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율리아가 코코를 데려간 곳은 자신의 저택이었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린다 했더니 결국 돌고 돌아 집이었냐며, 코코가 허탈하게 웃었다.
마차에서 내린 코코가 펄럭이는 치마를 붙잡았다. 율리아는 그녀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 집을 향해 걸었다.
율리아의 집은 인적 없는 바닷가에 있어 무척 고요했다. 바람이 나무를 쓸고 파도가 자갈을 두드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먼 하늘을 나는 새가 꼭 머리 위에서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고백할 게 있어요.”
정원을 가로지르며, 율리아가 노래하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선택한 대적자가 크세노 황제라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그녀는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다.
“상상해 봤어요. 제가 만약 대적자라면.”
“크세노 황제라면?”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복수자가 되어야 했던 카루스는 오르테가에서 남부 함대를 손에 넣었고, 데네브라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카루스를 쫓아 오르테가로 향했다.
“가장 큰 변화라면 그거겠죠. 제가 황제라면 카루스 님을 의심했다가 그 주변인을 의심하고, 마지막엔 오르테가에 관심을 보이게 됐을 거예요.”
“오르테가에서 일어난 변화라면…….”
“이번 삶에서 처음으로 레위시아 전하가 왕이 됐다는 거예요.”
코코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발을 내디뎠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지.”
“네, 저는 황제가 심어 놓은 첩자들이 데네브라 황비만을 감시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너를 찾았겠구나.”
“지금쯤이면 황제도 제 정체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커요.”
“어쩌면 황비의 병력을 움직여 오르테가를 치게 한 것도 네 움직임을 관찰하려 그런 것일 수도 있겠어.”
모두 가정이었으나 진실에 가까웠다.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코가 날카롭게 웃었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이라.”
“저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야.”
코코가 겁먹지 말라며 율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어느새 저택 입구까지 걸어온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코코가 물었다.
“자, 이제 날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뭔지 말해 봐.”
율리아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자라났다. 그녀는 다과를 준비시키겠다며 밖으로 나간 집사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황제가 보낸다는 사절단의 진짜 임무는 패전 협상이 아니에요.”
“하…….”
“저를 확보하는 거죠.”
율리아는 그들이 자신을 납치하거나 협박해서 제국으로 데려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코코가 짜증스레 입술을 씹었다.
“사절단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까 너는 당분간 어디 멀리 가 있어.”
“황제가 우리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도 커요. 그는 저 때문에 원치 않는 죽음을 여덟 번이나 반복했어요.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죠.”
율리아의 말이 길어질수록 코코의 얼굴에서 짜증이 사라졌다.
“대륙 통일이나 정복 전쟁, 황권 강화…… 이런 것보다 저를 확보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할 거예요.”
“어차피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네.”
율리아는 확신했다.
“황제는 미친 듯이 저를 찾아 헤맬 거예요.”
누군가 전력으로 나를 쫓는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율리아가 속삭이듯 던진 질문에 코코가 단호하게 답했다.
“잡히기 전에 잡아야지.”
쫓는 건 황제가 아니라 이쪽이 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 소곤소곤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얘기들이 수없이 오갔다.
코코는 황제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객관적 정보를 쏟아 놓았고, 율리아는 삶을 거듭하면서 체득했던 주관적 해석을 곁들였다.
눈치 빠른 집사가 소리 없이 움직이며 고용인들이 응접실 주위에 다가가지 못하게 막았다.
코코는 데네브라를 황제로 만들려면 바이칸 제국인들이 크세노 황제에게 가지고 있는 정복 황제란 위명부터 쓰레기장에 처박아야 한다고 말했다.
율리아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황제의 처지를 거론하며, 만약 그가 죽거나 행방불명된다면 자연스레 데네브라가 섭정의 자리에 오르리라고 봤다.
그러려면 일단 황비를 폐위시키는 것부터 막아야 했다.
“내일 데네브라 황비가 직접 침략군 지휘관을 심문하게 할 거예요. 제가 미리 대본을 써 줄 테니까 진술을 받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거고요.”
“전하는 이번 기회에 보호 동맹 조약을 파기하고 싶어 해.”
“그거 좋네요. 최대한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좋아요.”
큰 그림은 그려졌다. 황비라는 좋은 배우가 있어 극을 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르테가를 우습게 보고 함부로 굴었으니, 이제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데네브라는 잘할 거야.”
코코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원래 그렇게 멍청하고 거만한 애들이 황제가 되는 거지.”
그런 뒤엔 순식간에 나라를 말아먹을 것이다.
