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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화 (237/319)

207화

“예?”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데네브라의 것이라니. 그렇다면 황비가 남편인 황제를 배신하고 북부에 전쟁 물자를 지원했다는 소리인데.

“황비와 그녀의 측근인 블라이스 백작이 북부에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는 첩보가 있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리고 데네브라는 지금 남부에 있지. 그놈의 사랑에 미쳐서.”

황제는 꼭 혼잣말하는 사람 같았다. 당황한 지휘관들이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그들에게 대답은 해 주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대충 내뱉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후퇴한다.”

“폐하!”

“평원을 내주고 인근 도시에서 보급을 확충해라.”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걸음이라도 물러났다간 패전국들이…….”

황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흡사 고함을 지를 기세로 성토하는 지휘관들을 내버려 둔 채, 심복 호르헤와 함께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호르헤.”

“예, 폐하.”

“그러고 보니 카루스가 사랑에 빠졌다고 했던가?”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요. 그래서 데네브라 황비께서 크게 분노하시어 곧장 남부행을 결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상대가 누구라고 했었지?”

그때는 데네브라의 행태를 조롱하며 가볍게 웃어넘겼던 황제가 다시금 관심을 내보였다.

호르헤는 머릿속을 뒤져 그가 원하는 정보를 찾아냈다.

“황비 전하를 찾아온 오르테가의 귀족이 말하길, 그 상대는 율리아 아르테라고 했습니다.”

“율리아 아르테?”

크세노의 눈가에 미약한 경련이 일었다. 그가 웃는 얼굴 그대로 다시 물었다.

“레위시아 오르테가를 왕으로 만든 시녀들의 이름이 뭐라고?”

“코델리아 힌치와 알렉사 콴, 그리고 율리아 아르테입니다.”

“하…….”

크세노가 버석하게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의 경련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를 드러낼 기세로 크게 미소 지은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물었다.

“마지막 해적왕의 유서를 가져간 놈은.”

“주벤 아르테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 황제의 명령으로 주벤 아르테의 흔적을 쫓던 암살자들이 전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대단한 실력자의 솜씨였다. 그들 모두 일류였으나, 반격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했다.

너로구나.

미칠 듯한 분노와 희열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르테, 너로구나. 너도 나를 찾고 있었구나.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리고, 내가 네게 닿기를 기다렸구나. 과연 나의 대적자답다.

찾았다. 푸른 바다의 환초가 그의 대적자로 선택한 자.

율리아 아르테.

* * *

데네브라는 크세노를 사랑하지 않았다.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황제는 황금의 성 같은 존재였다.

“권위적이고 자신감이 넘치지. 너 같은 변두리 왕국의 시녀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타고난 정복자야.”

“그리고요?”

“예전에는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제법 믿음직스러웠지. 황제가 정복 전쟁에 빠져 수시로 황성을 비우는데 단 한 번도 반역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어. 크세노는 황제의 성, 그 자체야.”

“예전에는?”

율리아가 되물었다. 그녀는 데네브라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예전에 그랬다는 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네요?”

데네브라의 눈에서 약간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율리아를 지그시 노려보던 그녀가 잠자리를 준비하던 시녀들에게 문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나가.”

“예, 전하.”

시녀들이 발소리도 없이 문밖으로 나갔다. 넓은 침실엔 데네브라와 율리아뿐이었다.

“크세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데.”

데네브라가 드레스 가운을 벗고 침대에 앉았다. 커다란 침대가 출렁였다.

“내가 왜 너한테 그걸 말해 줘야 하는지, 그 이유 정도는 알려 줘야지. 샤트린 공주를 죽이려다 실패했으니 너희가 날 가둬 두는 거야 이해하겠는데, 꼭 같은 편이라도 된 것처럼 굴면 곤란해.”

“전하.”

“난 크세노가 싫어. 그래도 그가 내 남편이자 바이칸의 황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데네브라는 황비답게 말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잠옷 차림으로 그냥 침대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그녀의 눈빛과 태도, 말투 모든 게 권위적이었다.

그런데 율리아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데네브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황제가 당신의 사병들에게 명령을 내렸어요. 황비 전하가 오르테가에 억류되어 있으니 당장 티타니아를 넘어가서 구출하라고요.”

“뭐? 그럴 리가.”

