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목이 확 메었다.
카루스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그 순간에도 제 얼굴이 지나치게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걸 신경 쓰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알렉사한테 편지가 왔어요.”
율리아가 카루스의 손에 편지를 쥐여 주었다. 그가 한숨을 삼키며 편지를 읽었다. 그러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카루스의 눈동자가 글씨를 따라 움직이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검은 눈이 묵직한 슬픔으로 침잠하는 것도 지켜보았다.
“네 아버지가…….”
“죽었을 거라고 했잖아요.”
“율리아.”
“괜찮아요.”
괜찮다. 정말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거라는 건 삶을 반복하기 이전부터 확신했던 일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살 수가 없었던 거예요. 제가 어릴 때는 딸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어떻게든 버티긴 했는데, 푸른 바다의 환초에 대해 알게 된 뒤에는 더는 참을 수 없었겠죠.”
“시간을 역행하려고 했군.”
“어머니가 죽기 전으로 돌아가서, 그분을 살리고 싶었던 거예요.”
율리아가 서글피 웃었다.
“아버지는 딸을 버리면서까지 그 보석을 죽어라 찾아다녔는데, 결국엔 제가 그 저주의 주인이 되었어요.”
카루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할 말을 찾다가 삼키는 모습을, 율리아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찌르르 울리더니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저는…….”
괜찮다는 말을 수없이 했는데 왜 목소리가 떨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율리아.”
“아버지가 찾아 헤매던 저주의 완성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제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마조람 후작에게 착취당하기 전으로, 아버지가 죽기 전으로, 버려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기적이죠. 제가 이렇게 끔찍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제가 아는 모든 사람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해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이대로 살고 싶어요. 이번엔 꼭 제대로 죽고 싶어요.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남들처럼 죽고 싶다.
“동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
율리아가 웃었다. 고통을 심어 꽃처럼 피워 낸 미소였다.
카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가 그의 손을 잡자, 이번에도 부드러운 힘으로 몸이 일으켜졌다. 신기했다. 이렇게 커다랗고 딱딱한 손인데, 그녀를 당길 때는 모래처럼 힘이 없었다.
그의 가슴이 눈앞에 있었다. 율리아는 자신이 그의 품에 반쯤 안겨 있다는 걸 알았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카루스의 가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서러워졌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데, 왜 하필 나였을까. 혹시 아버지가 그 보석을 찾아 헤맸던 게 원인이었을까.
“나는…….”
카루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 율리아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네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네?”
“저주에 매달려서라도 네가 살아 있는 시간으로 가고자 할 거라고.”
말문이 막혔다. 자신은 누가 어떻게 되든, 누구에게 어떤 불행이 일어나든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한테 얼마나 깊은 고통이 있을지라도 네가 있는 곳으로 갈 거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겪어 본 적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그런 게 아니라…….”
“율리아.”
네 아픔은 내게 고통이다. 카루스가 속삭였다.
바람을 닮아 닿자마자 흔적처럼 사라지는 고백이었다. 율리아는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의 목소리에 휩쓸렸다.
“너는 나쁘지 않아.”
그가 큰 손으로 율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뻣뻣하기 그지없는 동작인데도, 율리아는 위로받았다.
“너는 할 만큼 했어. 너무 많이 했어. 네가 구원할 사람은 너야.”
“카루스 님.”
“시간을 되돌려서 아버지를 구하러 가지 않아도 돼.”
아무도 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네 탓이 아니고, 네 책임도 아니다.
언제든 원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은 능력일 것이다.
실수했던 때, 실패했던 때, 사랑을 잃거나 사람을 잃었던 때, 혹은 남의 행운을 빼앗아 오고 싶을 때.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부귀영화를 가질 수 있고,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도 있었다. 언제든 원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뜨개질하듯 삶을 엮어 나갈 수 있다. 실이 엉키면 풀고, 코가 빠지면 풀어서 다시 뜨면 되니까.
율리아는 어떻게 해야 저주가 완성되는지는 몰랐다. 알렉사와 맥스웰도 거기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짐작되는 건 한 가지 있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
북부 패전국 연합에 소속된 한 왕국의 광산에서 발견되어 황제의 전리품이 되었다가 황비에게로, 그리고 블라이스의 손을 거쳐 율리아에게, 이후엔 카루스에 의해 황제에게 돌아간 보석.
