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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231/319)

202화

“뭐……? 너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말해 보세요.”

율리아가 데네브라를 엄하게 나무랐다.

“당신은 오르테가의 손님이 아니에요. 감히 오르테가에 내란을 일으키고 왕족을 죽이려 했던 파렴치한 죄인이지. 감옥에 갇히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바이칸의 황비야!”

“아뇨. 당신은 크세노 황제의 아내죠.”

황제의 아내일 뿐, 제국의 황비는 아니다. 간결하게 결론지은 율리아가 안으로 들어와 시녀들에게 말했다.

“나가세요.”

“하, 하지만…….”

“나가요. 끌어내기 전에.”

율리아를 따라온 건 카루스의 부하들이었다. 그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복도에 서 있었다.

겁먹은 시녀들이 데네브라와 율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데네브라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이칸에서 그녀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력자였다. 시녀들을 살리고 죽이는 것도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데네브라의 시녀들이 주춤거리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이었으나, 율리아의 차가운 눈빛에 질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거기 서!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나가라니까!”

데네브라보다 율리아의 목소리가 더 컸다. 화들짝 놀란 시녀들이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율리아 아르테, 네가 미쳤느냐? 감히 시녀 따위가……. 전쟁이라도 나길 바라는 것이냐? 말해 봐!”

“전하야말로 말해 보세요. 황제는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나요?”

“뭐?”

“오르테가엔 남부 함대와 카루스 란케아가 있어요. 우리는 곧 남부 연합을 만들어 인근 해역의 약소국과 연계하고, 해적의 항로를 손에 넣을 거예요.”

“그래 봤자 오합지졸이야.”

“바이칸을 이길 수는 없겠죠.”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 물었다.

“북부에 발이 묶인 황제가 당신을 되찾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올 확률은 얼마나 되죠? 두 분은 그 정도로 사랑하는 사이인가요?”

데네브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크세노가 자신을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하는지, 그건 그녀가 제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율리아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세요. 당신은 앞으로 적어도 십 년 이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으니.”

포로란 그런 것이다.

“제가 오르테가의 예법을 가르쳐 드리죠.”

그날 이후 율리아는 매일 데네브라를 찾아가 그녀를 괴롭혔다.

처음엔 몇몇 제국 쪽 인사들이 아무리 그래도 황비께 너무하는 것 아니냐며 항의했으나, 그들 모두를 감옥에 처넣겠다는 레위시아의 강경한 태도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율리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바이칸의 역사 교육이 엉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은 몰랐네요. 티타니아는 오르테가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타국에 빼앗긴 적 없는 고유한 우리 영토입니다.”

“하지만 바이칸의 역사학자들은 티타니아 산맥에 아칸더스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보호 동맹 조약 이후 그중 절반은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고 교육하고 있어.”

“그건 그쪽 황제께서 오르테가를 힘들이지 않고 빼앗으려고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겠지요. 황제께선 정복자니 야욕이 넘치는 것까진 이해해요. 그런데 학자들은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학자들이 왜?”

“진실을 탐구하고 알릴 의무가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들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다. 권력자가 짖으란 대로 짖는 개새끼가 아니고 무엇인가.

율리아의 신랄한 비판에 데네브라의 말문이 막혔다. 황비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엔 그녀의 팔뚝보다 두툼한 오르테가 역사책이 펼쳐져 있었다.

“난 너희 나라 사람이 아니야. 내가 왜 이딴 걸 배워야 해!”

“그럼 감옥으로 가실래요?”

율리아는 데네브라의 발악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철벽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왕의 수석 시녀라 일분일초가 부족한 와중에도 매일 데네브라를 찾아와 어렵고 복잡한 역사와 예법을 가르쳤다.

“아칸더스 산맥은 영토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어. 높고 험준하다는 것 말고는 광산 하나 없는…….”

“왜 없어요.”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북진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잖아요.”

“헛소리하지 마. 우리가 남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해야지.”

“지금이야 그렇죠. 하지만 10년, 20년 뒤에도 과연 그럴까요?”

짧으면 10년, 길면 20년이다. 율리아는 크세노 황제 치하의 바이칸이 지금처럼 강대한 국력을 유지하지는 못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오르테가가 그동안 겁쟁이 토끼 취급을 당했던 건 죽은 선왕과 굴욕적이었던 보호 동맹 조약, 그리고 남부 항로를 오가는 해적 세력 때문이었다.

“레위시아 님은 젊어요.”

“애송이지.”

“그 애송이한테 붙잡혀 포로가 된 분이 도대체 뭘 믿고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크세노는 바보가 아니야. 날 포기하는 순간 오르테가에 독립의 빌미를 주게 된다는 걸 알 테지.”

“그럼 카루스 님을 포기하겠네요. 어느 쪽으로나 우리에겐 이득인 일이에요.”

율리아가 피식 웃었다.

처음이었다. 데네브라는 도저히 그녀를 말로 이길 수 없었다. 어떤 말로 반박하고 비아냥거려도 소용없었다.

