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39/319)

209화

데네브라의 병력이 티타니아를 넘어 오르테가를 침략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레위시아는 율리아로부터 그 소식을 듣자마자 보좌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말에 올랐다. 북쪽 국경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율리아와 카루스도 그와 함께 달렸다. 병사들에겐 비상 대기 명령이 떨어졌고, 귀족들은 모두 왕궁에 모여 밤샘 회의에 들어갔다.

“군대가 티타니아를 넘으려면 시일이 아주 오래 걸려요. 그들은 정찰병을 먼저 보내거나, 어쩌면 기습 부대를 따로 운용할 수도 있죠.”

“같은 수라면 이쪽이 유리해. 놈들은 산맥을 넘는 동안 가진 체력을 전부 써야 할 테니까. 전투 마차나 공성 병기는 꿈도 꾸지 못할 테고.”

“카루스 님, 황비의 군대는 얼마나 강하죠?”

“지휘관은 전쟁보다 정치에 능하고, 병사들은 용병과 같지.”

“이해득실을 따지겠네요.”

율리아와 카루스의 차분한 평가에도 레위시아의 얼굴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티타니아 초입에 도착한 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 대피할 수 있도록 병사를 배치했다. 그런 뒤엔 주위를 돌아보며 지형을 살폈다.

율리아가 산비탈에서 굴러떨어진 블라이스를 발견한 건 기적에 가까웠다.

길도 없는 험한 산비탈 아래, 무성한 수풀 사이에 그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매혹적인 외모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상태가 엉망이었다.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죽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블라이스!”

산비탈 위에서 암살자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율리아와 카루스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낭패라는 표정을 하더니 목표였던 블라이스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판단한 듯 그에게 마지막 공격을 퍼부었다.

블라이스는 벌떡 일어나 율리아에게 달려왔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몸에서 죽음의 냄새가 났다. 날카로운 무기가 그의 등을 헤집고, 입에선 검은 피가 울컥 새어 나왔다.

“블라이스, 정신 차려요. 마을이 바로 앞에 있어요. 치료사를 데려올 테니까…….”

카루스와 바바슬로프가 암살자들을 순식간에 처리했으나 블라이스의 상태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

“율리아.”

카루스가 다가와 블라이스를 바닥에 눕히고 그의 몸을 살폈다. 그러곤 율리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소용없어.”

감염된 상처를 치료하기엔 너무 늦었고, 블라이스의 호흡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더는 흘릴 피도 없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죠.”

“율리아.”

치료사를 부르려 몸을 일으키는 율리아를 블라이스가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뚜렷했다.

“황비의 군대는 배를 타고 올 거야.”

“……뭐라고요?”

“드추바 섬으로…… 배를 타고 올 거야. 남부 함대로 맞서는 게 좋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배를 타고 오다니?”

블라이스는 병력의 규모와 지휘관의 이름,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까지 천천히 털어놓았다.

“지금쯤이면 항구에 도착해 배를 구하고 있을…….”

“블라이스!”

그가 또 한 번 검은 피를 토했다. 율리아에게 박혀 있던 시선이 허공을 헤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블라이스가 중얼거렸다. 나는 죽은 거냐고도 물었다.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져 율리아는 그의 입가에 귀를 가까이 갖다 대야 했다.

블라이스가 계속 율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를 찾는 듯 손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카루스와 레위시아, 바바슬로프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율리아가 그에게 말했다.

“저 여기 있어요.”

그러자 블라이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능글맞거나 교활해 보이지 않는, 다정한 미소.

율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블라이스가 입술을 움직여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율리아가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먼 곳으로 떠난 뒤였다.

* * *

블라이스는 티타니아에 묻혔다. 마을을 떠날 필요가 없어진 주민들이 달려 나와 기꺼이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율리아는 블라이스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긴 로브가 바람에 휘날렸다. 산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냉기를 실어 날랐다. 이제 곧 가을이 올 것이다. 여름이 끝나고 있었다.

왕실 기사들이 다가와 레위시아와 율리아에게 말했다.

“저희도 빨리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

레위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루스와 바바슬로프는 남부 함대를 움직이기 위해 먼저 떠나고 없었다. 레위시아는 율리아와 함께 남아 블라이스의 무덤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안녕……이라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작별 인사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레위시아가 무덤 앞에 들꽃 한 무더기를 내려놓았다.

“이상한 기분이군.”

“저도요.”

“블라이스가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부왕을 무릎 꿇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고소하면서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어. 이후엔 언제든 기회가 되면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했고…….”

“저도요.”

“그런 놈이 오르테가의 은인이 되다니.”

블라이스가 죽기 전에 털어놓은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의심 많은 바바슬로프가 암살자들을 심문한 결과 황비의 병력은 정말로 바다를 통해 온다고 했다.

오르테가엔 완전히 카루스에게 돌아선 남부 함대가 있었다. 수가 적긴 하지만 해군도 있었다. 놈들이 서남부 거대 항로를 이용해 드추바 섬으로 향한다면 해적 세력을 이용해 교란 작전을 펼칠 수도 있었다.

“안녕이라…….”

레위시아는 마지막 순간 멀쩡한 사람처럼 일어나 율리아를 끌어안았던 블라이스를 떠올렸다. 그 역시 그 순간엔 어떤 이성적인 판단이나 계산 같은 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교차점, 그곳에 선 사람에겐 간혹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어쩌면 블라이스에겐 그 기적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찾아온 게 아닐까.

안녕. 그건 혹시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었을까. 사랑한다는 말 대신 쏟아 낸 고백은 아니었을까.

율리아가 무덤에 손을 올리고 마른 흙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울퉁불퉁하던 표면이 조금씩 고르게 변했다. 군데군데 섞여 있던 돌과 나무뿌리를 모두 걷어 낸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죠.”

율리아가 먼저 돌아섰다. 말에 오르는 그녀에게선 한 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을의 시작과 함께 데네브라의 병력이 해로를 통해 남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남부 함대와 손을 잡고 바다를 통제하며 오르테가를 압박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남부 함대는 이제 바이칸의 황제가 아니라 카루스 란케아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드추바 섬 앞에서 벌어진 두 세력 간의 해전은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황비의 군대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하는 싸움이 어떤 것인 줄 몰랐다. 반면 카루스는 바다 위에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던 영웅이었다.

절반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고, 절반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카루스 란케아는 그들을 일컬어 ‘남부의 평화를 원하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침략을 일삼은 배신자’라며 분노했다.

레위시아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데네브라 황비가 오르테가에서 저지른 폭거에 점잖게 항의하려 했으나, 제국은 선전포고도 없이 침략군을 보냈다.’라며 이 일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북부 패전국 연합이 바이칸 제국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고 평원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바이칸의 정복 전쟁이 패전국들의 독립 전쟁이라 불리게 된 순간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