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226/319)

198화

다음 날 데네브라가 자신을 감시하던 카루스에게 또 사람을 보냈다.

만찬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는데 나타나지 않은 그와 율리아를 거세게 비난하며, 오늘 저녁에도 오지 않으면 크게 경을 칠 거라는 경고였다.

율리아는 이번에도 차갑게 거절했다.

“그분은 좀 혼자 있어야 해요.”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이나 거절당한 데네브라가 직접 정원까지 나와 카루스를 불러들였으나, 그는 율리아의 말을 떠올리며 그녀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로 데네브라를 화나게 했다.

블라이스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고, 데네브라는 날이 갈수록 험한 말로 카루스와 율리아를 비난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바쁜 일과 중에 시간을 낸 레위시아가 공주궁을 찾았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샤트린의 시녀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레위시아를 맞았다. 모두 우아하고 화려한 차림새였다.

그들은 힘깨나 쓰는 가문에서 전략적으로 샤트린에게 보냈으나, 공주가 왕이 되지 못해 처지가 곤란해진 이들이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간 시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샤트린의 곁에 남아 지금까지와 똑같이 공주궁을 지켰다.

“오랜만이야.”

레위시아가 시녀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샤트린의 시녀는 수십에 이르는데, 그를 따르는 건 율리아 하나뿐이었다.

레위시아가 어깨너머로 율리아를 힐긋 바라보며 물었다.

“마음에 들어?”

“네.”

“내 시녀가 되어도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공주궁의 시녀들은 모든 면에서 출중해요. 지금 당장 전하께서 거두셔도 절대 왕의 기품에 누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는군.”

레위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율리아의 대화를 듣고, 공주궁의 시녀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하, 저희가 왜…… 전하의 시녀가 되어야 하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샤트린은 왕궁을 나갈 생각이라는데.”

“예?”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은 왕궁에 남아 있어선 안 되고, 왕궁에 살지 않는 왕족에겐 시녀가 필요 없다고. 너희가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내 시녀로 받아 달라고 부탁했어.”

레위시아의 말이 길어질수록 시녀들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작게 수군거리다가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입술을 꽉 깨물고 레위시아를 바라보더니, 수석 시녀와 측근 시녀를 시작으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넓은 치마가 뒤집힌 연잎처럼 펼쳐졌다. 처음엔 수석 시녀가, 그를 따라 측근 시녀가, 나중에는 막내와 전속 하녀들까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레위시아가 그들과 대화를 나누던 곳은 공주궁 앞 정원이었다.

푸른 잔디 위에 시녀들의 치마가 동그랗게 피었다. 키 작은 풀에 치맛단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주위가 고요했다.

공주궁의 수석 시녀가 말했다.

“국왕 전하, 저희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처음 왕궁에 들어와 지금까지 공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알아.”

“그리고 왕궁 시녀는 두 명의 왕족을 섬기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그것도 알지.”

“저희는 공주님의 시녀입니다.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왕이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수석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레위시아가 화를 내며 그들을 당장 왕궁에서 쫓아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레위시아가 곤란하다고 중얼거리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율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공주궁의 수석 시녀에게 물었다.

“여러분이 왕궁에 남아 계속해서 샤트린 전하를 모신다면 귀족들은 쓸데없는 기대를 하게 될 거예요.”

누군가는 또 다른 반역을 꿈꿀 수도 있다. 율리아의 말에 시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도 공주님을 모시겠어요?”

“네.”

“공주께서 왕족의 지위를 버리고 귀족이 된다 하여도?”

“그래도 따를 거예요.”

수석 시녀는 가문을 버릴 각오였다. 쫓겨난 왕족을 따라 국경으로 가겠다고 하면, 그녀는 가문에서도 버림받을 게 뻔했다.

율리아가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렇지?”

레위시아가 시선을 돌려 공주궁을 훑어보았다.

샤트린이 자랑으로 여기는 아름다운 정원과 넓은 연회장, 활짝 열린 창틀엔 시녀들이 매일 부지런히 가꾼다던 화병이 올려져 있었다.

그가 툭 가볍게 명령했다.

“그냥 다 같이 살자.”

쫓겨나게 될 걸 각오하고 마음을 다잡았던 공주궁의 수석 시녀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전하…….”

“미안한데, 나는 샤트린이 왕궁 밖으로 나가서 여생을 편하고 게으르게 사는 꼴은 못 보겠거든. 가뜩이나 왕족이라곤 이제 우리 둘뿐인데, 걔가 나가 버리면 왕궁 관리는 누가 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내 옆에 오만하게 버티고 앉아서 귀족들을 견제해야 할 거 아냐.”

“전하……! 그럼…….”

