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폐위는 이혼과 다르다. 황제와 이혼한다 해도 데네브라가 바이칸의 고위 귀족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폐위는 달랐다.
만약 황제가 이번 기회에 데네브라를 폐위하고 패전에 대한 책임을 떠넘긴다면 지금까지 그녀가 누려 왔던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가문, 이름, 명예와 지위까지.
“바이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거예요.”
율리아가 말하는 게 사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심장이 없어 가슴이 차가운 신처럼 그녀는 데네브라에게 무감한 선고를 내렸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바이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르테가에서 평생 죄인으로 살게 되는 미래 같은 건.
“카루스 님을 사랑한다고 하셨으니까 이것조차 원하던 결말이 되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저는 레위시아 국왕 전하께 당신을 평생 탑에 가둬 달라고 청할 거예요.”
“율리아 아르테!”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탑 높은 곳에 갇힌 채 평생 남부의 바다나 보면서 살게 하자고 말할 거예요. 왜 화를 내세요?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더 이상한데.”
“내가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잘못했죠. 황비라는 분이 그렇게 책임감 없이 행동하고,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 것도 모자라 전쟁까지 일으켰으면.”
“내가 일으킨 전쟁이 아니잖아…….”
“황제가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돼요.”
크세노가 이 전쟁의 책임을 데네브라에게 떠넘기면 황비는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 된다.
데네브라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이칸에서 권력을 이루는 하나의 축이었다. 실권은 약했으나 황제 다음가는 상징이었다.
그때는 싸우는 것도 자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넘보거나 건방진 소리를 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철저하게 짓밟곤 했다.
그때는 그녀의 곁에 그 일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 명령하면 이루어졌다. 그런 자리였다.
카루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의 권력은 대부분 황제에게서 나오는 거야. 나머지는 가문에서 나오지. 그 두 가지만 빼앗으면 데네브라,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네가 날 탑에 가두겠다고?”
“나로서는 좋은 일이지.”
카루스가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그는 데네브라를 떼어 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넓은 응접실에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다. 율리아는 데네브라가 충분히 고민하도록 기다렸다. 카루스도 그녀의 침묵에 동참하며 숨을 골랐다.
“황비 전하.”
만족스러울 만큼의 침묵이 흐른 후, 율리아가 말을 꺼냈다.
“전하의 사람들을 조사할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내 사람들이라니.”
“전하께서 데려온 시종과 보좌, 호위와 시녀들까지.”
율리아가 눈짓으로 응접실 밖을 가리켰다.
“저들 중 누가 크세노 황제의 끄나풀인지, 누가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일러바쳤는지 알아내야죠. 그러면 황제가 진격 명령을 내렸다는 걸 증명할 수 있잖아요.”
“그걸 증명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폐위당하지 않을 수 있죠.”
율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위대한 정복 황제가 아니라, 남의 군대를 이용해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 놓고 아내에게 패전 책임을 떠넘기려는 졸렬한 남편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게 바로 카루스가 율리아와 함께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왕비궁에 있는 제국인을 모두 감금하고 심문에 들어갔다. 그들이 쓰는 물건과 그들이 머무는 방, 그들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이 조사 대상이었다.
왕비궁에 울음과 고성이 가득 찼다. 제국인들은 변절한 카루스 란케아가 자신들을 모함해 희생양으로 만들려는 거라며 격렬하게 반항했으나, 데네브라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타나 그에게 협조하라고 명령하자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리 나와!”
“이거 놓으시오!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뒤지는 겁니까! 같은 제국인으로서 어찌 이러는 거냐고!”
“말로 할 때 곱게 나와. 멱살 잡혀서 끌려 나오고 싶어?”
바바슬로프가 히죽 웃으며 황비의 시종들을 끌어냈다. 그러곤 방 안으로 들어가 가구를 뒤집고 벽을 뜯었다.
“카루스 님,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동안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황제의 새가 언제 어디서, 몇 번이나 오가는지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바슬로프가 한 시종의 방에서 짧은 서신을 발견했다며 한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안엔 황제가 데네브라의 병력을 향해 진격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끌려 나온 시종이 말도 안 된다며 중얼거렸다. 황제가 보낸 명령서는 확인하자마자 불에 태워 없애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니 안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자식들, 너희 전부 첩자였구나.”
