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 * *
크세노 황제의 검 손잡이엔 아칸더스 잎이 음각되어 있었다. 제국에선 워낙 오래되고 흔한 문양이라 그것에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북부는 교활한 여우들의 땅이요, 남부는 야수들의 나라다.’
크세노는 선조들의 조언을 떠올렸다. 그러곤 하하 웃고 말았다.
“정말 지혜로우신 분들이 아닌가.”
금세 끝날 줄 알았던 북부와의 싸움은 지지부진하고, 남부엔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데네브라에게 붙여 놓은 첩자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그동안 꽤 많은 정보를 황제에게 보냈다.
황제가 원한 건 단 하나였다.
카루스 란케아의 곁에 있는 자. 판을 움직이는 힘이 있으면서, 눈에 띄지 않는 누군가.
처음엔 레위시아 왕자를 의심했다. 그러나 이전의 삶에서 그가 데네브라의 첩으로 팔려 오다 살해당했던 사실을 떠올리곤 목록에서 지웠다.
그 후엔 샤트린 공주를 의심했다. 하지만 공주의 행보는 눈에 띄고 어리숙해 모략가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면이 많았다.
“레위시아 왕자를 왕으로 만든 이들 중에 있어.”
그래서 카루스와 함께 레위시아의 곁을 맴도는 이들을 조사하라고 명령하려던 찰나,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데네브라가 샤트린 공주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블라이스가 내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했다는 사실이 모두 탄로 났다는 급보였다.
“정말 도움 안 되는 여자야.”
크세노가 길게 한탄했다. 그의 곁을 지키던 심복 호르헤가 깊이 머리를 숙였다.
“무혈 제독이 폐하의 명을 방패 삼아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그에게 내렸던 명령을 거두시되, 황비 전하의 편을 들어주지도 마십시오.”
“둘 다 버리라는 말이냐?”
“두 분 다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데네브라와 카루스라……. 너무 빤한 선택지라서 한숨이 나는군.”
데네브라가 열 명이라도 카루스 하나와 바꿀 수 없다.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카루스는 나를 배신하겠지.”
“폐하.”
“호르헤, 새를 보내라.”
“뭐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레위시아 왕자를 왕으로 만든 이들 중에,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있으면서 카루스와 가까이 지내는 자를 찾으라고 해.”
“명을 받듭니다.”
데네브라가 황제의 전갈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새를 보낸 지 며칠이 지났다. 크세노가 가진 새 중 특별히 빠른 녀석이 오르테가의 소식을 가져왔다.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오랜 전우와도 같았던 그의 검이 훈련 중에 부러져 파편이 튀었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으나 그 검은 이제 쓸 수 없게 되었다.
즉시 황제를 위한 보검들이 나열되었다. 크세노는 이름난 장인들의 보검을 쭉 훑어보다가, 이번에도 손잡이에 아칸더스 문양을 새긴 검을 집어 들었다.
그날의 전투는 승리로 기록되었다. 북부가 또 한 걸음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세노는 그들이 지형을 무기 삼아 유리한 전장으로 자신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폐하, 새가 도착했습니다.”
“벌써?”
늦은 시각, 호르헤가 오르테가에서 온 소식을 전했다.
“레위시아 왕자를 왕으로 옹립한 측근 중,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있으면서 무혈 제독과 가까이 지내는 자는…….”
크세노의 눈동자가 천천히 확장되었다.
“그의 시녀들이라고 합니다.”
“시녀?”
“예, 그렇습니다. 레위시아 왕자에겐 세 명의 시녀가 있는데, 그들 모두가 대단한 인재로서 왕궁 안에서 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녀…… 시녀라고?”
시녀라니. 크세노가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곤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하하!”
시녀라니.
그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의 대적자가 시녀라니. 심지어 자신은 그냥 황제도 아니고, 최초로 대륙 통일을 눈앞에 둔 정복 황제인데.
아마도 잘못된 정보일 것이다. 어딘가에 그 세 명의 시녀를 키운 숨은 능력자가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시녀의 가면을 쓴 괴물이거나. 괴물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어여쁜 가면인 것 같지만.
“시녀라…….”
“폐하, 조금 더 알아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새가 가져오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 여러 장의 보고서를 들고 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호르헤는 사람을 보내게 되더라도 조금 더 확실한 정보를 캐내는 편이 나으리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크세노는 신중하게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에겐 시간이 없었다.
그의 대적자가 또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최대한 큰불을 놓아서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 대비할 수 있었다.
누군지 특정할 수 없어도 상관없다. 거기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새를 준비해라.”
“어디로 보내야 하겠습니까.”
“남쪽 국경으로.”
크세노가 작은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여름도 곧 끝물인가.
오르테가를 떠난 블라이스는 티타니아 산맥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능선을 넘고 있었다.
암염 장수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이었는데, 간혹 길에서 만난 상인들이 그에게 먹을거리를 나눠 주기도 했다.
“거, 젊은 양반이 봇짐도 없이 산을 넘나. 제국으로 가는 거요? 차라리 배를 타고 가지.”