데네브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긴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아 앉았다. 그러곤 한쪽 팔을 뻗어 코앞까지 다가온 율리아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데네브라의 미지근한 손바닥이 율리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다만 폭력을 쓰려는 것 같지는 않아서, 율리아는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율리아 아르테.”

데네브라가 제법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걸 어떻게.”

“1년 전인가, 그보다 조금 더 됐던가. 그 전까지 크세노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적당히 무시하고 넘어가는 편이었어. 통일 대륙의 초대 황제가 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지.”

율리아의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1년…….”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황실 대연회에서 그의 호위 기사와 첫 춤을 추고 첩으로 삼겠다고 말해도 웃어넘겼지.”

그는 카루스 란케아가 아니면 데네브라가 어떤 남자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치 않았다.

“카루스에게 경쟁의식을 느꼈던 거야. 너무 잘난 부하는 황제를 불안하게 하니까. 그래서 그렇게 죽이려고 노력했던 거고, 내가 카루스를 쫓아다니는 걸 보면서 은근히 재밌어하기도 했단다.”

“그런데요?”

“어느 날부턴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어.”

데네브라는 그걸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여움? 그런 간지러운 느낌은 아닌 것 같지만…… 비슷하려나. 그 미친 작자가 나를 가여워할 때마다 그 잘난 낯짝에 먹은 걸 전부 게워 내고 싶었지.”

데네브라는 황제가 그녀를 증오하는 건 괜찮았지만 동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노라고 말했다.

“점령지 관리를 아무에게나 떠넘기고 황성으로 돌아온 것부터가 이상해. 영토에 그토록 집착하던 사람이…….”

“그때 어땠는데요.”

“미친놈처럼 굴었어.”

데네브라는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것이다.

“갑자기 측근 몇을 죽여 버리고, 또 어떤 자에겐 아무 이유도 없이 상을 줬어. 누군지도 모르는 병사의 이름을 알려 주고 데려오라고 명령하더니, 그에게 높은 작위를 주기도 했지.”

다들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랜 전쟁으로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긴 건 아닌지 염려하기도 했다.

회의엔 참석조차 하지 않고, 귀족들이 그를 찾아도 만나 주지 않았다. 술과 여자에 미친 거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전하를 가엾게 여겼다고요?”

“그래.”

짐승의 썩은 시체를 보는 것처럼, 혐오와 측은함이 공존하는 시선이었다.

“날 죽이고 싶어 했어.”

데네브라가 무슨 짓을 해도 재밌어하기만 하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그녀를 향한 살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뭐라고 했는데요?”

“‘이상하다. 네가 죽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크세노가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그녀를 구하고자 병력을 움직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데네브라는 확신했다.

율리아는 말없이 서 있었다.

‘당신이구나.’

초상화로만 알고 있는 크세노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덩치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팔다리가 길고 선이 진한 사내였다. 사자 갈기처럼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카락에 적당히 치켜 올라간 눈매가 야성적으로 느껴질 법도 했으나, 그 모든 건 철저하게 꾸며진 모습이었다.

‘당신이었어.’

나의 대적자. 푸른 바다의 환초가 나를 선택한 이유.

어느새 율리아의 얼굴에서 손을 뗀 데네브라가 침대에 몸을 누였다.

“크세노가 내 병력을 움직였다면 그건 너희를 멸망시키려는 거지, 날 위해서가 아니야.”

“오르테가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내 병사들은 모두 죽겠군.”

데네브라가 더 말하기 싫다는 듯 이불을 몸에 감고 옆으로 누웠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흐트러졌다. 오르테가에 온 뒤 염색을 하지 못해 조금씩 자란 금발이 눈에 띄었다.

율리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데네브라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멀어지는 율리아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율리아.”

율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블라이스는 떠났느냐?”

데네브라가 왜 블라이스의 안부를 묻는지는 몰랐다. 배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다시 찾으려는 것인지.

율리아가 다시 몸을 돌렸다. 데네브라는 율리아를 등지고 누운 그대로였다.

“떠났습니다.”

“언제 돌아온다고 하더냐.”

“황비 전하,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북부로 돌아가 고향의 독립을 위해 싸울 테니까요.”

“넌 그놈을 몰라.”

데네브라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블라이스가 너를 사랑하는 한, 그놈은 절대 네 곁을 벗어나지 못할 거야.”

노예는 주인을 떠나서 살 수 없다. 기생충은 숙주를 떠나서 살 수 없다. 블라이스는 데네브라의 곁을 떠날 수는 있어도, 율리아를 떠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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