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최근 데네브라가 패악을 부리는 횟수가 줄었다. 블라이스가 티타니아에서 암살자들에 의해 죽었고, 그 일의 주범이 자신의 사촌이라는 걸 알게 된 뒤부터였다.
처음에 그녀는 그럴 리가 없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뒤부터는 가끔 불쑥 이유도 없이 화를 낼 뿐, 평소보다 오히려 조용하게 지냈다.
드추바 앞바다에서 치러진 해전이 카루스의 대승으로 끝나 지휘관이었던 데네브라의 사촌은 오르테가의 포로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데네브라는 레위시아에게 시녀를 보내 그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레위시아는 그녀의 요청을 무시했다.
“불안해.”
레위시아는 식사 중에도 보고서를 읽었다. 코코와 샤트린, 힌치 백작과 선왕의 보좌들이 함께 애쓰고 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과로로 요절할 뻔했다며 투덜거렸다.
“뭐가요.”
“데네브라 황비가 칼 들고 감옥에 들어가서 내 소중한 포로를 죽이면 어떡해.”
코코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레위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황비가 감옥에 왜 칼을 들고 들어가요. 자기편인 사람을 왜 죽이고요? 그리고…… 소중한 포로라니. 그놈들이 왜 소중해요?”
“내 시녀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레위시아가 보란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네브라는 블라이스를 아꼈단 말이야. 말로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놈이 없으니까 정서불안 환자처럼 안절부절못하잖아. 반대로 그 사촌이라는 지휘관하곤 사이가 나쁜 것 같았는데, 그놈이 블라이스를 죽였으니 복수하고 싶을 수도 있지.”
“말도 안 돼.”
“전쟁에서 이겼으면 모를까, 졌잖아. 죽여도 할 말 없지 않나?”
“데네브라 황비는 지금 끈 떨어진 연이에요. 포로라곤 해도 오르테가에 자기편이 생겼는데, 그를 그런 식으로 없앤다고요?”
코코가 보고서 한 뭉치를 레위시아의 책상에 올렸다. 지금까지 그녀가 검토한 것들이었다.
“포로는 하나가 아니라 둘일 때 더 큰 가치가 있어요. 심지어 하나는 황제의 아내이고, 하나는 고위 귀족이라고요. 황제는 저 두 사람을 구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최소한 그런 시늉이라도 해야 하죠.”
“코코, 세상 돌아가는 게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걸 알잖아. 어제 데네브라 얘기 못 들었어? 왕비궁 앞까지 뛰쳐나와 포로수용소에 가겠다면서 난동을 부렸다며.”
“난동을 한두 번 부렸어야 신경을 쓰죠.”
코코가 코웃음 치며 자리에 앉았다.
레위시아는 제 앞에 놓인 보고서를 보며 우울한 낯을 했다.
“왜 일은 해도 해도 줄지를 않는 거야. 왕은 난데, 내 일 처리 속도가 너보다 느린 것도 짜증 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거죠.”
“너는 왜 잘하는데?”
“전하보다 영리하게 태어난 걸 어쩌라고요?”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전하는 저보다 예쁘게 태어났잖아요.”
“내 얼굴이 역사에 뭐라고 기록될지 궁금하다, 이제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서류를 읽던 샤트린이 결국 책상에 엎드렸다.
“으흐흐흣!”
어깨와 등이 들썩거리도록 웃는 그녀를 보며, 레위시아가 신경질을 부렸다.
“야, 넌 왜 웃냐. 뭐가 그렇게 웃겨? 지금 이 상황이 우스워? 바이칸의 황제가 아내와 부하를 내놓으라며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왕국의 유일한 공주라는 게…….”
“전하, 황제는 못 쳐들어와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북부가 대승을 거두었잖아요. 거길 막기에도 급급할 텐데 여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어요. 카루스 란케아가 아직 황제의 편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그가 황제의 명이라는 가짜 방패를 들고 남부를 수호하고 있는데 개똥 멍청이가 아닌 다음에야.”
“왕국의 유일한 공주라는 게 기껏 선택한 단어가 개똥 멍청이냐.”
레위시아의 집무실엔 코코와 샤트린이, 회의실에선 힌치 백작과 보좌관들이 일하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힌치 백작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리자, 코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아는 언제 오는 거야.”
“휴가는 네가 제안했잖아.”
“그래서 지금 후회하고 있잖아요.”
율리아가 요즘 잠을 못 잔다는 말에 며칠 쉬고 오라며 억지로 내보냈더니, 사람 하나 빠진 게 이렇게 큰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코코가 율리아 몫의 서류를 제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곤 뒤늦게 식사를 마친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귀족들의 의견서는 힌치 백작과 보좌관들이 처리할 거예요. 율리아가 해야 할 것들은 제가 볼게요. 왕궁 관리는 공주님이 해 주실 테니, 전하께서는 바이칸에서 보낸다는 사절단에 집중하세요.”
