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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화 (227/319)

199화

그 시각 블라이스는 감옥 안에서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데네브라는 혼자가 되자 불안증 환자처럼 괴로워하며 안절부절못했으나, 블라이스는 혼자가 되자 그동안 그를 지배하던 혼란과 광기가 거의 사라져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북부는 승리할 거다.”

레위시아가 던져 놓고 간 말들이 그를 떠나지 않고 괴롭혔다. 북부의 승리를 예언하면서 그의 이름으로 전쟁 지원금과 용병을 보낼 거라던 이야기.

그리고 황제에게 그의 변절에 대해 알릴 거라던 이야기.

전부 율리아의 생각일 것이다. 악마 같은 여자.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버석버석해 모래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감옥 안에 긴 그림자가 졌다.

율리아였다.

어느새 감옥 앞에 나타난 그녀가 소매 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러곤 감옥 안으로 걸어 들어와 블라이스 앞에 섰다.

“자백해요.”

그녀의 말투는 너무 담담해서 그의 자백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처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블라이스가 물었다.

“내가 왜?”

감옥 안은 어두컴컴했다. 복도에서 두 개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으나 그 빛이 감옥 안까지 환히 밝혀 주진 못했다. 덕분에 율리아의 얼굴에도 검은 그늘이 졌다.

블라이스는 그녀의 모습이 진정 악마와 같다고 생각했다.

율리아가 블라이스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검은 그늘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저 안에 감춰져 있는 짙은 녹색 눈동자와 도도하게 솟은 입술 산을 떠올리자, 블라이스의 심장이 움찔 몸을 떨었다.

“당신에 대해서.”

율리아가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왔다.

“생각을 좀 해 봤어요.”

“나에 대해?”

“왜 내 주위에서 맴도는 걸까. 나한테 원하는 게 뭘까. 무엇에 의해서, 누구를 위해, 어떤 신념으로 움직이는 걸까.”

“신념이라니. 나 같은 놈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블라이스는 자신이 충동과 쾌락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데네브라에게 충성하는 것도 그녀가 자신에게 권력을 쥐여 주었기 때문이며, 오르테가에 와서 저지른 일은 모두 단순 재미였다고.

하지만 율리아는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당신은 노예가 아니에요.”

“노예 맞아. 나한텐 자유가 없어.”

“카루스 님은 당신이 데네브라 황비의 노예라고 말했어요. 코코는 당신이 황제의 노예일 거라 추측했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노예의 가면을 쓴 전사.”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해방군을 선동할 때 했던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맥스웰은 그를 고향의 비극까지 이용하는 나쁜 새끼라고 욕했다. 그때는 맥스웰의 말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당신은 친부에게 버림받은 사생아라 보육원에서 궁핍하게 자랐다고 했어요. 이복형제를 대신해 전쟁에 나갔고, 살기 위해 항복했다가, 친부에게 복수하려 데네브라의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죠.”

“그래, 그게 나란 놈이야.”

“하지만 북부를 원망한 적은 없었어요.”

블라이스는 북부가 약해서, 북부가 방심해서, 북부가 잘못해서 전쟁에 졌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고향을 배신한 블라이스를 누구보다 학대하며 쓰레기 취급한 건 언제나 그 자신이었다.

“북부는 아름다운 곳이죠.”

“율리아.”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산이 있다죠. 북부 산맥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골짜기를 따라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이 옹기종기 피어 있다고 했어요. 그 모습이 방울꽃을 닮아서 옛사람들은 마을을 ‘송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블라이스의 눈이 점점 커졌다. 횃불의 붉은 빛을 어깨에 두른 율리아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북부에 가 본 적이 있거든요.”

“거짓말. 너는 보육원에 맡겨진 후론 단 한 번도 오르테가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는데.”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율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내 아홉 번째 삶이에요. 그동안 계속 죽었거든요. 세 번째인가, 살고 싶어서 북쪽 땅끝까지 도망쳤어요. 춥고 아름다운 곳이었죠. 난 거기서 이름을 바꾸고 모습을 감춘 채 한동안 살았어요.”

“뭐…….”

“그때도 북부는 바이칸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걸 참지 못해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어요.”

“어떻게 됐는데?”

“그들은 패배하지 않았어요.”

승리해서 독립을 이루진 못했으나, 패배하여 멸망하지도 않았다.

북부는 질겼다. 험한 지형을 무기 삼아 전선을 유지했다. 북부가 선전하자 사람이 모였다. 북부 연합은 그런 곳이었다.

블라이스는 율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놀리려 지어낸 이야기일 거라 여겼다.

율리아도 그에게 더는 길게 말해 주지 않았다.