“쫓기고 있어서 그럽니다.”
“나쁜 짓이라도 저질렀소?”
“예, 높으신 분을 죽이려고 했거든요.”
“왜?”
“어떤 여자를 미친 듯이 사랑해서요. 관심을 받고 싶어서…….”
“젊어서 그런가. 무모한 양반이구먼.”
상인들은 블라이스가 누군지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블라이스가 금화를 내밀자 금세 친절을 베풀었다. 밤에는 야영지에서 함께 잠을 자기도 했다.
“요즘 상선들은 신분 확인이니 뭐니 복잡하니까 말이야. 상인연합 대표가 바뀌어서 그런가. 팍팍해졌어. 자네, 오르테가 토박이는 아닌 거지? 옛 부두에서 늙은 어부들만 잘 구슬리면 해적들의 배를 탈 수도 있었을 텐데.”
“몰랐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는 줄은.”
“우리야 평생 봇짐 메고 오갔으니 괜찮지만…… 이 산맥이 그렇게 빈 몸으로 넘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야.”
블라이스가 하하 웃었다.
그는 율리아를 생각했다. 바실리 마조람에게 버림받고 한겨울 티타니아 중턱 갈림길에서 얼어 죽어 갔다던 그녀를.
만약 그때 카루스 란케아가 아니라 자신이 그녀를 발견하고 구해 주었다면, 우리 관계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인들은 그를 사연 많은 청년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들이 나눠 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 블라이스가 모닥불 앞에 앉아 불침번을 자처했다.
해는 생각보다 빨리 떨어졌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어서 그렇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데도 어깨가 서늘했다.
밤하늘엔 수없이 많은 별이 떠 있었다. 출발할 땐 날씨가 흐려 비라도 쏟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은 그의 마음을 비웃듯 금세 맑아졌다.
누군가의 앞날을 축복하거나 아름다운 밤의 정경을 그릴 때 반드시 등장하는, 그 화려하고도 장엄한 하늘.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자는 그저 엿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신화의 세계.
그 아름다운 밤하늘을 한 마리의 새가 가로질렀다.
매, 혹은 독수리처럼 생긴 새였다. 속도가 무척 빨라 발견하자마자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새들도 밤엔 잠을 자는데, 뭐가 그리 급해서 저토록 바쁘게 날아가나.
그렇게 생각하던 블라이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새……?”
새가 날아간 곳은 블라이스의 목적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신분 검사를 하지 않는 시골 마을로 내려갈 셈이었는데, 새가 날아간 곳은 티타니아를 바라보는 바이칸의 국경 도시였다.
황제의 새인가. 아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등줄기를 타고 오르내리는 이 끔찍한 소름은 무엇인지.
블라이스는 충동적인 사내였으나 그 이면엔 언제나 철저한 계산이 동반되어 있었다. 한데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성적 사고, 득실 계산, 그런 건 다 잊어버리고 그저 감에 기대 몸을 일으켰다.
확인해야 한다.
생각을 마치자 몸은 자연스레 움직였다. 그는 코를 골며 잠든 상인들을 내버려 둔 채 자신의 흔적을 지웠다. 그러곤 새가 날아간 방향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쯤에야 바이칸 국경 도시에 도착한 블라이스는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데네브라의 병력이었다. 멋대로 오르테가에 간 그녀가 전쟁을 벌이겠다며 국경으로 미리 보내 두었던 사병.
사병이라 해도 바이칸 황비의 군대였다. 수천 명의 병사와 기사단이 깃발을 들어 올린 채 티타니아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움직인 탓에 현기증이 났지만, 블라이스는 그들을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었다.
“멈춰라!”
블라이스가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다. 데네브라의 사촌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였다.
“이게 누구야. 블라이스 백작 아닌가.”
지휘관이 두툼한 입술을 옆으로 길게 늘이며 웃었다. 그는 데네브라의 곁에서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블라이스를 몹시 경멸하는 자였다.
“황비 전하의 노예가 이 먼 국경까지 혼자서 무슨 일이지? 드디어 그분께서 제정신을 차리고 네놈을 내다 버리셨나?”
지휘관의 곁을 지키던 기사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그들은 제국인도 아니고 기사도 아닌 블라이스가 데네브라의 최측근으로 행세하는 걸 평소 못마땅해하던 자들이었다.
블라이스는 웃었다.
“무슨 소리야. 당신들이 멍청하고 무능력하니까 데네브라 님이 나한테 자꾸 일을 맡기는 거잖아.”
산맥을 넘느라 꾀죄죄한 몰골임에도 블라이스의 얼굴에선 마력이 느껴졌다. 그가 입술을 핥으며 웃자, 여러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블라이스, 죽고 싶으냐?”
“나는 데네브라 님의 개인데, 날 죽이려면 주인의 허락부터 받아야지.”
“이 더러운 노예 새끼가…….”
“황비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티타니아를 넘다 전멸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 배를 타고 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