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225/319)

197화

* * *

카루스는 부하들과 함께 데네브라가 머무르고 있는 왕비궁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은 황제의 아내를 가둬 놓고 감시하면서도 전혀 불편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오르테가로 온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남부 함대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몰래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왕비궁 여기저기에 철저하게 인원을 배치한 바바슬로프가 카루스에게 다가왔다.

“새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아예 대놓고?”

“솜씨 좋은 궁수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명령하신다면 놈들이 황제에게 어떤 급보를 날리는지 알아오겠습니다.”

“지금은 괜찮아. 뭐라고 써서 보내는지 뻔하니까.”

어차피 데네브라가 블라이스를 시켜 샤트린 공주를 죽이려 했고, 왕위에 오른 레위시아가 블라이스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보고일 것이다.

“중요한 건 황제의 반응이지. 일단 내버려 둬.”

“알겠습니다.”

“데네브라는?”

“그 미친…… 황비는 아까부터 저쪽 발코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밥도 저기서 먹고, 술도 저기서 먹고, 이제는 낮잠도 저기서 자려는지…….”

보고를 마친 바바슬로프가 험한 말로 데네브라를 욕했다.

그녀가 나와 있는 발코니는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시위하듯 일부러 그곳에 나와 집요하게 카루스를 노려보았다.

“저것도 내버려 둬. 실컷 보라고 해.”

“괜찮으십니까? 저는 카루스 님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이렇게 소름이 돋는데.”

“노려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짐승이 뭐가 무섭나. 나야 데네브라가 저렇게 공개된 장소에 나와 주면 고맙지. 이쪽은 감시하는 입장이니까.”

“긍정적이시네요.”

“그렇게 살기로 했어.”

“갑자기 왜요?”

카루스가 나무 그늘 밑에서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설핏 웃었다.

“율리아의 저주에 대해 알았잖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암흑 속이었는데, 실마리가 나왔단 말이야.”

“그렇죠. 그건 희망이죠.”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이 하고자 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도.”

카루스는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때론 염세적인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뚜렷한 열기를 머금고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때 궁 안에서 데네브라의 심부름꾼이 나와 말을 건넸다.

“카루스 님.”

“무슨 일이지.”

“데네브라 님께서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절하지.”

“거절하실 경우, 아르테 백작과 동석하시는 건 어떤지 여쭈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카루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그를 노려보던 데네브라가 눈이 마주치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난간에 손을 짚었다.

“아르테 백작에게 물어보겠다.”

“만찬을 준비해 두고 기다리겠습니다.”

율리아는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다.

“안 가요.”

“알겠다.”

“좀 혼자 있으라고 해요.”

그녀는 왕자궁 식당에 차려진 만찬을 앞에 두고 있었다.

거대한 식탁에 빈자리가 거의 없을 만큼 풍요로운 식사였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코코를 배려해 디저트를 제외한 모든 식사가 한꺼번에 차려졌다. 식당 안에 침이 꿀꺽 넘어가도록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가득 찼다.

카루스가 피식 웃으며 율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거창한데? 요리사랑 하녀들 봉급 좀 올려 주라고 해.”

“코코가 알아서 하겠죠.”

율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레위시아가 왕이 된 이후, 왕자궁의 하녀들은 그를 마주칠 때마다 눈물을 글썽이고 다녔다. 우리 가엾은 왕자님이 왕이 되다니 너무 감격스럽다며, 매일 아침 이게 꿈은 아닌지 뺨을 꼬집어 본다고 했다.

레위시아가 코코처럼 냉정하게 아침부터 심란하게 눈물 바람이냐고 호통이라도 쳐 주면 금세 멈출 텐데, 그는 하녀들에게 이게 다 너희가 날 잘 보살펴 준 덕이라며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

식사가 화려해진 건 다 레위시아 때문이었다.

“꼴 보기 싫어. 난 조만간 사표를 쓸 거야.”

코코가 율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왕의 시녀장이 된 그녀는 평소보다 더 치장에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율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코코가 그만두면 레위시아 님은 누가 보살펴요?”

“네가 해.”

“수석 시녀와 시녀장이 하는 일은 엄연히 달라요. 게다가 하나뿐인 측근 시녀는 멀리 외국으로 출장을 떠났잖아요.”

“그럼 한 열 명쯤 더 뽑을까. 예전 1왕자의 시녀가 전부 몇 명이었지? 수십 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많이 뽑으면 레위시아 님이 시녀들 얼굴이랑 이름을 기억이나 할까요.”

“1왕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했었구나.”

레위시아가 왕좌에 앉은 이상 그를 보좌하는 인원을 늘리긴 해야 했다. 선왕이 왕위를 물려주는 절차를 밟지 않고 급사해 버렸기에, 지금은 그를 보좌하던 자들이 그대로 남아 레위시아를 돕고 있었다.