“샤트린이 시녀 좀 거느린다고 불안해질 왕좌였으면 이렇게 힘들게 앉지도 않았어.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그건 내가 무능한 탓이지, 너희 때문은 아닐 거고.”

아뿔싸. 이 얘기를 샤트린한테 해야 했는데. 그래야 걔가 날 좀 우러러볼 텐데. 레위시아가 한탄하며 짜증을 냈다.

“잘 들어. 앞으론 많이 바빠질 거야. 공주궁은 물론이거니와, 당분간은 귀빈궁과 별궁까지 전부 너희가 관리해.”

“왕명을 받듭니다!”

“나중에 샤트린이 결혼하면 아예 그 남편 놈도 왕궁에 들어와서 살라고 해야겠어. 죽도록 부려 먹다가 필요 없어지면 그때 한꺼번에 내쫓아야지.”

방금 나 진짜 좋은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레위시아가 거들먹거리며 웃었다. 그러곤 고맙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시녀들에게 과장된 손짓으로 물러가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그가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율리아가 공주궁의 시녀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세요.”

“율리아 시녀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 시녀가 손을 잡았다.

“그런데 샤트린 공주께선 어디에 계신 거죠?”

율리아가 물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공주궁의 수석 시녀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조금 전 데네브라 황비에게 만찬 초대를 받아 귀빈궁에 가셨습니다.”

“네?”

이게 무슨 소리죠. 율리아가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쳤어? 자길 죽이려고 한 여자를 왜 만나러 가?”

설마 이번에는 머리채를 잡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죄다 뽑아 버리기라도 하려고? 레위시아가 불안해하며 중얼거렸다.

* * *

열흘이 지나도록 카루스와 율리아가 자신의 초대에 응하지 않자, 데네브라는 레위시아와 코코, 샤트린에게도 사람을 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블라이스에 대한 소식이 전혀 들려오지 않아 그것도 갑갑해 죽겠는데, 조그만 궁에 갇혀 감시당하고 있으려니 속에서 수시로 불이 났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발코니로 뛰쳐나와 카루스를 찾았다. 그가 궁 앞에서 자신을 감시할 때에는 그나마 나았는데, 율리아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지면 금세 불안감이 차올랐다.

데네브라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이칸에서도 유명한 귀족 가문의 딸이었고, 황제의 아내가 된 뒤에는 수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살았다. 물론 일방적인 교류였으나 어쨌든 그녀가 가는 곳엔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해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외로울 틈이 없었다.

“당장 율리아 아르테를 불러오라니까! 너희는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황비 전하, 블라이스 백작의 일로 오르테가의 분위기가 썩 좋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께 긴급한 전갈을 보내었으니 며칠만 더 기다려 주시면…….”

“나는 황제의 명령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한단 말이냐? 네놈은 내 시종인데, 왜 황제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거야. 네놈이구나. 그렇지? 네놈이었어!”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크세노가 나한테 붙인 첩자 말이다! 그게 네놈이냐고 묻고 있질 않으냐!”

“아닙니다, 전하!”

“그런데 왜 내 명령도 없이 멋대로 이 일을 크세노한테 전달해!”

데네브라는 평소처럼 화를 냈고, 시종은 평소처럼 알아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황비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자였다.

“어떻게 하면 전하께 도움이 될까 고민을 거듭하다 폐하의 힘이라도 빌려 저 건방진 오르테가의 젊은 왕을 징벌할 생각이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네 이놈!”

“전하, 샤트린 공주가 만찬장에서 기다리고 있다 들었습니다. 화를 가라앉히시어 바이칸의 황비로서 품위를 보이십시오.”

“네가 이제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전하께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이보다 더한 말도 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제 목을 치십시오.”

데네브라는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혔다. 그녀는 시종을 한참 노려보다 손짓으로 물리쳤다.

도움이 되는 자였다. 그러니 죽이지 말고 살려 둬야 했다. 데네브라는 율리아처럼 영리하진 않았으나 누구의 말을 들어야 자신에게 유리한지, 그것만은 본능처럼 알았다.

그래도 한번 피어난 의심의 꽃은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줄기를 뻗었다.

율리아는 분명 데네브라의 곁에 황제의 첩자가 있을 거라 예상했다.

있겠지. 있을 것이다. 데네브라는 크세노 황제를 믿지 않았다. 그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았다.

찾아내서 죽여야겠다. 블라이스가 감옥에서 나오는 대로 녀석에게 첩자를 찾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야겠다. 다른 이에게 시켜도 되는 일이긴 한데, 그들 중 누가 황제의 끄나풀인지 알 수가 없어 꺼려졌다.

블라이스가 필요해. 데네브라에겐 어느 때보다 그가 필요했다.

“만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찬장으로 가니 샤트린이 데네브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