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233/319)

204화

“뭐?”

“황제 폐하의 명으로 오르테가를 치려는 거잖아.”

“…….”

“오르테가의 새 왕은 여우 같은 놈이라 너희 움직임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어. 그놈이 왜 겁도 없이 데네브라 님을 가뒀겠냐.”

지휘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들은 며칠 전 오르테가를 향해 진격하라는 크세노의 밀명을 받았다.

오르테가의 젊은 왕이 데네브라를 억류해 인질로 삼았으니, 그녀를 구출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블라이스가 지저분한 몰골로 나타나 산맥을 넘지 말고 배를 타라고 말했다.

“우리가 네놈을 어찌 믿고?”

“믿기 싫으면 나야 어쩔 수 없지. 너희가 다 죽어도 알 게 뭐냐. 데네브라 님이 기댈 사람이 나밖에 없어지면 나는 지금보다 더 출세할 텐데.”

블라이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러곤 지휘관이 자랑하듯 어깨에 매단 휘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내가 후작이 되려나. 한 10년 뒤에는 공작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 휘장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고 있어. 네가 죽은 뒤엔 내가 꼭 회수해 줄 테니까.”

“미친놈! 네놈에게는 노예도 과분하다!”

“어쨌거나 나는 명령에 따랐으니까, 멋대로 해라.”

블라이스가 한 번 더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한 손을 휘휘 저으며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몇몇 기사들이 지휘관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다른 건 몰라도 놈이 황비 전하의 밀정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적어도 확인은 해야…….”

그들은 블라이스를 믿는 게 아니라 그의 처지를 알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패전국 포로 출신, 사생아, 고향의 정보를 팔아넘긴 변절자.

이 모든 건 바이칸의 기사들에게 블라이스를 혐오할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그는 데네브라의 그늘이 아닌 곳에선 갈기갈기 찢겨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자였다.

그러니 블라이스는 데네브라를 배신할 리가 없었다.

지휘관이 마뜩찮은 얼굴로 그를 불러 세웠다.

“블라이스, 우리가 왜 배를 타야 하지?”

“그야 오르테가의 모든 병력이 티타니아를 막고 있으니까.”

“그런 이야긴 듣지 못했는데.”

“죽은 선왕이 아들에게 국경을 넘겼다는 소식은 들었을 거 아냐. 그 이유까진 생각 안 해 봤나 봐?”

“배를 타고 가면 남부 함대와 마주치게 된다. 그들과 손을 잡으란 얘기냐? 무혈 제독은 우리 명령을 듣지 않을 텐데.”

“걱정하지 마. 남부 함대는 당분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뭐? 왜?”

지휘관이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블라이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카루스 란케아가 변절했으니까.”

지휘관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블라이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무혈 제독이 변절했다고?”

“이건 극비 사항이야. 데네브라 님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 알다시피 그분은 황제 폐하보다 카루스 란케아를 훨씬 깊이 사랑하잖아.”

“하…….”

“황제가 너희에게 오르테가를 치라고 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 그런 거야. 황제는 북부와 전쟁 중인데, 지금 남부와 싸우고 싶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너희가 이렇게 국경까지 내려와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잘됐구나 싶었겠지.”

“이기면 좋고, 져도 그만인 패였나.”

“이기면 정복했으니 좋고, 지면 변절자들을 한 번에 쓸어 낼 수 있으니 좋고.”

거짓말은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물꼬를 트면 술술 잘만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블라이스는 지휘관이 자신의 말에 휘둘릴 수밖에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무혈 제독이 황제에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건 바이칸에서도 오래된 이야기였고, 데네브라가 황제보다 그를 더 사랑한다는 건 그보다 더 유명한 진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지휘관은 남부 함대 전체가 황제가 아닌 카루스의 명령을 따르게 됐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바다를 통해 가야 한다고…….”

지휘관이 낮게 신음하며 티타니아를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다. 데네브라의 입장이 모호하니 황제의 밀명을 무작정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변절자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그래도 황제가 그들을 적지에 떠밀어 소모하기로 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모두 멈춰라!”

그날 산맥을 통해 남하하려던 데네브라의 병력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가까운 항구에서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상선과 군함을 동원해 일단 드추바 섬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데네브라의 전갈을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블라이스의 말에 의하면 데네브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아직 협상의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한마디로 무력을 앞세워 저울질하겠다는 소리였다.

블라이스는 그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오르테가에서 아무도 몰래 빠져나온 거라며 빨리 데네브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전쟁을 앞두고도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롭게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지휘관이 가래침을 탁 뱉었다.

“레인저들을 불러라.”

“왜 그러십니까?”