“그 책은 단순히 건국 이후 오르테가 왕실 역사만을 기록한 책이에요. 문화와 외교, 야사는 따로 기록되어 있죠. 역대 국왕과 명망 높은 선조들의 평전도 물론 별개고요.”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해.”

“말씀드렸잖아요. 여기서 얼마나 더 계실지 모르는데, 무식한 황비라고 불리는 건 싫을 것 아니에요.”

“누가 감히…….”

“저는 입이 무거워요. 그리고 황비께 저보다 이 나라 역사를 객관적으로 가르쳐 드릴 사람은 없어요.”

율리아가 브레웨 훈장에 관해 설명하곤 생긋 웃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아칸더스 산맥이란 명칭은 자제하세요. 그곳은 오르테가의 북부 국경 산맥이고, 엄연히 티타니아라는 이름이 있으니까요.”

바이칸의 황제가 그곳을 왜 아칸더스라 이름 붙였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궁금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당시 황제는 젊었고, 충동적이었다. 정복 전쟁에 매달려 온 대륙을 돌아다니느라 그에 관해 알려진 거라곤 전부 전투에 관한 일뿐이었다.

율리아는 언젠가 레위시아를 가르칠 때 했던 질문을 그대로 데네브라에게 던져 보았다.

“20년 전 보호 동맹이 체결되던 당시 크세노 황제가 오르테가를 향해 남하하던 중에 티타니아 산맥에서 일어났던 세 번의 전투와 그가 왜 발길을 돌렸는지, 그 연유를 아세요?”

“난 그때 고작 열다섯 살이었어.”

“황비로 내정된 열다섯 살이라면 당연히 배워야 하는 내용 아닌가요?”

“당시 남부 패전국 연합이 비겁하게 지형을 이용해 기습했다고 들었어. 유난히 혹독한 겨울이었고, 크세노는 오르테가에 손을 내밀어 보호 동맹이라는 관대함을 내보였다고.”

“황제는 패배할 것 같아서 도망친 거예요.”

“뭐?”

“남부 패전국 연합이 기습했죠. 그리고 티타니아엔 전에 없는 한파가 닥쳤어요. 산맥을 오가던 암염 상인들마저 모두 겨우내 등짐을 내려놓았을 만큼, 기록적인 추위였죠.”

“자연 앞에 멈춰 선 게 도망친 거라고?”

“세 번의 전투, 바이칸엔 한 번의 패배와 두 번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겠죠?”

“당연하지. 그것도 마지막엔 대승을 거두어 끈질겼던 남부 연합을 박살 내고 축제를 벌였다고…….”

“두 번의 패배와 한 번의 승리라고 봐야 해요.”

데네브라가 말도 안 된다며 주먹을 쥐었다. 황제와 사이가 나쁜 부부이기는 해도, 그녀는 제국인이었다. 율리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율리아가 두툼한 책을 천천히 넘겼다. 금세 찾던 페이지를 발견한 그녀가 손가락으로 어떤 문장을 가리켰다.

“‘남부 패전국 연합과 해적 세력의 규합은 그 용맹한 바이칸의 황제조차 두 번이나 무릎 꿇렸을 만큼 대단한 파괴력을 지닌 군사였다.’”

“해적……?”

“‘만약 그때 오르테가가 그들에게 합류했다면 이후 바이칸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했을 것이다.’”

“말도 안 돼.”

데네브라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 또한 너희가 바람을 담아 만든 가짜 역사가 아닌가 되물었다.

율리아가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들려 드렸을 때, 레위시아 전하께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몰라. 내가 알 게 뭐냐.”

“‘오르테가는 바이칸 제국보다 해적 세력과 싸운 역사가 더 길어, 도저히 손을 잡을 수 없었을 거야. 오랜 해적 세력이 쇠퇴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 싸움에서 결국엔 패배했기 때문이다. 레위시아는 진실을 꿰뚫었다.

“크세노 황제는 겁 많은 선왕과 보호 동맹 조약을 체결하면서 아주 강경하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어요.”

“남부 함대…….”

율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오르테가 남부 해상에 제국군 함대를 배치하는 거였죠.”

다시는 해적 세력이 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남부가 연합하지 못하게. 그 세 번의 전투는 크세노 황제에게 큰 상처를 남겼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남부 함대가 해적과 붙어먹고 있다는 카루스의 보고에 그토록 분노한 것이다.

계속 율리아만 노려보던 데네브라의 시선이 드디어 책으로 향했다. 그녀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 전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던 건데?”

“티타니아의 눈보라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거든요.”

크세노 황제는 산맥을 넘지 않았다. 기습에 두 번이나 당해 많은 군사를 잃었기에 섣불리 산맥을 넘을 수도 없었다. 때마침 산맥 전체에 혹한의 추위가 닥쳤고,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승기를 잡았던 남부 연합은 자연의 냉혹함에 무너졌다.

“마지막 전투에서 황제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이었어요.”

실력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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