율리아는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랑’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이라고 판단했다.
푸른 바다의 환초도 마찬가지였다.
바다에서 온 파란색 보석이기에 붙은 이름이겠으나, ‘환초’는 뱃사람들에게 일종의 거점이었다. 때로는 항로의 교차로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 보석을 삼켰는데.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대적자의 것이라면 그 보석은 어째서 아직도 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저주는 다르게 작용하는 것인가. 대적자는 나를 찾아서 뭘 어떻게 하려는 건가.
코코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율리아도 그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카루스 님!”
늦게까지 카루스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율리아가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을 때였다. 왕궁에서 데네브라와 제국인들을 감시하던 그의 부하가 바바슬로프와 함께 달려왔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지금까지는 주기를 가지고 규칙적으로 오가던 새가 오늘 한꺼번에 날아들었습니다.”
“황제의 새?”
“그렇습니다.”
카루스가 바바슬로프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하신 대로 실력 있는 궁수를 배치해 두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쏘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바슬로프가 카루스에게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죽은 새에게서 회수한 것이라고 했다. 카루스가 서둘러 종이를 펼쳤다.
그러곤 턱에 힘을 잔뜩 주고 중얼거렸다.
“크세노 이 개새끼가…….”
“무슨 일이에요?”
율리아가 물었다. 그녀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는지, 목소리가 단단했다.
카루스가 깊이 심호흡하며 말했다.
“황제가 국경에 있는 데네브라의 병력을 움직였어. 오르테가에 억류된 황비를 구출하라는 명령이야.”
“병력…… 군대가 온다고요?”
“그래.”
말도 안 된다. 율리아가 중얼거렸다. 이건 악수였다. 황제가 미치지 않은 바에야 이런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어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멍청한 선택이었다.
죄를 지은 건 데네브라였다. 이제 주변 모든 국가가 이 사실을 알았다. 황제가 저런 식으로 나오면 남부에 연합이 결성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북부의 약진, 카루스의 변절, 황비는 죄인이 되었고 남부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저라면 절대 이러지 않았을 거예요.”
율리아가 말했다.
“공적이 되길 자처하다니.”
그렇게 말한 뒤, 그녀가 날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이었다. 율리아는 남부 함대 사령관저에서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발걸음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율리아 시녀님?”
왕비궁 앞에서 발을 내린 율리아가 빠르게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곤 서둘러 문을 열어 주었다.
“황비 전하!”
데네브라의 시중인들도 율리아를 막지 않았다. 완벽하게 고립된 황비에게 유일하게 말 상대를 해 주는 사람이 율리아였기 때문이다.
“미쳤느냐? 지금이 몇 시인데 막무가내로 찾아와!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널 만나 주는 사람인 줄 아느냐?”
“여쭤볼 게 있어요.”
“요즘 네가 날 아주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정말로 죽고 싶지 않으면…….”
“크세노 황제는 어떤 사람이죠?”
“뭐?”
데네브라가 멍하니 되물었다.
* * *
율리아가 데네브라에게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묻고 있을 때, 당사자인 크세노는 북부와의 전쟁에서 첫 패배를 맛보고 있었다.
“공성 병기입니다!”
후방 보급부대 지휘관이 희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그는 크세노 앞에 부복한 채 절절한 분노를 담아 말했다.
“제국산 공성 병기입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누가…… 누가 저것을 놈들에게 넘겼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공성 병기라고?”
“보급 부대에 타격이 큽니다. 진격하여 앞에서 놈들을 격파하거나, 후퇴하여 재정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대로 진격하길 원했다. 통일 대륙을 눈앞에 둔 황제에게 후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북부와의 싸움에선 반드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야 했다. 그래야 또 다른 반란을 방지할 수 있었다.
회의실을 가득 메운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 언성을 높였다.
크세노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공성 병기라. 북부 패전국 연합이 바이칸에서도 특별히 취급되는 거대 공성 병기를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저건 데네브라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