“황비께서 누구를 택하든, 이제 저놈은 없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어느 쪽에 붙어도 이상할 게 없는 놈은 오래 살려 두지 말아야 해.”

“죽일까요?”

“몰래 뒤쫓다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 자리에서 없애라.”

“알겠습니다.”

“죽인 뒤에는 벼랑에서 떨어뜨려 버려.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해라.”

“예.”

“더러운 노예 새끼.”

블라이스가 떠난 자리에 한 무리의 레인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렵한 차림새에 검은 가죽 갑옷, 암기로 무장한 그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블라이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 *

율리아는 오랜만에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집사와 트루디가 함께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백작님! 왜 이렇게 오랜만에 돌아오셨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왕궁까지 따라갈 걸 그랬어요. 제가 시중을 들어 드렸어야 했는데.”

“왕궁에도 전속 하녀는 있어.”

“그래도 저처럼 일을 잘하진 못하잖아요.”

“잘하니까 저택에 남긴 거야.”

율리아가 피식 웃으며 트루디에게 모자와 장갑을 건넸다. 집사가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더니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여기저기에서 선물과 초대장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백작님은 왕궁에 계신다는 말로 대부분 돌려보냈으나, 막무가내인 자들이 있어 할 수 없이 전갈만 받아 두었습니다.”

“여기도 그래요?”

“왕궁에서도 비슷했나 보네요.”

집사가 허허 웃으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율리아는 그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수십 통의 편지가 작위와 파벌에 따라 분류되어 있었다.

“이쪽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집사가 오른쪽 끝에 있는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율리아가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뭐가 기준인데요?”

“백작님께 도움이 될 만한 자들은 오른쪽에, 백작님께 도움을 바라는 자들은 왼쪽으로 분류했습니다. 겹쳐 놓은 것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작위가 높은 가문이고, 이쪽에 따로 빼 놓은 것들은 상인연합과 아카데미 그리고…….”

유능한 집사였다. 율리아는 그를 소개해 준 코코에게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하며 가장 오른쪽 위에 있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가 품속에서 또 하나의 편지를 꺼냈다.

“그건 뭐예요?”

“정체불명의 심부름꾼이 몰래 놓고 갔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집사가 꼬깃꼬깃 구겨진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율리아는 그걸 받자마자 겉면에 아무렇게나 적힌 글씨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알렉사의 필체였다.

먼저 집었던 편지를 던지듯 내려놓은 율리아가 봉투를 뜯었다.

[당신의 아버지, 주벤 아르테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편지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어 있었다. 율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눈치 빠른 집사와 트루디가 조용히 문을 닫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알렉사와 맥스웰은 바이칸 서북부의 항구 도시 무스빌리에서 트리스탄이라는 용병을 고용했다.

그 바닥에서 가장 잔뼈 굵은 용병 대장이 합류했으니 앞으로 그들이 북부 전선을 오가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렇게 가짜 용병패와 계약서가 만들어지길 기다리는 사이, 용병들과 어울리던 맥스웰이 흥미로운 소식을 하나 물어왔다.

은퇴한 용병 중에 주벤 아르테라는 이름을 아는 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주벤 아르테라…….”

그는 젊은 시절 용병으로 살다가 어느 해상 전투에서 두 눈을 잃어 그때부터 그물 짜는 일을 해 왔다고 했다.

“아르테라는 성은 잘 몰라. 하지만 주벤이 누군지는 알지.”

“흔한 이름입니까?”

“몇 명 있기야 하겠지. 그런데 그 나잇대의 해적이라면…… 내가 아는 그놈이 맞을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알렉사가 노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맥스웰은 그에게 시원한 술을 한 잔 건네고, 그가 짜던 그물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놈은 왜 찾는 건데?”

“이거 필요하시죠?”

맥스웰이 그물을 빼앗긴 그의 손에 금화를 쥐여 주었다.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그럼요.”

“주벤은 미친놈이었어.”

노인이 술을 쭉 들이켜곤 입을 열었다.

“해적 놈들이 다 그렇긴 한데…… 그놈은 특별히 미친놈이었어. 웬 미신을 그렇게까지 맹신하는지. 소원을 이루려면 뭘 찾아야 한다고 그러던데. 그게 있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그게 뭔데요?”

“기억 안 나.”

“아이고, 이 양반…… 욕심이 아주 그득하시네.”

맥스웰이 노인의 손에 금화를 하나 더 쥐여 주었다. 그러자 그가 히죽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푸른 바다의 환초.”

알렉사가 잠시 숨을 멈추고 맥스웰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푸른 바다의 환초는 율리아가 삼켰다던 저주의 매개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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