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하.”
블라이스가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티타니아 중턱 갈림길을 눈앞에 두고 다리에 힘이 풀린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프지 않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진 지도 오래였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다리에 경련이 일었다. 넘어질 때도 아프지 않더니 갑자기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블라이스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곤 부츠를 벗어 내팽개치고 다리를 주물렀다.
능선에서 만났던 암염 상인들은 분명히 경고했다. 봇짐장수인 그들도 만만히 넘을 수 없는 게 티타니아라고. 그러니까 몸을 아껴야 한다고.
하지만 블라이스는 율리아에게 돌아가야 했다.
‘바이칸 국경에서 제일 가까운 항구가 어디더라. 놈들이 거기까지 빠르게 간다고 해도 배를 구해 보급을 싣는 데만도 며칠은 걸리겠지.’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 군대가 움직이는 것엔 엄청난 속도 차이가 있다. 이대로라면 상당한 여유를 두고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힘주어 다리를 주무르던 블라이스가 핏물이 배어 나온 양말을 벗었다. 발톱이 빠지려는지 헐거웠다.
그는 훈련된 전사였으나 험한 산지에서 열흘 넘게 이어진 강행군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쳤구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데네브라의 병력이 오르테가를 침략할 거라는 걸 깨닫자마자 그의 머릿속엔 온통 이 사실을 율리아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치 잘 훈련된 개처럼 주인에게 돌아가고 있다. 자아를 빼앗긴 노예처럼, 족쇄를 사랑하게 된 죄인처럼.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 좀 어떤가. 내가 그러고 싶다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런 계산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데. 머리가 아니라 심장을 믿고 살아 보겠다는데.
어차피 영혼은 이미 건네주고 없었다.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고향으로 돌아가 독립을 위해 싸우고 싶어 하리라고 여겼다. 그녀의 판단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그의 이름으로 전쟁 자금을 대고, 공성 병기까지 보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가슴이 크게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율리아를 떠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떠날 때는 한없이 무겁던 걸음이 돌아갈 때는 구름처럼 가벼웠다. 발톱이 빠지고 다리에 경련이 일어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가서 율리아에게 그가 국경에서 뭘 봤는지 말하고, 그녀가 어떤 기상천외한 수로 황제와 싸울지 지켜보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늦여름, 태양을 머금고 우거진 티타니아는 그녀의 눈동자처럼 짙은 초록이었다.
“블라이스.”
그림자가 졌다. 여럿이었다. 블라이스의 입에서 끈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
꼬리가 붙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놈들은 산맥을 넘느니 배를 타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뿐, 블라이스를 신뢰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 꼬리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던 블라이스가 양말과 부츠를 다시 신었다. 그러곤 애써 멀쩡한 척 몸을 일으켰다.
“왜들 이래?”
“널 감시하라는 명령이었다.”
“너무하네. 이런 개고생까지 해 가면서 살려 줬더니.”
“수상한 모습을 보이거든 처리하라고도 하셨지.”
그들은 암살자였다. 정찰대처럼 무장하고 있었으나 그들이 가진 무기와 움직임을 보니 전부 암살자였다. 모를 수가 없었다. 블라이스가 데리고 다니던 이들도 모두 그들과 같았다.
“내가 왜 수상해.”
“이 험한 산을 넘으면서 잠도 안 자고,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더군. 계속 뒤를 확인하면서 우리를 견제하기도 했지. 평소의 너라면 뻔뻔하게 게으름을 부렸을 거 아닌가. 급할 것도 없는데.”
“그게 뭐가 수상해? 데네브라 님의 밀명을 받았다고 했잖아.”
“블라이스, 우리는 네가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북부에 넘겼다는 걸 안다.”
말문이 막혔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여기서 나오다니. 그 불길한 보석은 그렇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고도 모자라, 잠시 거쳐 간 블라이스까지 노리고 있었다.
“고향에 미련이 남은 건 그렇다 쳐도 바이칸을 배신하면 안 되지. 그런 네가 이번에도 황비 전하를 배신하고 오르테가를 선택했을지 누가 알겠나.”
“억지 부리지 마, 이 새끼들아. 너흰 그냥 날 죽이고 싶은 거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군.”
암살자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정신만은 멀쩡했다. 고통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처가 깊었다. 깊게 베인 옆구리에 응급약을 붙이고 천으로 꽉 묶었으나,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터져 다시 피가 새어 나왔다.