“알았어.”
“이번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쪽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승자라는 걸 확실히 하는 거예요. 피해 보상에 패전 책임까지, 두 배로 뜯어내야 마땅해요.”
“코코, 샤트린.”
레위시아가 입을 닦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러곤 코코와 샤트린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보호 동맹 조약을 파기할까 해.”
코코는 율리아가 저택에서 쉬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날도 왕궁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데네브라가 있는 왕비궁 앞이었다.
“율리아 시녀님?”
데네브라의 시녀가 반가운 기색으로 서둘러 응접실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안 보이셔서…… 어머.”
시녀가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율리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는 카루스 때문이었다.
“카, 카루스 란케아 님…….”
“황비께선 안에 계신가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데네브라의 시녀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율리아는 넓은 응접실 한쪽 소파에 앉았다. 카루스도 그녀의 곁에 앉아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안에서 데네브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고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카루스의 예상과는 달리, 벌컥 문이 열리고 데네브라가 나타났다.
“카루스!”
죄인이라기엔 너무 화려하고 당당한 그녀의 자태에 카루스가 눈썹을 확 찌푸렸다.
“오랜만입니다.”
“하……. 내가 그렇게 찾을 때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더니, 율리아가 있으니까 잘 길들인 개처럼 따라오는구나.”
“그렇습니까.”
카루스는 데네브라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 저 말뿐인 여자의 투정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율리아의 눈에 비친 데네브라의 얼굴은 증오와 환희가 적당히 뒤섞여 불안해 보였다. 황비는 카루스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어린애 같았다.
“앉으세요.”
율리아가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주인과 방문객이 뒤바뀐 상황이었으나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데네브라의 시녀가 차와 다과를 준비할 때까지, 율리아와 카루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데네브라는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기고만장한 얼굴이구나. 너희가 이룬 승리는 단순히 내 멍청한 사촌이 바닷길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냐. 애초에 그놈들은 바이칸의 정복군이 아니야.”
“아닙니다.”
카루스가 찻잔을 한 바퀴 돌렸다. 그들 사이에 그윽한 차향이 번졌다.
“이번 승리는 전적으로 블라이스의 공이었습니다.”
“뭐?”
“그가 놈들에게 배를 타고 오라고 말했기 때문에…….”
“블라이스가 왜?”
데네브라는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블라이스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는데, 도주하는 길에 그런 짓까지 저질렀을 줄은 몰랐다.
카루스가 정말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내뱉듯 딱딱하게 말했다.
“그는 율리아를 사랑했습니다.”
응접실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데네브라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가 이내 멍하니 풀렸다. 그녀는 카루스의 그 한마디로 모든 걸 이해했다.
“너 때문에…… 죽었구나.”
“네.”
“달아나는 길에 우연히 내 사촌과 군대를 마주친 거야. 그래서.”
“네.”
“말하지 않았느냐. 놈이 널 사랑하는 이상, 절대 네 곁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데네브라가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율리아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카루스까지 데리고 와서 블라이스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나를 능멸하고 조롱하려고? 그런 거라면 한참 잘못 짚었다.”
“황비 전하, 크세노 황제는 당신을 폐위할 거예요.”
데네브라가 말문을 잃었다. 율리아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피해 보상과 패전 책임, 이 모든 걸 전하께 떠넘길 거고요.”
“내가…… 내가 왜!”
“그런 뒤엔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죠.”
아마도 샤트린 공주가 거론될 것이다. 샤트린은 끔찍하게 싫어하겠지만, 왕족에게 있어 국가를 위한 혼인 외교는 의무와도 같았다.
“이혼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원하던 결말인가요?”
율리아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쏟아질 때마다 데네브라가 얼굴에서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모르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카루스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왜 이제 와 크세노를 배신하는 거냐! 그동안 참았던 이유는 뭐고!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크세노를 따르지 말았어야지!”
“율리아가 오르테가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뭐?”
“율리아가 남부에 있으니까 크세노 같은 무뢰배가 이곳을 짓밟지 못하도록 지키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할 말을 잃은 데네브라가 삐걱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잔뜩 날이 서 있던 그녀의 눈에서 독기가 빠져나갔다. 위협적으로 율리아를 향해 있던 몸에서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소파에 무너지듯 몸을 기댄 데네브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도 너를 사랑하는데…….”
카루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너를 위해서 뭐든 다 버릴 수 있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 건 견딜 수 있었다. 카루스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였으니까. 어쩌면 부모나 저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는 철벽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랬던 그가 율리아를 위해 싸우겠다고 말했다.
“황비 전하.”
율리아가 데네브라에게 물었다.
“이대로 폐위당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