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230/319)

201화

“……죽인대요?”

“그래. 술에 취해 지껄이긴 했지만.”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뭐라고 했을 거 같냐.”

“그야 복덩이…… 아르테 백작의 의사에 맡기겠다고 하셨겠죠.”

“바이칸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카루스가 가볍게 웃었다. 그는 어느새 셔츠 위에 재킷까지 걸치고 의자에 앉아 부츠 끈을 조이고 있었다.

바바슬로프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그렇게 쳐다보면 기분 나쁘니까.”

“진짜 안 돌아가실 겁니까?”

“안 가.”

“영지는 어쩌고요. 가신들은요. 기사단은요? 서북부 기지에서 카루스 님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함대는 또 어쩌고요.”

바바슬로프는 카루스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사령관이 그렇게 무책임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조만간 황제는 데네브라와 카루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리라.

“한 번은 돌아가셔야 합니다.”

“바바슬로프.”

“리바이어던은 황제의 기사단이 아니고, 바이칸의 함대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건 카루스 란케아, 무혈 제독 당신입니다. 그러니 결정을 내리셨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오르테가엔 해군이 필요해.”

“예?”

“오르테가는 남부에서 가장 풍요로운 바다와 항구를 가졌어. 자원은 풍부하고 사람들은 개방적이지. 심지어 티타니아가 바이칸을 막아주고 있어서 보호 동맹을 맺기 전에는 천혜의 보고라고도 불렸다지.”

“그래서요?”

“난 변절자가 될 생각이다.”

부츠 끈을 다 묶은 카루스가 몸을 일으켰다. 변절을 말하는 그의 얼굴은 일견 평온하기까지 했다.

잔소리를 쏟아붓던 바바슬로프가 입을 꾹 다물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빠르게 내쉬었다.

“어휴.”

바바슬로프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진작 말씀하시지.”

“뭐?”

“전 또……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황제의 명령에 따르거나 싸움을 회피하려고 하셨다면, 정신 좀 차리라고 한 대 때리려고 했는데.”

“네가 날?”

카루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때려? 네놈이? 나를?”

카루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바슬로프를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그는 한 손을 허리에 대충 얹고 다른 손은 자연스레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태도가 심히 거슬렸던 바바슬로프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데네브라 황비가 아침부터 카루스 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카루스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블라이스가 모든 진실을 자백한 후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데네브라는 며칠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레위시아는 황비의 태도가 의외라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릴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녀는 왕비궁에 틀어박혀서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매일 끈질기게 찾아와 만찬 초대를 전하던 황비의 시종도 조용해졌다.

늦은 아침을 먹던 코코가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말했다.

“상처받았나?”

그렇게 말해 놓고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코코는 신경질적으로 빵을 쥐어뜯더니 얼른 입에 넣고 씹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율리아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죠.”

“그 여자가? 상처를 받아? 개처럼 부리던 노예가 배신했다고 엉엉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지야 않겠지만.”

“내가 보기엔 다른 부하들을 다 불러 놓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블라이스를 찾아내서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을 것 같은데.”

“아침부터 카루스 님을 찾았다고 하더라고요.”

“왜?”

“모르겠어요. 카루스 님이 무시하고 들어 주지 않으니까, 이번엔 저한테 사람을 보냈어요.”

율리아는 조금 전 데네브라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받았다.

“너도 무시해.”

코코가 남은 빵을 한입에 욱여넣고 씹었다. 율리아가 그녀에게 물컵을 건넸다.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 체해요.”

“오늘 바빠.”

“무슨 일 있어요?”

“알현 신청이 백 건이 넘어. 무시할 수도 없는 게, 다들 표면적으론 제법 중요한 안건을 들고 찾아올 모양이야.”

“표면적으론?”

“그건 다 핑계고, 실은 혼기가 꽉 찬 딸이나 조카, 여동생이 있으니 만나 보면 어떻겠냐 제안하러 오는 거지.”

“벌써요?”

“세력이 약했던 왕자잖아. 적당히 구워삶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마조람 후작이 사라지고 없는 틈을 타서 새로운 파벌을 형성할 수도 있겠지. 겉으론 왕의 혼사를 논하고, 속으론 어떻게 하면 중앙의 권력자가 될 수 있을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율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선왕을 애도하는 중이라 즉위식조차 임시로 치른 왕에게 벌써 결혼 압박이라니. 심지어 그게 권력 다툼의 출발점이라니.