암살자는 12명이었다. 놈들이 무기를 꺼내자마자 내리막길을 달려 달아나기 시작한 블라이스는 도주 과정에서 운 좋게 그중 절반을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지고 현기증이 났다. 이대로 멈추면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힘겹게 산맥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였다. 몇 걸음 걷다가 비틀거리고, 또 몇 걸음 걷다가 넘어지던 블라이스에게 놈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있다!”
지독한 것들. 웃음이 났다.
그는 1년 반쯤 전에 카루스 란케아와 그의 부하들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이백여 명의 레인저 부대를 보낸 바 있었다.
저들 중 일부는 그 부대 출신일 것이다. 그때도 데네브라의 사병을 움직였으니까.
인과응보 같은 건 믿지 않았는데. 세상은 나쁜 인간들에 의해서만 움직이기에 착한 놈들은 언제나 멍청하게 손해만 보다가 이용당하고 죽는다고 믿었다.
“산맥을 벗어나면 안 돼! 빨리 죽여!”
곧 평지였다. 티타니아 초입엔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거기까지만 가면 놈들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이를 악다문 블라이스가 몸을 일으켰다. 고통이 심해, 그는 자신이 짐승처럼 신음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길도 없는 비탈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가던 그가 나무뿌리에 걸려 휘청거리다 굵은 나무에 몸을 부딪쳤다. 이제는 흘릴 피도 없었다.
어디선가 끔찍한 악취가 났다. 코가 썩을 것 같은 냄새였다. 블라이스는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멈춰라, 블라이스!”
단도가 날아와 발치에 박혔다. 놈들에게 거의 따라잡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블라이스가 다시 몸을 던졌다. 이제는 두 발이 아니라, 굴러서라도 비탈을 내려가야 했다.
신음은 비명이 되고, 이내 검은 피가 역류해 입 밖으로 쏟아졌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졌는지 몰랐다. 돌부리에 머리를 찧은 것도 모자라 뼈 부러지는 소리까지 났다. 시야가 캄캄해지더니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안 된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찾았다. 그를 채워 줄 단 한 사람. 그토록 찾아 헤매었으나 곁에 머무는 것조차 허락해 주지 않는 차가운 여인.
율리아를 사랑하는 건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그는 호수가 품고 있는 마력에 이끌려 위험한 줄도 모르고 얄팍한 얼음 위에 발을 내디딘 무모한 사내였다.
그에겐 그게 사랑이었다. 처음엔 동질감이라 착각했고, 이후엔 동경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영혼까지 제 손으로 건네주고 있었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율리아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그녀는 블라이스가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란다고 여겼지만, 사실 북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향이 불에 타 사라져도, 이 세상이 멸망해도, 그에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알 게 뭔가.
나는 이미 글러 먹은 놈인데.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인데.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생명. 아무도 나한테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으니까 나 역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데.
잘못된 나를 세상이 방관했으니 뭐든 감수해야지.
잠이 쏟아졌다. 블라이스는 여기서 눈을 감으면 이제 편해지리란 걸 알았다. 더는 아프거나 고통받지 않고, 더는 분노하거나 외롭지 않아도 되었다.
율리아에게 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웃음이 나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블라이스, 이 글러 먹은 놈. 마지막까지 기생충 노릇이나 하다가 쓸모없는 놈으로 죽다니.
다시 잠이 쏟아졌다. 이제 버틸 수가 없었다. 생각을 멈춘 블라이스가 여린 한숨과 함께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블라이스!”
율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으려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율리아의 목소리가 귀에 닿자마자 잠이 확 달아나더니 몸이 가벼워졌다.
환청은 아니었다. 눈앞에 정말 율리아가 있었으니까.
긴 로브를 두른 율리아가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달려왔다. 블라이스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산맥 초입 마을 가까운 곳까지 내려와 있었다.
“블라이스!”
율리아의 머리에서 로브가 벗겨졌다.
안 돼.
블라이스를 쫓는 놈들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발치에 꽂히던 단도를 기억했다. 아니나 다를까, 등 뒤 비탈에서 조급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 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의 몸은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상처투성이였다. 몇 군데 뼈가 부러졌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몸을 일으켰고, 달려오는 율리아를 품에 안았다.
“아…….”
퍼억. 등에 뭔가 날아와 박혔다. 하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몸을 앞으로 밀어낼 만큼 묵직한 힘을 담은 암기가 날아와 블라이스의 등을 난도질하며 박혔다.
“율리아! 비켜!”
“산비탈에 있다! 잡아!”
율리아와 함께 온 카루스와 바바슬로프 그리고 몇몇 기사들이 빠르게 몸을 날렸다.
블라이스는 율리아를 놓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멍하니 생각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땐 내가 네 구원자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