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2화 (235/319)

42. 안녕

아버지는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아홉 번의 삶을 살면서 율리아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그리움을 거의 버렸다. 이제는 그가 밉지 않았고, 간절하지도 않았다.

실패할 때마다 다시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 ‘만약’이라는 건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만약 아버지가 그때 날 버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버렸다가 금세 다시 찾으러 왔다면.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아니면 죽기 전에 편지 한 장이라도 남겼다면.

나는 조금 덜 힘들었을까.

예전엔 그런 생각을 종종 했다. 종종 했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어쩌면 아주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복수에 도움되는 게 아니라면 쓸모없는 기억으로 분류해 제대로 간직하지 않았으니, 어리고 철없던 첫 번째의 율리아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버려진 거나 다름없었다.

주벤 아르테는 무책임하지만,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어린 딸이나 자신의 삶보다도 죽은 아내를 소중히 여겼다. 엄마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는 딸에게조차 아내와의 추억을 말 못 할 만큼 그의 슬픔은 깊었다. 사랑에 잠식돼 자신을 잃었다.

말할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이었다. 율리아는 알렉사의 편지를 한 손에 든 채 자신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규칙적으로 늘어선 책장과 그 안에 가득 찬 책들. 책상은 넓고 창문은 좁았다. 아직도 새 가구 냄새가 다 빠지지 않아 여기저기에 숯이 놓여 있었다.

좁고 긴 창문 밖으론 바다가 보였다. 작은 백사장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창문을 열면 이제는 자신의 심장 소리보다 익숙해진 파도 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벤 아르테는 바다를 좋아했다. 율리아와 함께 바다를 보는 것도, 백사장을 걷거나 조개를 줍고, 파도에 몸을 던지며 노는 것도 좋아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마다 바다를 찾는 건 어쩌면 그녀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저택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 자신은 왕궁에서 살 계획이니 필요 없다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막상 바닷가 언덕 위에 낮게 지어진 저택을 보니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떠돌던 생각이 났다.

다행이다. 당신이 낭만적인 사람이어서.

당신이 죽었다는 게 내게 기쁜 소식이 아니어서.

율리아가 편지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알렉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편지였다.

한 문장, 한 글자를 쓸 때마다 율리아가 받을 상처를 염려했을 그녀는 결국 어설픈 위로 한마디 적어 넣지 못하고 담백하게 편지를 끝냈다.

그래서 더 큰 위로가 되었다. 편지를 쓰면서 얼마나 고민했을까.

율리아는 집무실을 박차고 나섰다.

“오자마자 미안해요. 급하게 다녀올 데가 있어서.”

“아닙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가려는 율리아에게 집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느새 달려온 트루디가 모자와 장갑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남부 함대 사령관저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도 그녀는 알렉사가 보낸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자꾸 얼굴이 굳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은 복잡하고, 마음이 소란해서 그런 것 같았다.

율리아는 가만히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관저에 도착한 뒤에는 급하게 달려 나오는 바바슬로프를 보고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연락도 없이 와서…….”

“복덩이, 아니…… 백작님. 무슨 일 있어?”

바바슬로프가 율리아에게 바짝 다가와 머리를 기울였다. 그의 시선이 율리아의 얼굴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무슨 일 있구나.”

“아닌데요.”

“멀쩡한 척해 봤자 소용없어. 유령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거든.”

“어떻게 알아요?”

“자세히 보면 알지. 관심을 기울이면 알고. 신경이 쓰이니까 알고. 그걸 계속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고.”

율리아가 애써 웃음 지었다.

“바바슬로프는 다정해요.”

“그걸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는 게 문제야. 나…… 언젠가는 장가갈 수 있겠지?”

“그럼요. 여자들이 곧 줄을 설 거예요.”

바바슬로프는 마차에서 내리는 율리아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실없이 웃음을 주는 편을 택했다.

그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간 율리아는 곧장 카루스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율리아가 두 눈을 깜박이며 바바슬로프를 쳐다보았다. 그가 입술로 ‘거 봐.’라고 말하더니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알아요?”

“뭐가.”

“다들 어떻게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채는 거예요? 제가 어린애처럼 울면서 나타난 것도 아니고, 표정을 관리하는 데는 나름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인데.”

“카루스 님.”

“표정을 관리해야 할 정도로 큰일이란 게 도대체 뭔데.”

카루스가 율리아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힘에 이끌려 창가로 걸어간 그녀는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게 되었다.

열린 창문에서 바닷바람이 밀려들어 와 목덜미를 간질였다. 카루스의 집무실에서도 바다가 보였다.

카루스가 책상에 걸터앉아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의 이마와 눈을 가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은 온통 율리아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율리아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리면.”

“율리아.”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당신도 우리 아버지처럼 길을 잃고 헤매게 될까. 당신의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우리 아버지처럼 낭만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당신은 그와 다르지 않을까. 잠시 슬퍼하다가도 금세 잊고 나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 잘 살지 않을까.

율리아는 그게 궁금했다.

그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어린애처럼 비틀린 욕심이 있었다.

“죽는다고?”

카루스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굳었다. 율리아는 그에게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라는 걸 이해시키려 했지만, 그 전에 그가 말했다.

“그런 건 없어.”

“네?”

“네가 없는 이후의 나라는 건 있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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