그나마 다행인 건 악마 시녀 코코가 이제 본궁 시녀장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오랜만에 일 좀 해야겠어.”

코코가 씩 웃으며 일어났다. 율리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배웅했다. 바깥에선 공주궁의 시녀장이 정갈한 자세로 코코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코코 시녀장님.”

“입에 발린 소리도 잘하네. 공주궁의 시녀장은.”

“진심인데요.”

“그럼 갈까?”

코코가 웃으며 앞장섰다.

시녀장과 수석 시녀는 하는 일이 달랐다. 시녀장은 모시는 왕족의 궁을 지키고 보살피며, 그의 주변인을 임명하거나 해고할 수도 있었다.

때로는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대로 왕족들은 자신을 키워 준 유모를 시녀장으로 임명하는 일이 잦았다.

수석 시녀는 모시는 왕족의 개인 보좌와도 같았다. 왕족의 일과를 짜는 것부터 시작해 사생활을 관리하기까지. 그렇다 보니 왕궁으로 흘러드는 뇌물의 절반은 각 궁의 수석 시녀에게 보고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율리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궁으로 간 그녀는 자신의 사무실에 높이 쌓인 선물 상자를 보곤 피식 웃고 말았다.

* * *

블라이스가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데네브라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놈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줄도 모르는 천생 노예라고 큰소리쳤다. 이 모든 게 블라이스와 자신을 이간질하려는 율리아 아르테의 계략이라며, 자신은 그 계집의 얕은수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블라이스가 정말로 데네브라를 배신하고 버렸다.

그는 데네브라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실토한 것도 모자라, 그간 오르테가에서 저질렀던 만행까지 전부 고발했다. 그 안엔 황제 크세노의 잘못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르테가의 국왕은 기다렸다는 듯 크게 분노하며 이 사실을 왕국 전역에 공표하고, 나아가서는 인근 모든 국가에 퍼뜨렸다.

제국으로 보낼 사절단도 결성되었다. 그들은 황제 크세노에게 이번 일을 강력히 항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데네브라는 자신이 이 손바닥만 한 나라에 감금되어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연회는커녕 외출조차 할 수가 없었다. 블라이스가 없으니 누구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어 주지 않았다.

“카루스를 불러와! 그를 내 앞에 데려오란 말이야!”

카루스는 크세노의 신하였다. 데네브라가 보기에, 카루스는 우직할 정도로 크세노에게 충성하던 기사였다.

아무리 힘든 전장에 내보내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려도,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했는데도 묵묵히 버텼다.

그런 카루스가 드러내 놓고 자신을 핍박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데네브라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오르테가의 젊은 왕과 그 시녀, 율리아 아르테는 크세노 황제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준 것임을.

데네브라를 버리거나, 카루스를 버리거나.

그런 와중에 데네브라의 측근들이 점점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불러도 오지 않는 건 예사였고, 가끔은 저들끼리 모여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면 바퀴벌레처럼 흩어져 달아났다.

데네브라는 자신이 완전히 고립되었음을 깨달았다. 율리아의 말대로 그녀는 황제의 도구였으며, 그녀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당장 카루스를 불러오라니까!”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는 데네브라 때문에 시녀들의 몸에 상처가 늘었다.

율리아의 반지를 끼고 있던 시녀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는 상처가, 팔엔 피멍이 들었다. 며칠 새 창백해진 얼굴엔 웃음이 사라져 공포심만 남았다.

“이 건방진 것들이…….”

데네브라가 결국 채찍을 꺼내 들었다.

시녀들이 벌벌 떨며 빌었다. 제발 화를 가라앉히라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율리아는 그때 나타났다.

“그만두세요.”

“너…….”

“당장 그만두세요.”

율리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표정은 얼음장 같고, 태도는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시녀들을 때리면 당신의 처지가 좀 나아지나요? 바이칸의 귀족들은 아랫사람은 인의로 다스려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던가요? 혼자 생각 좀 하라고 시간을 드렸던 건데,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네요.”

데네브라는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시녀들까지 전부 기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율리아는 대 제국의 황비를 눈앞에 두고 어린애 혼내듯 훈계하고 있었다.

“운 좋게 고위 귀족으로 태어나 운 좋게 황제의 아내가 되고, 운 좋게 여기까지 왔으면 겸손하고 감사할 줄도 알아야죠. 만약 당신이 힘없는 귀족의 여식으로 태어나 승냥이처럼 연회장이나 돌아다니다가 운 나쁘게 폭력적인 황비의 시녀가 되었다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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