코코가 레위시아의 빈자리를 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제 왕이 됐으니까 시녀가 아니라 시종을 뽑아야 하나? 왕비도 없고 약혼녀도 없으니 시녀를 뽑아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아니면 보좌관을 따로 두고…….”

코코가 그런 이야길 중얼거릴 때였다. 레위시아가 뒤늦게 식당에 나타나 카루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필요해지면 그때 뽑으면 되지, 벌써 그런 걸 고민하고 있어?”

“아버지가…… 힌치 백작님이 그러는데, 왕의 옆자리는 허전하면 안 된대요. 달고 다니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거라고.”

“그럼 앞으로 호위 기사를 백 명쯤 달고 다닐까?”

“겁쟁이.”

“코코, 난 왕이야.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왕 겁쟁이.”

코코가 입술을 비틀어 던진 농담에 율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루스는 헛기침으로 웃음을 감추었지만, 눈꼬리에 매달린 미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울컥한 레위시아가 코코에게 뭐라 소리치려던 순간, 마지막 손님이 식당에 나타났다.

“뭐야, 이러니까 내가 주인공 같잖아.”

샤트린이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샤트린이 거만하게 콧대를 올린 채 사뿐사뿐 걸었다. 그녀는 일어나 인사하려던 율리아에게 됐다며 손사래를 친 뒤, 레위시아에게 다가가 무릎을 살짝 굽혀 우아하게 절했다.

“만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하.”

“왜 이래?”

“제 궁의 시녀장이 이르길, 전하께서 관대하시어 그간 저의 방종을 모두 눈감아 주신 것에 감사하라고 했어요. 이제 지엄한 자리에 오르셨으니, 저는 당신의 한낱 신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야, 하던 대로 해. 먹기도 전에 토하겠어.”

“그, 크흠! 아무튼…… 앞으로는 예법에 맞는 언행으로 전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코코와 율리아가 의외라는 얼굴로 샤트린을 보았다. 식당 문밖에 서 있던 공주궁의 시녀장이 흡족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샤트린이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제 행동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레위시아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분 나빠.”

“야!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샤트린도 그런 그의 태도에 하던 행동을 그만두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공주궁의 시녀장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 모습이 보였다.

율리아는 샤트린을 따라온 공주궁의 시녀들에게 안으로 들어와 함께 식사하자고 말했지만, 그들은 초대받지 않은 식사 자리에서 이미 충분히 실례했다며 공주궁으로 돌아갔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코코와 샤트린이 투덜거리고 레위시아가 그런 둘을 꾸준히 놀리긴 했으나, 카루스와 율리아가 번갈아 적당히 중재하자 장난이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친 샤트린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레위시아는 또 아까와 같은 장난인가 싶어 지루하다고 핀잔을 주려 했다. 그런데 샤트린이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제 시녀들을 거두어 주세요.”

“뭐?”

“왕위를 두고 다투던 두 사람이 왕궁 안에서 함께 살 수는 없어요. 하물며 제 궁엔 시녀들이 아주 많아요. 누가 왕인지, 누가 진짜 권력자인지. 말이 많을 거예요.”

“신경 쓰지 마.”

“아버지가 전하께 북부 경계의 땅을 줬다고 들었어요. 저를 그곳으로 유배 보내세요. 국경에 왕족이 살고 있으면 백성의 마음이 가벼워져요. 전하는 위협이 되는 형제를 쫓아내는 것으로 왕권을 공고히 하고, 부족한 시중인은 제 시녀들로 채우세요.”

“샤트린, 그만해.”

“왕궁을 나간 왕족은 시녀를 거느리고 다녀선 안 돼요.”

“그만하라고.”

“나한테는 가족처럼 중요한 아이들이에요. 내가 어릴 때부터 왕궁에서 나만 보고 살았다고요! 우리가 졌으니까 이제 너희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누가 저 애들을 환영해 주겠어요?”

샤트린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느릿느릿 식사를 이어 가던 코코가 포크를 내려놓고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도 이번 일만은 아무런 조언도 건네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레위시아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샤트린을 바라보았다.

“선조들이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 그건 그냥 전례일 뿐이야. 법이나 정의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제가 왕궁에서 저 많은 시녀를 거느린 채 숨만 쉬어도 전하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여길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야죠. 이제 네가 왕이잖아요.”

샤트린은 고집을 부릴 셈이었다. 하지만 레위시아도 만만치는 않았다. 양보할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 혼자서 꾸역꾸역 식사를 이어가던 카루스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걸 왜 두 사람이 정합니까.”

“네?”

“그쪽 시녀들이 정해야지.”

카루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건넨 말이었는데, 샤트린의 말문이 막혔다. 레위시아가 씩 웃더니 카루스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말했다.

“옳은 말이야. 가서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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