바이칸을 적국으로 두고 있는 오르테가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코코가 즐거이 웃었다.
* * *
황제가 보낸 사절단이 도착하려면 제법 많은 시일이 걸릴 것이다. 산맥을 넘지는 않을 테고, 아마도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오리라고 예상되었다.
율리아는 아침 일찍 데네브라를 찾아가 침략군 지휘관에게 뭐라 말해야 하는지 상세히 가르쳤다.
데네브라는 레위시아처럼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으나, 뻔뻔하게 연기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분노하며 화낼 때 눈부신 재능을 보였다.
“미친놈아! 누가 너더러 진격하라고 했어! 누가!”
“예?”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너희를 국경으로 보낸 건 황제에게 시위하기 위해서였다고! 오르테가와 전쟁을 벌일 거였으면 내가 미쳤다고 측근 몇 명만 데리고 여기까지 왔겠냐고!”
그녀가 오르테가에 온 건 단순히 카루스를 만나야겠다는 충동적 결정이었지만,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황비 전하, 저희는 그저…… 당신이 오르테가에 부당하게 억류되어 있으니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네놈 눈에는 지금 내가 감옥에 갇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느냐? 그리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한들, 확인조차 해 보지 않은 이유는 뭐야! 네놈들은 내 군사야. 내가 주인이라고! 내가 먹이고, 내가 봉급을 주었잖으냐!”
“죄송합니다.”
“네놈들이 휘두르는 무기도, 커다란 군마도, 그 몸뚱어리에 걸친 갑옷도 모두 내가 준 것이다! 그런데 왜 내 말이 아니라 황제의 말을 들어! 왜! 이 미친놈아!”
데네브라가 굵직한 반지를 잔뜩 낀 손으로 지휘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의 사촌인 남자는 순간 울컥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화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비 전하, 블라이스 그 자식이 당신을 배신했다는 걸 조금만 일찍 깨달았다면…….”
“멍청한 놈.”
데네브라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녀는 지휘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분노를 가득 담아 짓씹듯 말했다.
“놈은 처음부터 내 노예가 아니라, 황제의 것이었어.”
“예? 그럴 리가…….”
“황제가 카루스 란케아에겐 남부의 평화를 지키라 명령하고, 블라이스에겐 오르테가에 내란을 일으키라고 명령했다는 건 알고 있느냐?”
데네브라의 입에서 율리아가 지시한 정보가 술술 쏟아져 나왔다.
“내 시종, 보좌, 시녀, 호위 기사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내가 너희를 남쪽으로 내려 보내고, 심지어는 오르테가에 오는 것조차 말리지 않았어. 왜 그런 줄 아느냐?”
잘한다. 율리아가 감옥 밖에서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너희와 카루스가 서로 싸우게 만들려고 했으니까!”
데네브라가 하는 말은 모두 율리아가 시킨 것이었으나, 그녀의 분노만은 진짜였다. 그러니 저들은 속을 수밖에 없었다.
“성공했지. 아주 기뻤을 거야. 내가 억류돼 있다는 거짓말로 너희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저 혼자 기뻐 날뛰었겠지!”
죽이고 싶어 그토록 안달했던 카루스 란케아와 골칫덩어리 데네브라.
크세노 황제는 두 사람의 분쟁을 누구보다 기꺼워했을 것이다.
“멍청한 놈.”
“황비 전하, 저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저 하루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밖에…….”
“어디에 있느냐.”
“예?”
“황제가 보낸 명령서 말이다. 새를 보냈건 전령을 보냈건 진격하라는 명령서는 전달했겠지.”
“여기 있습니다.”
지휘관이 품을 뒤져 명령서를 내밀었다. 한 손으로 종이를 홱 낚아챈 데네브라가 감옥 밖을 향해 거칠게 손을 흔들었다.
“종이와 펜을 가져와라!”
“예, 전하.”
시종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며 종이와 펜을 날랐다. 거만하게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데네브라가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렸다.
“본국의 가문에 보낼 편지를 써라. 황제가 우리를 버렸다고. 나를 배신한 건 참을 수 있으나, 내 가문과 군사를 모두 소모품처럼 쓰고 버렸다는 건 참을 수 없어.”
“아, 알겠습니다.”
“북부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써라. 황제를 대신해서 사력을 다해 북부를 막고 있는 자들은 곧 버려질 것이다. 황제가 평원을 왜 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는 전쟁이 끝나길 원하지 않는 거야.”
잘한다. 율리아가 감옥 밖에서 입술을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바이칸의 귀족들은 미친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영원히 고통받으며 싸우다 죽게 될 것이다.”
데네브라는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잘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