“율리아.”

블라이스가 물었다.

“내가 자백하면 어떻게 되는데?”

“오늘 밤 이 감옥을 나가게 되겠죠.”

“그 뒤엔?”

“국왕 전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북부는 승리할 거라고. 전하께서 왜 그렇게 확신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요?”

“날 흔들려고 지어낸 말이겠지.”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첫날 가장 먼저 무슨 명령을 내리셨는지 알려 줄게요.”

율리아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 고운 손바닥 위에 감옥 열쇠가 놓여 있었다.

불빛을 받아 요요히 빛나는 그 작은 금속 조각이 블라이스의 시선을 빼앗았다.

“압수한 공성 병기를 북부 패전국 연합에 선물하셨어요.”

율리아의 목소리가 그의 몸에 내려앉았다.

사랑한다는 건 무슨 감정일까. 아니, 사랑이 그저 감정이기는 할까. 사랑이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런 감정이라면, 왜 상처는 그토록 깊이 남아 낫지를 않을까.

이건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이 아닐까.

짧은 쾌락과 행복 뒤에 오는 긴 아픔과 외로움, 그 공허함. 사랑은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는 강렬한 힘이지만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이기도 하다.

블라이스는 데네브라를 동경했다. 결핍과 피해 의식으로 가득 찬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아 저밖에 모르는 폭군이었으니까.

데네브라의 곁에 있으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녀의 발밑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노예처럼 부려지면서도 그게 싫지 않았다. 적어도 보육원이나 전쟁터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그랬던 데네브라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한 건 카루스 란케아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황제에게 이혼을 요구했을 때였다.

그녀는 블라이스처럼 변해 버렸다. 결핍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렸다. 사랑에 매달려 모든 걸 버렸다. 폭군은 곧 노예가 되었다. 추하고 비굴해졌다.

블라이스는 그때 데네브라를 죽이고 싶었다.

“나는 아무래도…….”

블라이스가 열쇠를 손에 쥐었다. 열쇠를 쥘 때 그의 손가락 끝이 율리아의 손바닥에 닿았다. 부드럽고 미지근했다.

그 찰나의 온도에 매달려 벌벌 떠는 자신이 우스워, 블라이스가 멈췄던 숨을 터뜨리며 웃었다.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율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열쇠를 받았으므로, 그녀는 원하던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어. 첫눈에 반한다는 말 같은 건 믿지 않는데……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야. 네가 내 술잔에 적들의 반지를 빠뜨렸을 때인가 싶기도 하고.”

블라이스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카루스처럼 낮지도 않고 레위시아처럼 부드럽지도 않았으나, 거칠게 쉬어 금속성으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아니면 네가 나를 초대했던 그 저녁 식사 때였나 싶기도 하고. 아닌가? 그보다 더 나중이었을까. 어떻게 생각해?”

“알아야 하나요?”

“아니, 그럴 필요 없지.”

사랑한다는 고백 앞에서도 율리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가 졌다. 블라이스는 자신의 마음이 불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 번만 웃어 줄래.”

그가 말했다. 속삭이듯 연약한 목소리였다. 언제나 그녀를 놀리듯 능글능글하던 말투가 타다 만 심지처럼 연약했다.

율리아가 물었다.

“제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내가 오늘 밤 이 감옥을 나가게 되겠지.”

“그 뒤엔?”

“나도…….”

모르겠어.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율리아는 다 알아들었는지 블라이스에게 되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마음은 받아 줄 수 없어요.”

“레위시아 국왕의 마음도 받아 주지 않을 거야?”

“그분의 저의 왕이세요.”

“카루스 란케아의 마음은?”

블라이스는 그렇게 물어 놓고 대답하지 말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율리아가 건넨 열쇠를 주먹으로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아 아르테.

시선의 높이가 달라지자 악마는 이내 여인이 되었다. 앳된 얼굴에 깊은 눈, 향기가 느껴질 것 같은 입술.

블라이스는 자조했다. 데네브라에게 실망했던 자신에게 실망했다. 추하고 비굴하다고 했던가. 자신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웃어 줘.”

“블라이스.”

“한 번만.”

그녀의 미소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는 그것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꼭 보고 싶었다. 달빛 쏟아지는 발코니와 거기 서서 그를 내려다보던 율리아, 그날 이후 밤마다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잠을 설칠 때마다 어리석은 상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약 네 사람이었다면.

레위시아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선택받은 위치에서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른다.

율리아는 레위시아에게 웃어 주고, 손을 내밀고, 그의 곁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의 외로움을 달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그의 하루를 가꿔 주기도 할 것이다.

“내 영혼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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