툼으로부터 달아났었는데도 다 극복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곧 출발할 시간입니다.”
보좌관이 물러나며 말했다.
레위시아가 한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시종들이 다가와 그에게 남은 예복을 마저 입혀 주었다.
“이제 화 풀리셨어요?”
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시종이 얇은 스카프를 내밀었다. 오르테가의 바다를 닮은 푸른색 스카프였다.
이번에는 레위시아가 그녀에게서 스카프를 빼앗아 들었다.
“화는 무슨. 농담한 거야.”
“연설 중에 목소리가 갈라지거나 실수로 말을 더듬어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진심은 통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왕이 너무 긴장해서 바들바들 떨어도 괜찮을까.”
“그럼요. 제국이 아니라 백성을 두려워하는 왕이라고 소문날 거예요.”
레위시아가 웃으며 물었다.
“겁쟁이의 아들이니 겁쟁이인 게 당연하다고 소문나는 게 아니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긴장도 어느 정도 풀린 뒤였다. 한 걸음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던 코코가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하겠어요. 전하는 오늘 오르테가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실 텐데.”
“……그렇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시종들도 마찬가지인 듯 감개무량하다며 그를 응원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레위시아는 여전히 왕이 된 자신이 낯설었다.
망토 위에 어깨 장식까지 완벽하게 치장한 레위시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할 수 있겠지.”
율리아가 눈썹을 아래로 휘며 웃었다. 거울 속 레위시아를 함께 바라보며,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그럼요. 전하가 누군데요.”
내가 누구더라. 레위시아가 거울을 통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코코와 시선을 마주치곤 입술 끝을 씰룩였다.
코코가 그를 향해 낮게 경고했다.
“엄마라고 하기만 해 봐요.”
“쳇.”
레위시아가 실망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완벽하게 차려입은 왕실 기사들이 그를 호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화기애애하던 실내와는 달리, 바깥 분위기는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이날의 연설은 레위시아가 왕의 자리에 오른 뒤 처음으로 치러지는 외부 행사였다. 선왕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즉위식조차 임시로 치러야 했던 그가 처음으로 백성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했다.
레위시아는 당당하게 중앙 광장으로 나갔다.
수많은 백성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신과 기대, 희망과 간절함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위대한 오르테가의 백성에게, 국왕으로서 말한다.”
그의 연설은 나무랄 데 없었다.
“오늘 우리는 바이칸의 그늘에서 벗어나 남부의 중심 국가로 새로이 도약할 것이다!”
유약하게만 느껴지던 예쁜 얼굴에 조금씩 세월이 쌓이고 있었다. 광장에 모여 있던 백성들은 젊은 왕에게서 느껴지는 간절함에 화답했다.
와아아아아.
광장이 떠나가도록 커다란 함성으로.
오르테가가 바이칸으로부터 독립했다. 정복 전쟁조차 치르지 않고 스스로 속국이 되었던 그들이 가장 먼저 일어선 것이다.
남부가 발칵 뒤집혔다. 오래전에 정복당했던 왕국과 살아남은 왕족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북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르테가의 승전을 축하한다며, 얼마 전에 차지한 평원에 한동안 오르테가의 깃발을 내걸기도 했다.
황제의 사절단이 배에 오른 것도 그즈음이었다.
* * *
율리아 아르테.
크세노 황제가 화려한 깃펜으로 율리아의 이름을 썼다. 그의 글씨는 무척 아름다웠는데, 바이칸 문자 특유의 장중함이 묻어 나오는 필체였다.
그의 책상 위엔 제법 두툼해 보이는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크세노는 그걸 손가락으로 하나씩 넘겨보다가 그 안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초상화를 꺼냈다.
율리아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였다.
앳된 얼굴에 표정이 없는 여자였다. 초상화니까 실물과는 느낌이 다르겠으나, 이목구비는 그대로일 것이다.
초상화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르테가에서 그녀는 이미 상당한 유명 인사였다. 오르테가의 백성들이 가장 사랑하는 귀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율리아 아르테.
브레웨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 노력을 인정받아 레위시아 왕자의 시녀로 들어가 그를 왕으로 만든 여자.
“호르헤.”
“예, 폐하.”
“마조람인가 하는 그 후작 가문의 식솔들은 다 어떻게 죽었느냐? 순서대로 말해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