바바슬로프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는 얼마 전에 몰래 빼돌린 서신을 놈들의 방에서 발견한 양 자연스러운 태도로 카루스에게 건넸다.
카루스도 천연덕스럽게 그걸 읽고는 그대로 데네브라에게 건넸다.
황비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네 이놈들…….”
첩자가 한두 명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예상하기도 했다.
“호위대장의 방 창문에서 새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몰래 달아나려는 시녀를 붙잡았습니다!”
데네브라가 종이를 와락 구겨 쥐었다. 그녀의 잇새로 낮은 신음과 함께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 * *
“가서 잠 좀 자라고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였니?”
코코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율리아는 왕자궁으로 돌아와 있었다. 새로 들인 율리아의 전속 하녀가 차와 다과를 준비해 바구니에 담았다. 그러곤 얇은 케이프 두 개를 가져와 율리아와 코코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왜 이래?”
“코코, 우리 바람 쐬러 가요.”
“왜 이러냐고. 너 나한테 뭐 할 말 있구나?”
“네, 비밀 얘기라 아무도 없는 데서 해야 해요.”
율리아가 꿍꿍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코코와 함께 왕자궁으로 돌아온 레위시아가 서운하다며 칭얼거렸지만, 그는 왕의 업무를 마무리 짓기 위해 저녁을 먹은 후 본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꼭 밖에서 해야 하는 얘기야?”
“네, 꼭 밖에서 해야 해요.”
평소엔 이런 일에 고집을 부리지 않는 율리아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자, 코코가 어깨에 힘을 풀고 케이프 매듭을 묶었다.
“그래, 가자.”
암행용 마차가 준비되었다. 코코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율리아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차가 출발한 뒤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코코는 집무실에서 레위시아와 했던 일에 대해 털어놓았고, 율리아는 카루스와 함께 데네브라를 찾아간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마차가 한쪽에 바닷가를 끼고 달리던 때였다. 코코가 창틀에 팔을 올린 채 율리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이제 말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코코.”
“뭐 얼마나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이러는 거야. 난 이제 네가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어.”
“제 대적자가 누군지 알았어요.”
“그래, 네 대적자가…….”
코웃음 치려던 코코가 입을 쩍 벌렸다가 재빨리 다물었다. 그러곤 활짝 열려 있던 창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닫았다.
마차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코코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율리아를 향해 바짝 다가와 물었다.
“누군데.”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
코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이 대륙을 주무르는 최고 권력자의 것이란 걸 아는데도 놀라지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왜 안 놀라는 거예요.”
“아홉 번째의 율리아 아르테를 상대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어중이떠중이가 튀어나오는 것보단 훨씬 설득력 있네.”
코코가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며 바구니를 열었다. 그녀는 커다란 샌드위치를 두 손으로 잡고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곤 우물거리며 씹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카루스 란케아는 알고 있어?”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그에겐 빨리 털어놓는 편이 좋겠어.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가 우리를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는지 그 한계가 정말 궁금하거든.”
“한계요?”
“그가 바이칸을 배신하고 오르테가의 편을 들어줄 거라는 거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런데 율리아, 카루스 란케아는 무혈 제독일 때 가장 가치 있는 남자야.”
리바이어던 함대와 그의 기사단. 코코는 그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황제가 아닌 카루스에게 충성한다는 그 무패의 군단.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율리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코코가 내민 샌드위치를 먹지는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코코, 만약에…….”
“뜸 들이지 말고 그냥 말해.”
“제가 크세노 황제와 전력을 다해 싸워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좋으리라고 생각해요?”
코코가 먹던 샌드위치를 다시 내려놓았다.
왕궁을 떠난 지도 한참이라, 마차는 외진 바닷가에 접어들고 있었다. 답답해진 코코가 다시 창문을 열자 파도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반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코코가 붉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율리아.”
“네.”
“데네브라를 황제로 만들자.”
율리아도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녀의 가슴이 천천히 부풀었다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할 수 있을까요.”
“해 봐야지.”
코코가 말했다.
“네가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가서 싸울 필요가 뭐가 있어.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높이 올라가려면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죠.”
율리아가 코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서 짙은 초록과 화려한 붉음이 촘촘하게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