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악마여, 한 번만 웃어 주면 까짓 영혼쯤은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다. 나는 이 마음이 처음이고, 하나뿐이고, 거절당한 뒤에는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이게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거래라면, 네 미소 한 번에 내 영혼 정도는 내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좋아요.”
율리아가 웃었다.
그를 향한 얼굴에 어둠과 빛을 교묘히 두른 채로 아름답고 오싹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블라이스의 날개가 잘렸다. 그는 자신이 다시는 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샤트린은 데네브라가 무슨 말로 자신을 화나게 하든 평정심을 가지고 대할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머릿속이 엉망이라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웠는데, 레위시아에게 양위하고 나니 갑자기 누가 머릿속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열기가 확 가라앉았다.
데네브라는 샤트린이 생각했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폭군이 아니었다. 권력을 쥔 어린애라고 그녀를 평가했던 카루스의 말을 떠올리자 한결 더 침착할 수 있었다.
“너는 왜 왕위를 포기했느냐.”
데네브라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인사를 나누기는커녕 받아 주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냥 뒤집어엎으면 되지. 왕좌에 앉는 게 네 목표였잖으냐?”
“바이칸의 황비께서 저를 죽이려 하는데, 제가 무슨 수로.”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데네브라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샤트린에게 머리채를 잡힌 것으로도 모자라 폭행까지 당해 놓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먹어라.”
두 사람이 먹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의 음식이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다. 데네브라는 한 번 먹은 음식은 두 번 손대지 않았다. 가끔 입맛에 맞지 않는 게 있으면 씹다 말고 뱉어 버리기도 했다.
오르테가의 하나뿐인 공주로 누구보다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온 샤트린도 데네브라처럼 오만불손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랬던가?’
샤트린은 데네브라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뭐냐.”
“만약 황비께 혼약이 내정된 남자가 있고, 그자가 평민 여자를 사랑하고 있으니 파혼하자며 공개 석상에서 당신을 모욕한다면, 그 평민 여자를 어떻게 하시겠어요?”
“죽여 버려야지.”
데네브라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술술 대답했다.
샤트린이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왜? 너는 어떻게 했기에?”
“때렸습니다.”
“죽였어야지.”
“잘못한 건 그 남자인데요?”
“평민 계집을 사랑한다고 했다면서. 그러니 여자를 죽이고 남자는 살려 둬야지. 그래야 놈이 두고두고 평생 고통 속에 살 것 아니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데네브라는 샤트린보다 더한 자였다. 입맛이 떨어진 샤트린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율리아는 그때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도 하나만 물어보자.”
“그러시죠.”
“내 초대에 응하면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느냐?”
“했어요.”
샤트린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데네브라는 샤트린에게 극도로 화가 나 있었다. 샤트린을 초대해 독살할 수도 있었고, 부하를 시켜 칼로 찌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왕비궁은 데네브라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초대에 응했다.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샤트린이 내려놓았던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러곤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었다.
데네브라가 물었다.
“했는데 왜 왔어?”
“여기서 죽는다 해도 후회는 안 할 것 같았어요.”
“왜?”
“당신이 블라이스 백작을 시켜 왕위까지 포기한 저를 암살하려 했고, 그걸 들킨 뒤엔 식사에 초대해 독살했다고 소문나겠죠.”
샤트린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바이칸은 당신을 버릴 거고, 황제는 보상하려 할 거예요. 어쩌면 이 일로 바이칸에 항복했던 국가들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어요. 오르테가는 충성을 맹세했는데도 저렇게 당했는데, 우리는 더한 꼴을 당할 수도 있겠다고 두려워하면서.”
“그 대가가 네 목숨인데?”
“그러니까 비싸게 받아야죠.”
샤트린은 긍지 높은 왕족이었다. 그녀는 왕좌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오르테가를 적으로 돌리는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용감하고 무모해졌다.
그녀는 왕이 아니기에, 왕이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었다.
“어디 한번 죽여 보세요.”
샤트린이 말했다.
“당신한테 내 목숨 값을 치를 용기가 있다면.”
* * *
블라이스 백작이 자백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데네브라 황비의 명령이었음을 시인하고 자백서를 작성했다. 그와 함께 공주궁에 침입했던 자들의 명단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오르테가에서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해방군을 교란해 마조람 후작 파벌을 공격하고, 그들을 무장시켜 내란을 일으키려던 것까지. 그의 입에서 엄청난 비밀이 쏟아졌다.
“공주를 죽이라고 명령한 건 데네브라 황비였으나, 오르테가에 내전을 일으키라고 한 건 크세노 황제였습니다.”
레위시아 국왕은 크게 분노했다. 그는 블라이스의 자백을 낱낱이 기록했고, 황비와 그녀의 보좌들을 불러 모아 그걸 읽게 했다.
“우리는 바이칸의 보호 동맹국으로서 신의를 지키기 위해 그동안 최선을 다해 왔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왕국이 술렁거렸다. 데네브라와 제국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왕비궁에 감금되었다. 그들은 이제 공식적인 죄인이었다.
황비를 고문하거나 처형할 수는 없었으나, 감금하고 감시할 수는 있었다.
그날 밤, 블라이스가 감옥 문을 열었다.
그는 율리아가 건넨 열쇠로 감옥 문을 열고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아무도 없었다. 감옥 앞 복도에도, 바깥 입구에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처 없이 걸었다. 들키면 다시 잡혀가 처형당할 게 분명한데도 서두르지 않고 숨지도 않았다.
지난 1년간 속속들이 외운 오르테가의 왕궁 지도가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귀빈궁을 향해 걷던 그가 그곳을 그대로 지나쳐 왕비궁 앞에 섰다.
데네브라가 머무르는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황비는 잘 때도 불을 끄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방에 시녀를 대기시켜 놓고, 불이 꺼지면 크게 화를 냈다.
블라이스는 한때 데네브라의 침실을 지키기도 했다. 그녀의 발밑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면 때때로 무척 값진 선물을 받기도 했다.
그때는 그녀의 모든 것이 탐났다. 권력, 재산, 탐욕, 광기까지.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게 너무나 하찮게 느껴졌다.
데네브라는 가짜였다. 그가 섬기고 싶었던 신은 악마였는데, 데네브라는 그처럼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블라이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멀리 레위시아의 왕자궁이 보였다. 경계가 삼엄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블라이스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춘 채 율리아의 방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은 캄캄했다. 은은한 촛불 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악마.
“가치 있는 사람이 되세요. 티타니아를 넘어 북부로 돌아가요. 당신 고향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전사들에게, 이번엔 바이칸의 정보를 팔아넘겨요. 그게 바로 당신 같은 기생충이 해야 할 일이에요.”
블라이스가 웃었다. 기쁨에 겨워 참을 수 없이 웃음이 났다.
마침내 찾았다.
그의 결핍을 채워 줄 완벽한 폭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